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진의 미국 톺아보기
트럼프의 유동성 패러독스, 달러제국의 마지막 파티인가
2025년 가을 글로벌 자본시장을 관통하는 가장 두드러진 흐름은 단연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Debasement Trade)’의 확산이다.
주요 6개 법정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DXY)가 연초 110에서 98로 10% 가까이 떨어지는 동안 화폐가치 하락에 대비하려는 투자자들이 금과 비트코인 등 대체자산으로 몰려들면서 형성된 이 거대한 물결은 이제 미국을 넘어 전세계 부동산과 증시까지 뒤흔들고 있다. 덕분에 금과 비트코인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각국 증시에도 모처럼의 훈풍을 만끽하고 있다.
이러한 ‘에브리싱 랠리’에 대해 지난 18일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세계 금융안정보고서’는 자산가치의 과도한 상승, 소수 기술주로의 투자 쏠림, 그리고 시장을 떠받치는 막대한 유동성이 글로벌 금융시장의 취약성을 한층 키우고 있다며 25년 전 닷컴버블을 연상케 한다는 우려를 내어놓았을 정도다.
유동성 랠리는 계산된 정치 이벤트
이러한 유동성 파티의 배경에는 트럼프행정부의 완화적 재정·통화정책과 더불어 ‘의도된 약(弱)달러 정책’이 작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그동안 “강한 달러는 미국 제조업의 적”이라고 규정하며 연준에 지속적으로 기준금리 인하를 압박해 왔다.
이는 경기부양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달러화 가치를 낮추려는 암묵적 전략이라는 해석이다. 관세협상을 통해 해외 기업의 미국 내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한 트럼프행정부는 미국을 수입국가에서 수출국가로 전환시켜 가는 과정에서 달러약세가 수출 확대에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준금리 인하와 풍부한 유동성은 유권자들에게 투자와 자산증식의 기회를 제공해 정치적 인기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결국 트럼프행정부에게 이번 유동성랠리는 단순한 통화정책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정치적 이벤트로 경기호조와 자산상승을 통해 표심을 결집하려는 전략적 선택인 것이다.
그렇다고 트럼프행정부가 ‘강(强)달러 정책’을 완전히 폐기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트럼프정부는 달러의 신인도를 위협하는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이 보유한 미국 국채의 일부를 100년간 이자 없이 갚지 않아도 되는 영구채로 강제 전환하는 이른바 ‘마러라고 협정’을 가설적 시나리오로 한때 검토한 바 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는 달러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통해 시장에서 외면받고 있는 미 국채의 새로운 수요 기반을 마련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은 구매자로부터 받은 현금을 활용해 국채를 매입하므로 이를 발행하는 은행이나 민간기업, 그리고 구매하는 투자자가 많아질수록 국채 매입 규모는 커진다.
결국 미 정부는 더 이상 중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요 미 국채 보유국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국채 수요 기반을 확대하고 자금 조달 비용을 낮추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약달러로 지배력 강화하려는 '패러독스'
트럼프행정부의 달러 전략은 ‘달러의 가치는 낮추되 달러의 지배력은 강화하는 이중 구조’로 요약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약(弱)달러 정책을 구사해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 풍부한 유동성으로 자산시장을 자극해 정치적 인기를 얻으면서도, 압도적인 국력과 스테이블코인 시스템을 통해 전세계 금융을 달러체제 안에 묶어두려는 일종의 ‘패러독스’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트럼프정부의 바람은 과연 현실화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
하버드대 케네스 로고프 교수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달러는 여전히 세계 기축통화이지만 그 위상은 앞으로 한두 단계 낮아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저서 ‘우리의 달러, 당신의 문제(Our Dollar, Your Problem)’에서 미국의 재정적자와 정치적 불확실성이 달러 신뢰를 갉아먹고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식 약(弱)달러 정책은 단기적 경기부양에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달러의 신뢰기반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달러가 일정 수준 이상 약세로 치닫는 순간 세계 자본은 새로운 기축통화를 모색할 수 있다. 지금처럼 마냥 유동성을 통해 거품을 만들어 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자칫 ‘달러 제국의 마지막 파티’를 향한 전주곡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 역시 비슷한 우려를 내비쳤다. 그는 올해 5월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에서 달러화의 지위를 대체할 통화가 없어 달러화가 지금 즉시 무너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결국은 ‘끝장’이라는 생각이 드는 통화에는 어떤 자산도 두고 싶지 않다며 트럼프행정부 및 달러화의 미래에 대해 이례적으로 부정적 의견을 낸 바 있다.
반면 경제칼럼리스트 폴 블루스타인은 다른 관점에서 달러의 견고함을 옹호한다. 그는 최근 발간한 저서 ‘킹 달러(King Dollar)’에서 달러의 몰락은 50년 동안 수없이 예언됐지만 한번도 현실이 된 적이 없다고 썼다. 국제 결제의 80% 이상, 글로벌 채권시장의 기준 통화 대부분이 달러일 정도로 달러는 이미 세계 금융의 모세혈관처럼 얽혀 있어 미국이 약(弱)달러 정책을 쓰더라도 세계는 여전히 달러 플랫폼 위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디지털화폐와 스테이블코인 역시 달러 체제를 대체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영향력을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렇다고 그가 달러의 무한한 패권을 믿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재정 불균형, 정치 양극화, 인플레이션, 그리고 새로운 디지털 통화의 부상 등은 언제든 달러 체제를 균열시킬 수 있는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달러화가 여전히 가장 안전한 통화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지만 안전한 자산이 안전하지 않게 되는 속도는 언제나 생각보다 빠르다는 경고를 남긴다.
신뢰훼손과 여전한 견고함 사이
결국 트럼프의 달러 실험은 로고프와 블루스타인의 견해 사이 그 불안한 경계 위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약(弱)달러와 유동성이 결합된 경기호황이 가능하지만 달러신뢰가 흔들리면 그 부메랑은 곧 미국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반대로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와 재정건전성 확보를 병행한다면 약(弱)달러와 강(强)달러의 역설 속에서 ‘달러 제국 2.0’이 열릴 가능성도 병존한다. 앞서 살펴본 달러화 미래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상반된 듯 보여도 종착점은 결국 이에 귀결한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의 금태환제 폐지 선언은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대전제를 뒤흔드는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었지만 이후에도 달러는 단 한번도 패권의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그러나 산업과 기술, 국력의 절대 우위를 갖고 있었던 당시의 미국과 세계 각국으로부터 도전받고 있는 지금의 미국은 그 위상 자체가 다르다. 달러화 역시 정치의 불안정, 막대한 부채, 양극화된 사회 속에서 더 이상 완전무결한 권위의 상징이 아니다.
트럼프행정부의 유동성 실험이 ‘달러 제국의 마지막 파티’가 될지, 아니면 ‘새로운 패권의 리셋’으로 기록될지는 아직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번 랠리가 단순한 경기부양책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과 글로벌 자본 이동이 맞물린 복합적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달러는 여전히 세계의 중심 통화지만 그 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강한 미국, 강한 달러를 꿈꾸는 트럼프의 유동성 실험이 과연 소기의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