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싱가포르 관세협상의 시사점
대미 접근방식, 양자협상의 실용성과 다자규범의 원칙성 동시에 활용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방한이 다가오면서세간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반도로 쏠리고 있다. 트럼프의 참석여부가 불투명하지만 31일부터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주요 경제 대국들이 모두 참여하는 다자주의 경제 정상회의 무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현재 세계는 지정학적 갈등과 기후위기, 디지털 전환 등 복합적 도전이 겹쳐 있지만 무엇보다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는 요인은 미국 관세정책에 따른 보호무역주의 확산 가능성이다.
이런 가운데 주목할 점은 미국 관세정책에 대응하는 동남아의 두 나라, 베트남과 싱가포르의 대조되는 접근 방식이다. 두 나라 모두 개방경제를 통해 성장했고 교역 의존도가 높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선택한 길은 달라 보인다.
조용한 실용주의, 신속한 양자 협상
베트남은 미국 시장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2024년 베트남의 대미 수출액은 1360억달러로 전체 수출의 30%를 넘었다. 의류 신발 가구 전자제품 등 주력산업 대부분이 미국 소비자에 달려 있다. 반대로 미국 입장에서는 베트남이 중국 멕시코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무역 적자국으로, 2024년 대 베트남 무역적자가 1230억달러에 달했다. 그래서 미국은 당초 베트남에 46%의 관세를 부과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 미국의 고율 관세는 베트남 경제에 직격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베트남은 3개월 만에 미국과 새로운 무역합의에 도달했다. 베트남산 제품에 부과하려던 관세율은 46%에서 20%로 낮아졌다. 제3국 제품이 베트남을 경유해 수출되는 ‘환적 상품’에는 40% 관세가 적용된다. 대신 미국산 농산물·에너지·자동차에 대해서는 베트남이 0% 관세를 약속했다. 베트남은 지식재산권 보호조치도 강화하기로 했다.
베트남에 46%의 관세율이 처음 발표되었을 당시에는 팜 민 찐 총리와 부이 타잉 썬 외교장관이 관세부과의 부당함을 지적했지만 발언 수위는 신중했고 미국을 직접 겨냥한 공개 비난은 자제했다. 오히려 미국산 농산물과 에너지 수입을 늘리고 원산지 규정을 강화해 ‘중국산 우회 수출’ 문제를 차단하는 등 실용적 대응으로 속도감 있게 상황을 관리했다.
결과적으로 베트남은 공개적 갈등 대신 조용히 신속하게 양자협상에 응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을 택했다. 겉으로는 불리한 합의 같아 보이지만 미국과의 전략적 경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미국으로부터 ‘시장경제지위’를 조속히 인정받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는 측면도 있다. 이는 ‘조용한 실용주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사실 베트남의 이러한 자세는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에서도 확인된다. 필리핀이 공개적으로 중국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어온 데 비해 베트남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주장을 외쳐왔다.
원칙 있는 다자주의, 자유무역의 수호자
싱가포르의 경우 사정은 다르다. 미국-싱가포르 상품 교역 규모는 2024년 기준 약 882억달러이며, 이중 싱가포르의 대미 수출은 432억달러 수준이다. 비중 자체가 베트남만큼 크지 않고 교역구조도 다변화되어 있다. 미국으로서도 수출입이 균형을 보여서인지 싱가포르에 대해서는 보편관세율 10%만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싱가포르가 느끼는 충격은 다른 차원에서 온다. 싱가포르는 글로벌 공급망의 허브이자 물류·금융 중심지이다. 미중 무역갈등이 장기화하고, 전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가 심화될 경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의약품 분야에서 미국 시장 의존도가 높다.
싱가포르는 매년 미국으로 31억달러 규모의 의약품을 수출하는데 이는 싱가포르 전체 대미 수출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미국이 10월부터 미국 내 생산시설이 없는 수입 제약 분야에 최대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하자 싱가포르는 강한 위기감을 드러냈다.
싱가포르는 미국과 2004년 자유무역협정을 맺었으나 이번 미국의 조치에 맞대응하는 보복관세를 부과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다만 여러 계기에 정부 고위인사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에 비판적 입장을 밝혀 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4월 2일 ‘해방의 날(Liberation Day)’ 관세정책을 발표한 직후 로렌스 웡 총리는 미국의 발표로 인해 “자유무역의 시대가 저물고, 자의적이며, 보호주의적이고 위험한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미국이 주도해 온 자유무역질서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미국으로 인해 무너지고 있다”라고 공개 비판하였다.
아울러 싱가포르는 WTO APEC 아세안(ASEAN) 등 다자무대를 적극 활용해 미국의 보호무역 조치가 세계 경제에 끼칠 부정적 영향을 경고했다.
또한 싱가포르는 환태평양경제동ㅇ반자협정(CPTPP),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유럽연합(EU) 및 영국과의 FTA 등 다양한 협정을 통해 시장을 다변화하며 다자주의의 방파제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싱가포르가 다자 규범과 제도를 통해 장기적으로 자유무역질서를 지키려는 적극적 행위자임을 보여주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요약하면 베트남은 ‘실용적 양자주의’ 싱가포르는 ‘원칙 있는 다자주의’로 대응하고 있다. 베트남은 미국이라는 단일 시장 의존도가 크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양자 협상과 실리 추구에 집중한다.
반면 싱가포르는 교역 구조의 다변화와 제도적 틀을 무기로 삼아 장기적으로 규범을 지키는 데 방점을 둔다. 두 나라의 사례는 한국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한국, 실리와 원칙 균형감각 유지해야
베트남과 싱가포르의 대응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바로 불확실성이 커지는 시대에 양자협상의 실용성과 다자규범의 원칙성을 동시에 활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결국 한국은 베트남처럼 현실적 유연성을 갖고, 싱가포르처럼 규범적 리더십을 발휘하며, 양자와 다자를 아우르는 균형감각으로 대응해야 한다.
첫째, 베트남처럼 현실적 유연성이 필요하다.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무역 불균형을 완화하고,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3500억달러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대미 투자 문제가 놓여 있어 사정은 더욱 복잡하다. 그러나 원칙을 지키면서 유연한 자세로 계속 협상해야 한다. 동맹이기에 더욱이 합리적으로 협상이 이루어지도록 계속 설득해야 하겠다.
둘째, 싱가포르처럼 규범적 리더십도 중요하다. WTO APEC 등 다자 무대에서 자유무역질서를 지키는 목소리를 적극 표명해야 한다.
셋째, 양자와 다자, 실리와 원칙의 균형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단기적 이익만이 아니라 장기적 신뢰와 규범의 가치를 함께 추구해야 한다.
베트남과 싱가포르의 대응 방식은 달라도 목표는 같다. 바로 자유롭고 개방된 무역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보호무역은 단기적으로 특정 산업을 보호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세계 경제를 위축시키고 혁신을 저해한다.
다가오는 APEC 정상회의는 자유무역의 원칙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