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영국 톺아보기

글로벌 인재 유치 경쟁 속 모순된 영국 정책

2025-10-16 13:00:01 게재

‘미국에서 일하려는 전문직들은 해마다 10만달러(약 1억4000만원)의 비자 수수료를 지불해라.’

지난달 19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기존 수수료를 최대 100배 올리는 깜짝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전문직 H-1B 비자의 경우 원래 신청 때 1000달러를 지불하면 3년간 유효했다. 미 대통령이 해마다 10만달러 지불로 변경하자 빅테크 기업에서 불만이 폭증했다. 결국 비자 신청 때 한번 납부로 대통령이 한 발 물러섰다.

트럼프 2기가 시작된 후 미 정부는 국내 고용을 우선한다는 이유로 비자 규제도 강화하고 하버드 등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외국인 학생 유치도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영국 총리실 주도 '글로벌 인재 펀드' 조성

영국을 비롯한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각 국은 이때다 싶어 미국에서 일하거나 미국에서 구직하려는 글로벌 인재 유치에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극우 정당의 이민규제 강화 요구 때문에 유치전 속에서도 비자규제를 강화하는 모순된 정책을 실시중이다.

영국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총리는 지난 6월 총리실 직속으로 글로벌 인재 유치 태스크포스팀(Global Talent Task Force)을 만들었다. 이 TF는 총리와 재무장관에 우수한 해외인재 유치를 직접 보고하며 각 종 규제개선 등 정책도 건의하고 실행도 감독한다. TF 창설 때 5400만파운드, 약 1000억원 정도의 글로벌 인재 펀드도 만들어 시행에 들어갔다.

옥스브리지를 비롯해 버밍엄대학교, 벨파스트퀸즈대학교 등 12개 기관이 지원을 받아 뛰어난 인재 영입에 나섰다. 생명과학과 디지털 기술, 금융서비스, 청정에너지 산업 등 8개 우선 산업 분야의 연구자들을 영국으로 불러 모으려 한다.

12개 기관이 동등하게 기금을 나누기에 한 학교나 연구소에 450만파운드, 83억2000만원씩 배당된다. 5년 간 지원되는데 이 기간에 약 60~80명의 연구자들을 유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펀드 규모가 크지 않다. 실제로 프랑스는 복지를 대폭 삭감하는 가운데 해외인재 유치에는 1억유로, 우리돈으로 1600억여원의 추가 지원을 발표했다.

유럽연합(EU)의 경우 회원국과 준회원국의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호라이즌(Horizon)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2025년 예산이 73억유로(11조6800여원) 정도다. 회원국이 각자 운영하는 연구개발 지원에 더해 3개 이상의 회원국 연구소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지난 5월 초에 기존 예산에 5억유로를 추가 배정한다고 밝혔다.

이민정책 싱크탱크인 옥스퍼드대학교의 ‘이민관측소’ 모들레인 섬션 소장은 정부의 정책 방향은 옳지만 5400만파운드 액수가 다른 나라와 견줘 작다고 평가했다.

영국의 계획은 거창한 듯 하지만 모순된 비자정책이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숙련 외국인 고용에 드는 비자 등 각 종 비용이 인상 이전 미국의 1000달러보다 훨씬 비싸고 인상된 10만달러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해외 취업 희망자들에게 자문해주는 ‘비알토 파트너스(Vialto Partners)’의 조사에 따르면 영국에서 해외 전문직을 채용하려는 고용주에게 드는 각종 비용이 7만2639파운로 10만달러와 거의 차이가 없다.

예를 들면 전문직 외국인을 채용할 때 드는 비자 수수료는 4만2892파운드에 불과하지만 다른 비용이 만만치 않다. 고용주가 이 수수료를 부담하기에 비용으로 처리돼 세금을 내야 한다. 또 외국인들은 1년치 건강보험료를 한사람에 1035파운드를 선불로 내야 한다. 개인 의료보험을 들어도 예외가 없다. 전문직 비자는 5년 간 유효한데 4인 가족을 기준으로 치면 1년에 건강보험료만 4000파운드가 넘고 5년이면 2만파운드를 훌쩍 상회한다. 개인에게 큰 부담이기에 고용주가 대납하기도 한다.

영국인의 경우 급여에서 건보료가 공제되고 병원에서는 무료로 치료를 받는다. 외국인이 영국에서 일하면 영국인처럼 월급에서 건보료를 낼 수 있지만 선납하게 한다. 2015년 4월부터 6개월 이상 거주하려는 외국인에게 건보료 선납이 실행됐다.

이공계 인재를 양성하고 유치하는 단체 ‘과학공학인재유치(The Campaign for Science and Engineering, CaSE)’가 지난달 말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벤처나 중소기업의 경우 인재 유치에 건보료가 큰 부담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기업의 경우 이 부담 때문에 해외인력 채용을 중단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재무부, 비자 수수료 인하 강력 반대

총리실 산하 태스크포스팀은 이런 어려움이나 불만을 듣고 비자 수수료 면제 인하나 특화된 비자의 개선을 검토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수수료 인하의 경우 재무부가 거세게 반대한다. 스타머 총리는 지난달 30일 연설에서 우수한 외국인재에 한해 비자 수수료 일부 철폐를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돈 주머니를 쥔 재무부는 요지부동이다. 올 해 채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성장에 부채가 급증하는 가운데 재무부는 총선 공약을 어기고 증세를 고려중이다.

영국은 보수당이나 노동당정부에 상관없이 계속해서 비자 수수료를 인상해왔다. 기업들의 외국인 인재 유치 수요가 줄지 않았기에 이들의 반발에도 세수 확보를 위해 재무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민관측소의 섬션 소장은 “글로벌 인재 경쟁에도 재무부는 비자 수수료를 인하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화 비자의 개선도 어렵다. 아주 뛰어난 외국 인재를 영입하는 글로벌 인재 비자는 2020년 2월부터 시작됐고 지난해 말부터 혁신비자로 이름이 변경됐다. 예술가는 영국예술위원회, 인문사회과학자의 경우 영국학술원 등 6개 기관이 외국인 학자를 추천해주면 이들이 신속하게 영국으로 이주해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비자를 준다. 비자 수수료의 경우 한 사람당 766파운드에 불과하고 여기에 건보료가 추가된다. 전문직 비자보다 수수료가 1/55에 불과하지만 얻기가 매우 어렵다.

정확한 비자 부여 기준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세계 5대 대학 출신이거나 저명한 상을 수상해야 한다. 1년에 약 7000명 정도가 혁신비자로 영국에 왔다. 반면에 숙련 노동자 비자는 월 3500명에서 4000명 정도가 받는다. 특화 비자 개선보다 숙련직 비자 개선이 우선인데 수수료 인하는 어렵다.

숙련직 외국인은 대부분 5년 일하면 영주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정부는 이를 10년 근무로 변경하겠다고 밝혔다. 올 초 발표한 이민정책 백서에서 정부는 경제성장을 위해 우수한 외국인을 적극 유치하면서 불법 이민을 강경 단속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민반대 극우정당 약진에 집권당도 주춤

그러나 강경한 이민정책을 내세운 극우 포퓰리스트 영국개혁당이 지난 2월부터 최대 10%p 차이로 집권 노동당보다 지지율이 앞서면서 집권당조차 우수 인력의 유치에 신중해졌다. 이런 정치 환경은 영국에 오고자 하는 외국인을 망설이게 한다.

영국개혁당은 지난달 영주권 자체를 폐기하고 우수 인력조차 5년마다 비자를 신청하게 하고 기존 영주권 보유자도 박탈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나이젤 패라지 개혁당 총재는 2029년 총선에서 집권하면 50여만~60여만명의 불법 난민을 강제 송환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5년간 송환 비용이 100억파운드, 약 18조7000억원 정도인데 어디서 조달할 것이며 1년에 10만명 강제송환도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

노동당정부는 글로벌 인재 유치에 적극 나섰지만 극우정당 세력의 약진에다 세수 감소를 우려한 재무부 때문에 목표 달성이 쉽지 않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 치열한 인재 유치 경쟁을 하다 보면 이런 걸림돌을 제거할 계기가 올 수도 있다.

대구대 교수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