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의 시대에서 균형 찾기

2025-10-17 13:00:01 게재

세계적 베스트셀러 ‘도파민네이션’쓴 애나 렘키에게 던진 질문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선배님, 포럼 좋아하지 않으세요? 지식포럼 표 드리면 가실래요?” “오! 그럼 영광이죠. 감사합니다.” 달포가 지나고 메시지를 받는다. 포럼에 등록하라는 QR코드다. 무슨 강연을 들을 것인가. 포럼에는 어마어마한 인물들이 왔다. 눈에 들어온 인물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도파민네이션'의 저자 ‘애나 렘키(Anna Lembke)’다. 그는 지금 스탠퍼드대학 정신의학 교수지만 학부 때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이런 배경을 알고 애나 렘키가 인간문화와 과학기술의 교차점에서 활동하는 인물이 아닐까 추측했다.

‘도파민네이션’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포럼 당일 아침까지 한 페이지도 정독하지 못했다. 부랴부랴 도서 구독 앱을 열고 책을 다운 받는다. 인공지능 사이트 프로그램 목소리 사용법(TTS) 기능이 쏠쏠했다. 자전거로 강연장까지 가는 길에 머리말과 1장을 들었다. 이 책은 ‘중독’을 다룬다. 부제인 ‘탐닉의 시대에서 균형잡기’는 책의 핵심을 함축하고 있다.

실행이 어려울 뿐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책이 와닿았던 이유는 저자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1장에서는 성중독자 ‘제이콥’의 사례를 서술하면서 저자는 자신의 중독 경험을 털어놓는다. 애나 렘키는 한때 로맨스 소설에 중독되었다고 말한다. '트와일라잇'으로 시작해 그는 온갖 로맨스 소설을 탐닉한다. 1년쯤 지나고 평일 새벽 두 시에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분명 자신이 원하던 현실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스탠퍼드 의사에게 궁금한 지역의 모순

포럼 장소가 가까워오고 얼추 질문을 정리해야 할 시점이다.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할 때 빅테크 창업자들이 자기 자식들에게는 디지털 기기를 주지 않는 모순적 모습을 보았다. 당신은 실리콘밸리에 거주하는 학자이자 저자이다. 이런 모순을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당신의 고견을 듣고 싶다.” 다른 하나는 보다 구체적이고 민감한 질문이었다. “실리콘밸리 창업자들이 향정신성의약품인 LSD를 창의, 상상, 의사결정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애플의 공동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그렇고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창업자 폴 앨런이 그렇다.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일부에게는 지금도 유효할 것이다. 정신의학 교수이자 중독치료 의사로서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다.” 둘 중 어느 질문을 던질지는 강연 내용과 현장 분위기를 보고 결정하기로 마음 먹었다.

‘도파민과 현대사회의 덫’이라는 제목의 강연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이었다.그럼에도 현장에서 강연자로서 애나 렘키의 태세를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장충체육관 뒷편 관중석에는 적잖은 수의 어린이가 단체 관람을 왔는데, 특별히 그들을 치켜세웠다.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특히 저기 앉아 있는 어린이들에게 매우 중요해요. 한국에서는 이제 교실 스마트폰 사용이 금지된다지요? 저 친구들을 위해서 한국이 정말 훌륭한 결정을 했습니다. 제가 사는 미국에서는 국가 차원의 합의를 이루기가 쉽지 않아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한국이 장한 일을 해냈습니다.”

그가 강연에서 반복해서 가장 많이 말한 문장은 이것이다. “디지털 미디어는 마약입니다, 디지털 미디어는 마약입니다(Digital media is a drug).” 그는 의사로서 둘의 자극이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점을 쉬운 문장으로 되풀이해서 말했다. 또한 실리콘밸리의 ‘열심히 일하고 그만큼 열심히 노는(Work hard, Play hard)’ 문화의 위험성도 경계했다. 일이든 놀이든 열심히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든 열심히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단순한 회복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자극이 커진 상태에서 더 커다란 자극을 얹으면 뇌가 받는 스트레스가 계속 올라간다는 뜻이었다.

세계인구리뷰(World Population Review)에 따르면 2025년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도시는 샌프란시스코다.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렇다.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서 온 연사에게 지역의 급진성에 걸맞은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촬영 김욱진

호르메시스 접근법: 쾌락과 고통의 균형

사실 그의 강연은 쾌락과 고통의 균형점을 찾으려는 짧은 여정이나 다름 없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신경과학 분야에서 손꼽히는 발견은 뇌가 쾌락과 고통을 같은 곳에서 처리한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달콤한 초콜릿, 재밌는 영화, 짜릿한 비디오게임이 영속했으면 좋겠다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애나 렘키는 그런 순간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우리 뇌는 일반 상식과 달리 쾌락이 아니라 고통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강연 마지막에 그는 ‘호르메시스(hormesis)’ 접근법을 제안했다. ‘호르메시스’는 유해한 물질이라도 소량이면 인체에 좋은 효과를 준다는 이론이다. 그는 디지털 연결을 끊고 ‘이제는 어려워진’ 일을 하면서 약간의 도파민을 미리 분비하는 방식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24시간 스마트폰 안 써보기’를 제안했다.

스마트폰 없이 24시간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이제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 됐다. 애나 렘키는 우리가 24시간을 채울 수 있는 활동을 쭉 나열하면서 강연을 마쳤다. 운동하기, 냉수 목욕하기, 간헐적 단식하기, 기도하기, 명상하기, 호흡 운동하기, 요리하기, 정원 가꾸기, 반려동물 돌보기, 아이들과 시간 보내기, 자연 속에서 시간 보내기, 음악을 만들거나 악기를 연주하기, 도전적인 책 읽기, 앱 대신 바리스타나 가게 주인에게 직접 주문하기, 운전 대신 걷거나 자전거 타기, 감사 편지 쓰기, 오래된 친구·부모님·조부모님께 연락하기, 진실 말하기, 미안하다고 말하기, 불안하게 만드는 일 하기, 고요 속에서 앉아 있기…

필자는 이 목록을 곱씹으면서 묘한 울림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그가 전하는 당부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강연을 마무리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모두와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어떤 질문이 나올지 크게 기대됩니다.”

질문할 틈을 엿보던 필자의 오른손이 번쩍 올라간다. 마이크가 오는 동안 무슨 질문을 할지 결정한다. 어렵게 얻은 기회니 보다 논쟁적인 두 번째 질문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애나, 강연 감사합니다. 저서 '도파민네이션'에서 제이콥의 사례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2024년 초까지 당신이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근무했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면서 발견한 지역의 이면은 큰 창업가나 기업가들이 창의성이나 상상력, 경영 상 의사결정의 도구로 LSD를 활용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를 알고 나서 엄청나게 놀랐습니다. 강연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비디오 게임은 도구(tool)가 될 수도 있지만 마약(drug)이 될 수도 있습니다. LSD 같은 종류의 약물이 실리콘밸리 역사에서 매우 기능적인 역할을 한 걸까요? 그렇다면 지금도 유효할까요? 교수이자 의사이자 저자로서 당신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실리콘밸리식 영적 각성, 길은 많아

“오, 훌륭한 질문이네요. 버섯(mushroom)에 대한 말씀이지요? LSD나 버섯이요. 미국에는 사람들이 환각제나 버섯을 이용해 영적인 각성을 얻으려는 큰 흐름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에 대해 매우 회의적입니다. 매우, 매우 회의적이죠. 왜냐면 화학물질을 사용해 영적 각성을 얻을 수 있지만, 정신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강력한 화학물질이에요. 많은 위험을 가지고 있고 효과를 예측하기도 대단히 어렵습니다. 우리가 지금 미국에서 보는 현상은 사람들이 매일 극소량을 투여(microdose)하고 있다는 건데요.

저는 그 결말이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효과를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증거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우, 매우 회의적이고 매우,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영적 각성을 원한다면 영적인 길은 많이 있습니다. 영적 각성을 위해 굳이 약물을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주 좋은 질문이었어요. 감사합니다.”

강연이 끝나고 회사로 오는 길, 한강을 따라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그저 지나치던 꽃이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꽃 사진을 찍었다. 한강변에서 발견을 기다리던 꽃의 명칭을 이미지 검색을 통해 찾아봤다. ‘둥근잎 미국나팔꽃’이었다.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 귀화식물이라는 설명도 나온다. 강가에서 스마트폰으로 이런저런 정보를 찾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자니 한심한 마음이 몰려왔다. 강연 들은 지 얼마나 됐다고 말이다. 배터리도 얼마 남지 않았겠다, 과감하게 전원을 껐다. 강물을 따라 달리며 고개를 들어 세상을 봤다. 어느 가을날, 서울의 오전 하늘은 그저 높고도 푸르렀다.

김욱진 코트라 경제협력실 차장 ‘실리콘밸리 마음산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