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소매요금 차등제…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의 길

2025-10-13 13:00:04 게재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단장 국제정치학 박사

대한민국 전력 체계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전력 소비는 수도권에 집중되지만, 발전은 원전·석탄·가스·재생에너지 시설이 들어선 지방에서 이뤄진다. 지방은 발전소의 소음과 분진, 송전선로 통과로 인한 환경 훼손을 감내하면서도 수도권과 똑같은 전기요금을 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전국 단일 요금제가 공평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산지의 희생을 전제로 한 불평등 구조다.

울산의 사례는 이러한 모순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울산은 원전·가스·연료전지·석탄화력, 석유화학단지의 열병합까지 다양한 발전원이 집적된 대표적인 에너지 도시다. 연간 발전량은 36TWh로 소비량 33TWh을 넘어 자급률이 110%를 기록한다. 향후 새울원전 3·4호기(2.8GW)와 해상풍력 6.2GW가 가동되면 연간 발전량은 80TWh에 달해 자급률 240%에 이를 전망이다. 결국 울산은 지역 수요를 충당하고도 남은 전력을 송전함으로써, 국가 전력망 안정성을 떠받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도시다. 그러나 울산 시민과 기업이 체감하는 전기요금은 수도권과 다르지 않다. 값싼 전기를 생산하고도 혜택이 돌아오지 않는 구조, 바로 단일 요금제가 만든 불합리다.

이제는 지역별 차등 요금제 논의가 본격화돼야 한다. 특히 소매요금 차등제는 정의로운 전환을 이루기 위한 핵심 열쇠다. 도매 차등제는 발전단가에 맞춰 한전이 전력을 조달하는 구조로, 한전 매입비 절감에는 도움이 되지만 소비자가 직접 체감하기는 어렵다. 반면 소매 차등제는 최종 소비자 요금에 직접 반영되므로 발전소를 품은 지역 주민과 기업이 즉각적인 혜택을 얻을 수 있다.

발전 소비, 지역 내 선순환 구조 마련 기반

소매요금 차등제가 필요한 이유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공정성 확보와 보상이다. 지방은 송전망 건설과 환경 훼손을 감내해왔지만 수도권과 같은 요금을 내왔다. 생산지에 정당한 보상을 하는 것이야말로 에너지 정의다.

둘째, 산업 경쟁력 회복이다. 최근 산업용 전기요금 폭등은 제조업 기반을 흔들었다. 전력 다소비 산업이 몰려 있는 울산 전남 경남은 특히 큰 충격을 받았다. 소매 차등제를 통해 이들 산업단지는 저렴한 전기를 활용해 국제 경쟁력을 되찾을 수 있다.

셋째, 분산에너지특구 근거 마련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특구는 발전과 소비가 지역 내에서 선순환하는 구조를 전제로 한다. 소매 차등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특구는 구호에 그칠 뿐이다.

넷째, 신산업 유치 기반이다. △데이터센터 △인공지능 고성능 컴퓨팅(HPC) 클러스터 △전기차 공장 등은 전기요금이 가장 중요한 입지 조건이다. 전기가 저렴한 지역이야말로 신산업을 끌어올 수 있다.

저렴한 전기요금 찾아 기업이 움직이도록

이 논의는 결코 울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호남 강원 충청 등 전국 곳곳의 발전소 입지 지역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다. 지금처럼 전국이 동일 요금을 내는 구조는 사회적 비용만 키운다.

수도권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막대한 송전망 투자가 필요하고, 그 비용을 전 국민이 똑같이 부담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나비가 꿀을 찾아 날아가듯, 기업도 저렴한 전기요금을 찾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차등제가 정착되면 산업과 인구는 전력 여건이 좋은 지역으로 분산된다. 이는 지역 균형 발전의 동력이 되고 국가 전체 전력망의 부담을 줄인다.

궁극적으로 소매요금 차등제는 단순히 전기요금 체계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에너지 정의와 균형발전 전략을 동시에 달성하는 길이다. 지방은 더 이상 전력을 생산해서 수도권으로 보내면서 편익은 동일하게 누려야 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이제 지방은 소매요금 차등제로 새로운 산업과 인구를 흡수하는 성장 거점이 될 수 있다. 울산을 비롯한 전원 부요 지역(발전소가 있는 지역)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때 대한민국 전력체계는 한 단계 성숙할 것이다. 울산 모델은 전국적인 제도 개편의 시금석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수도권 중심의 불균형 구조를 완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농수산물은 산지에서 수도권으로 직송하는 것이 상식이듯 에너지는 산지에서 소비까지 이뤄져야 정의롭다. 전기를 많이 생산하는 지역이 혜택을 체감하는 사회, 그것이야말로 공정한 전환의 정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