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경제는 어쩌다 길을 잃었나
‘아시아 새끼 호랑이’에서 정정불안·중국발충격·혁신부재로 10여년 내리막길
한때 동남아 국가들은 ‘아시아의 새끼 호랑이들’로 불렸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등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의 주요 회원국들은 풍부한 자원과 젊고 값싼 노동력, 인구 6억의 거대한 시장을 기반으로 연간 6~7%의 고도성장을 이어갔다. 지난 20여년 동안 이 지역 주요 국가들의 1인당 국민 소득은 세 배 이상 늘었다. 베트남 국민들은 2000년 대비 무려 11배나 높은 소득을 누리고 있다.
그런 동남아 국가들이 단체로 ‘중진국 함정’에라도 빠진 걸까? 동남아 성장세가 큰 폭으로 꺾이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ADB)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동남아 주요국들의 올해 경제성장률은 4~5%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미중 간 무역갈등과 그에 따른 세계공급망 재편 등으로 동남아는 중국을 대체하는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르던 지역이었다. 그런 동남아 경제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특권층 부패에 Z세대 분노폭발
글로벌투자사 록펠러인터내셔널 회장인 루치르 샤르마는 22일(현시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동남아는 어떻게 길을 잃었는가’라는 칼럼을 실었다. 샤르마는 “동남아 성장이 최근 10년 동안 하락하고 있다”면서 원인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정정불안이다. 최근 동남아 곳곳에서 특권층 부패와 불평등에 반발한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번지고 있다.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젊은 층인 ‘Z세대’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샤르마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뒤흔드는 시위는 어떻게 ‘경제의 별’이 하늘에서 추락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문제는 인도네시아만이 아니다.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 전체가 빛을 잃어가는 별들로 가득하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들이 모여 있던 동남아가 최근에는 경제성장 기대치가 가장 빠르게 추락하는 곳이 되었다.”
동남아 경제의 난조를 가장 민감하게 드러내는 곳은 바로 금융시장이다. 지난 25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루피아는 6거래일 연속 하락하며 달러당 16,735루피아까지 떨어졌다. 4월 말 이후 최저치다. 태국 바트화는 0.2% 하락해 3주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신용평가사 피치(Fitch)는 태국의 국가 신용전망을 기존 ‘안정적(stable)’에서 ‘부정적(negative)’으로 하향 조정했다. 필리핀 페소는 달러당 57.782까지 떨어지며 8주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둘째, 중국발 충격이다. 미중 무역갈등으로 대미 수출길이 좁아지자 중국은 그 잉여 생산품을 동남아로 덤핑하기 시작했다. 값싼 중국산 제품들이 동남아 시장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지난 1년 동안 중국의 대미 무역흑자는 크게 줄었지만 그 감소폭은 동남아 지역의 무역흑자를 통해 고스란히 상쇄할 수 있었다. 중국의 덤핑은 동남아 제조업에는 재앙이었다.
샤르마의 진단을 들어보자. “중국발 충격은 동남아 지역 전체의 제조업을 약화시키고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에 타격을 주어 도시 노동자들은 다시 농촌으로 내몰리고 있다. 소비는 약화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자동차 판매는 급격히 줄었다. 투자와 건설이 위축되면서 시멘트 판매도 감소하고 있다.”
최근 원자재 호황에도 인도네시아는 제조업 위축과 고용 감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FT 보도에 따르면 올해 1~6월 사이 인도네시아에서는 4만2385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그 중 절반 이상이 제조업 일자리였다. 2000~2024년 사이 인도네시아 제조업 부문의 연평균 성장률은 4.3%에 그쳤다. 이전 성장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필리핀 제조업 역시 글로벌 경기 위축과 외국인 투자 감소, 산업 내 구조적 취약성 등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셋째, 혁신의 부재다. 과도한 행정절차와 불투명한 인허가, 끊임없이 바뀌는 정책들이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동남아 국가들은 중국의 덤핑공세와 첨단 디지털 물결, 공장 자동화 등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적극적인 대응을 한 나라는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두 나라 뿐이었다.
베트남은 민간 부문 투자를 강화하고 국영기업을 정비했다. 말레이시아는 디지털 인프라를 강화하고, 개인정보보호법을 개정하는 등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샤르마는 이들 국가들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동남아 국가은 분주한 해상 교역로에 위치하고 있다. 몇몇 국가들은 좋은 항구와 숙련된 노동력을 갖추고 있다. 제조업에 필요한 강점들이다.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디지털 혁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더 많은 서비스 부문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 원자재 가격이 호황일 때는 그 바람을 타고 새로운 산업으로 다각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개혁을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규제와 국가의 간섭을 줄여야 한다.”
혁신을 향한 노력도 감지되고 있다. 로이터통신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최근 인공지능(AI) 로드맵을 마련하고 ‘국가 AI 기금’을 추진하는 등 기술 생태계 육성을 꾀하고 있다. 태국은 27억 달러 규모의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서비스 투자를 승인하며 디지털 인프라 확충에 나섰다.
이달 초 필리핀정부는 외국인 토지 임대 기간을 99년으로 연장하는 파격적 조치를 발표했다. 외국인 투자를 유치해 경제활성화를 꾀하려는 고육책이었다. 아직 성과는 미미하고 구조적 제약도 크지만, 미래 성장 동력을 혁신에서 찾으려는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다.
“동남아 경제 성장, 개혁 패키지에 달려”
과연 동남아 국가들은 ‘새끼 호랑이들’일까, 아니면 그저 ‘고양이’일 뿐일까? 이들 나라들이 중진국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국제통화기금(IMF) 이코노미스트인 앙-샤를로트 빠레 오노라토(Anne-Charlotte Paret Onorato) 박사는 지난 3월 ‘동남아 경제 성장, 야심 찬 개혁 패키지에 달렸다’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보고서의 핵심은 구조개혁이었다. 앙-샤를로트 박사는 아세안 국가들에게 규제와 거버넌스, 인재개발 등 경제사회 전반의 개혁을 동시에 단행하라고 권고했다. 만일 이런 포괄적인 구조개혁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경우 아세안 주요 신흥국들은 2년 뒤에는 평균 1.5~2%, 4년 뒤에는 최대 3%까지 추가로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보고서의 방점은 개혁의 타이밍에도 놓여 있었다. 앙-샤를로트 박사는 “거버넌스 혁신과 반부패 노력을 강화하고 인프라의 질을 개선하면, 책무성과 사업 확실성을 높여 투자 개선에 기여할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주요 아세안 신흥국들은 인구학적 이점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부양인구(아동·노인 등)보다 경제활동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다. 따라서 인구 고령화로 연금·의료 등 재정부담이 늘어나기 전에 지금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문제는 이들 국가들이 일반적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평균보다 불평등이 크고 기대수명 건강수준 생활수준이 낮다는 것이다. 비공식 노동 비중도 더 높다.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면 포용적이고 회복력 있는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신남방2.0’으로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동남아 경제의 어려움은 남의 일만이 아니다. 우리 정부는 여러해 동안 신남방정책을 통해 동남아 진출에 공을 들여왔다. 최근 미국의 관세장벽과 미중 무역갈등, 그에 따른 공급망 재편 등으로 동남아 시장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신남방2.0’으로 동남아 국가들과의 통상 외교를 강화해 나간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국은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 기술을 지닌 나라다. 동남아는 젊은 인구와 거대한 내수시장을 갖추고 있다. 우리 기술과 동남아 자원의 결합은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제80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강조한 대로 더불어 머리를 맞대는 ‘다자주의적 협력’을 이어 나갈 때, 우리나라와 동남아도 ‘함께하는 더 나은 미래(Better Together)’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