조홍식의 유럽 톺아보기
재정적자로 무너지는 마크롱의 정치실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서방 지도자 가운데 최고 베테랑이다. 2017년부터 프랑스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줄곧 국제무대를 누벼왔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같은 해 집권에 성공했으나 2020년 재선에 실패하면서 4년의 공백기를 거쳐 돌아왔다. 국제무대 다자간 회의에서 경력자는 자연스럽게 리더십을 발휘하기 마련이라 트럼프가 마크롱을 특별히 눈엣가시로 여기는 배경이다.
9월 들어 마크롱은 프랑스 국내에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지난 8일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가 정부 예산을 두고 의회에 신임을 물었다가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낙마했다. 마크롱이 지난해 6월 의회를 해산하고 치른 총선 이후 불과 15개월 만에 두명의 총리와 내각이 무너진 셈이다. 유럽 기구에서 잔뼈가 굵은 브렉시트의 협상가 미셸 바르니에 총리, 그리고 이번에는 프랑스 중도정치의 역사를 대변하는 바이루 총리, 둘 다 마크롱의 소수정부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고 수건을 던지게 되었다.
정부의 불신임으로 야기된 정치불안정은 경제적 충격으로 더욱 휘청거리게 되었다. 미국의 신용평가사 피치는 프랑스 국채를 AA-에서 A+로 한 단계 내렸다. 상위에 속하는 국채 점수에서 중위권으로 하락했다는 의미다. 피치사는 프랑스 정치의 분열과 양극화를 평가의 이유로 들었다.
유럽 국채 시장에서 프랑스 채권은 이미 그리스보다 높은 이자율이 적용되는 형편이다. 마크롱이 집권할 즈음인 2010년대 그리스는 유럽경제의 바닥에 있었고, 프랑스는 그리스에 구제금융을 결정하는 세력이었다. 시장에서 프랑스와 그리스의 위상이 역전된 셈이다.
‘다 막아 운동’ 들불처럼 번질 잠재력 가져
정치불안정과 경제충격에 이어 프랑스의 사회 분위기도 위태롭다. 지난 10일은 모든 것은 막아버리자는 ‘블로콩 투(Bloquons tout) 운동’ 날이었다. 사회적 불평등은 심각하고 마크롱정부의 정책은 부자만을 위한 선택이라고 보는 저항운동이다. 지난 2019년 노란조끼 운동이 기존의 정당이나 노조 등의 테두리 밖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듯, 이번 ‘다 막아 운동’도 제도권 밖에서 들불처럼 번질 잠재력이 있다. 일단 10일에는 저항운동의 규모가 제한적이어서 500여명의 체포로 끝났으나 향후 어떻게 진화할지는 알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적 종합 위기의 핵심은 분배의 문제다. 마크롱은 지난 2017년 집권하면서 프랑스 정치경제의 문제를 너무 높은 세금이라고 진단하고 세금부담을 낮춤으로써 경제성장을 촉진하겠다는 공급 경제의 접근법을 선택했다. 세금을 낮추면서 재정 적자를 키우지 않으려면 반드시 정부의 공공지출도 낮춰야 한다. 초기 마크롱의 계산은 세금과 지출을 함께 낮춰 재정 적자를 국내총생산 대비 3% 이하로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공지출의 축소는 어느 나라에서나 강력한 국민의 저항으로 이어진다. 특히 프랑스는 복지의 감소에 국민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개혁이 매우 어려운 나라로 유명하다. 2019년 노란조끼 운동은 정부의 사회 보호 정책을 요구하는 대중의 강력한 반발이었다. 마크롱 정부는 감세 정책으로 세수는 줄었으나, 정부 지출이나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오히려 지출은 늘어나게 되었다.
프랑스 재정적자 문제 '사면초가'
2020년 코로나 위기로 인한 경제침체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초래했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급등도 정부의 보조금 지출 등을 부추겼다. 국가가 거두는 세금은 줄었는데 지출은 늘었으니 재정적자가 불어나는 이치는 당연하다. 2024년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의 5.8%에 달할 정도로 급격하게 증가했다. 미국의 7.3%보다는 낮지만 유로권 지역의 평균 3.1%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이번에 의회에서 불신임을 받은 바이루 총리는 프랑스의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으나 의회의 반대로 무릎을 꿇고 물러났다. 그는 440억유로 상당의 재정 적자 축소안을 통해 2026년에는 적자 수준을 국내총생산 대비 4.6%로 낮추려 했다. 야당 가운데 끝까지 바이루정부와 협상을 벌인 사회당은 440억유로가 아니라 220억 유로 정도로 적자 축소를 조정해 국민의 부담을 줄여보려 했다. 바이루는 440억은 최소한의 조정이라며 양보하지 않았고 결국 총리직을 스스로 내던진 셈이다.
프랑스에서 예산문제는 지난해 12월 바르니에내각을 무너뜨린 원인이었고, 이번에도 바이루정부의 불신임을 초래한 고질적 문제로 부상했다. 그만큼 민주주의에서 정부의 재정정책은 예민하고 까다롭다. 누구나 감세를 좋아하고 혜택의 축소는 싫어한다. 건전한 재정은 세금을 늘리고 국민의 혜택을 줄여야 가능하다. 마크롱은 무책임한 정치인이 아니다. 대통령 당선 이전에 재무장관을 역임한 나름의 전문가이고, 국가재정의 방향과 조정에 대한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유능한 정치인이라도 계획대로 예산문제를 이끌어 갈 만큼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프랑스 재정적자의 문제는 사면초가다. 마크롱은 중도와 중도 우파에 의존하는 소수정부다. 프랑스 의회는 마크롱을 지지하는 중도 및 중도 우파, 극우의 마린 르펜, 극좌의 장뤼크 멜랑숑으로 삼분되어있다. 앞서 언급한 사회당과 마크롱 지지세력이 힘을 합쳐도 사실 의회 다수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사회당은 중도좌파답게 재정적자 축소 규모를 220억유로로 낮추고, 슈퍼부자에 대한 특별세금을 부과해야 정부안에 찬성할 수 있다는 태세다.
극우의 마린 르펜은 어떤가. 유럽의 극우는 미국과 달리 사회복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세력이다. 프랑스 극우는 세계화를 비난하고 가난한 대중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예산을 지출하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르펜이 요구하듯 의회 해산과 새로운 총선, 그리고 극우의 집권이 이뤄진다고 재정적자가 해결될 기미는 없다. 오히려 지출이 늘어나 더 심각한 상황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극좌의 멜랑숑은 한술 더 뜬다. 그는 피치사의 프랑스 채권에 대한 평가 발표에 대해 미국 주도 국제 자본주의의 음모라며 프랑스는 앞으로도 훨씬 많은 채권을 발행하여 대중의 복지를 향상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마크롱을 대신해 극우나 극좌, 누가 집권하더라도 프랑스 재정적자는 해결되기 어려운 지경이다.
젊은 새 총리, 마크롱 쇠퇴 막기 버겨울 듯
이 와중에 마크롱은 세바스티앵 르코르뉘라는 39세의 젊은 국방장관을 새 총리로 임명했다. 르코르뉘는 젊은 나이에도 실제 현 내각에서 가장 오래 장관을 역임한 마크롱의 심복이다. 그는 2017년 장관으로 입각한 뒤 지난 8년 동안 줄곧 내각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청년 총리로 이제 꿈을 이뤘으나 내년 예산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쇠퇴해가는 마크롱 세력의 불길을 살리기에는 힘겨워 보인다.
르코르뉘 새 총리는 마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정치인의 이미지가 있지만 사회적 배경이나 스타일은 크게 다르다. 마크롱이 엘리트 교육을 받고 은행계에서 일한 전문가였다면 르코르늬는 20세 전후에 이미 우파 공화당 의회 보좌관으로 정치에 발을 들였고 기초자치단체장부터 상원의원까지 민주 정치의 발판을 탄탄히 다져왔다. 아버지가 기술자, 어머니가 병원비서 등 사회적 배경도 서민출신인 데다 르펜이나 멜랑숑 등 모든 정치세력과 대화할 정도로 친화력이 뛰어나다는 평이다. 마크롱이 가진 ‘부자들의 대통령’ 이미지와는 결이 다른 정치인이다.
8년 전 시작한 마크롱의 중도정치실험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형세다. 프랑스 대통령궁 ‘엘리제 보이즈 클럽’의 르코르뉘 총리가 정치 기적을 이뤄낼지, 아니면 마크롱 정치실험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할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