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경의 미국 현장 톺아보기
미국 태생 시민권자도 안전하지 않은 나라
조지 레테스는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다. 군 복무 중 이라크에 파병되었던 전역 군인 출신인 그는 트럼프정부의 대규모 이민자 추방 정책이 그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7월 캘리포니아 한 농장의 보안요원으로 첫 출근하던 날 그는 이민세관단속국 (ICE)에 의해 체포·구금됐다.
미국시민권자이고 전역 군인라는 그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요원들은 차 창문을 부순 뒤 운전석에 앉아있던 그의 얼굴에 페퍼스프레이를 뿌렸다. 군에서 받은 훈련대로 레테스는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으려고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지만 단속요원들은 폭력적으로 그를 차에서 끌어내린 뒤 목을 무릎으로 짓누르는 등 가혹 행위를 했다.
영장없이 구금된 사흘 동안 그에게 샤워도 전화통화도 변호사접견도 허용되지 않았다. 구금되어 있는 사흘 동안 그의 행방을 알 수 없던 가족들이 그의 안전을 염려하며 두려움에 떤 것은 물론이고, 딸 아이의 세번째 생일파티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풀려난 지 몇달이 지났지만 아직 불법 구금에 대한 정부의 사과는 없다. 그는 현재 연방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중이다.
안드레아 벨레즈 또한 미국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이민단속에 걸려 구금됐다. 지난 6월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단속 지역을 지나가던 그녀를 ICE 사복요원이 갑자기 달려들어 강제로 아무런 표식이 없는 차로 끌고 갔다. 자신이 ‘납치’당한다고 생각한 벨레즈는 요원에게 아이디와 배지 넘버를 요구했지만 들려온 대답은 “알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벨레즈는 휴대폰을 빼앗기고 48시간 이상 외부 연락없이 구금됐다가 풀려났다. 구금된 첫 24시간 동안 그녀는 마실 물조차 제공받지 못했다.
풀려난 후에도 그녀의 고초는 끝나지 않았다. 당국이 그녀가 단속을 방해하기 위해 요원의 얼굴을 가격했다고 기소한 것이다. 유죄가 확정되면 20년 형을 받을 수 있는 중범죄 혐의였다. 천만다행으로 당시 상황을 녹화한 비디오에는 단신인 그녀를 번쩍 들고 ‘납치’하듯 데려가는 요원들만 찍혔을 뿐 당국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상황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에 대한 기소는 취하되었지만 당국은 지금까지 어떤 설명이나 사과도 없다.
앨라배마주에 사는 레오나르도 가르시아도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이지만 ICE의 단속을 피하지 못했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그는 작업현장에서 연거푸 두번이나 ICE에 체포되었다. 복면을 한 ICE 요원들은 라티노로 보이는 노동자들만 체포해 갔다고 전해진다. 가르시아가 ICE에게 자신은 미국시민이라면서 시민권자와 합법 체류자에게 발부되는 리얼아이디 카드를 보여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두번이나 작업현장에서 체포된 이후 직장에 나가는 것 같은 일상생활을 하는 것조차 두렵다고 말한다.
170명 이상 시민권자들이 강제구금
불행히도 이들의 경험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미국시민이 ICE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체포·구금되는 사례가 점점 더 빈번해지고 있다. 비영리 탐사전문 매체인 ‘프로퍼블리카’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행정부 출범 후 지난 9개월 동안 이민당국에 의해 강제구금된 시민권자는 최소 170명에 달한다. 체포된 시민권자 중에는 임산부 3명, 가족단위로 체포된 어린이도 20명 있었다. 이 어린이들 중 두명은 소아암 환자로 알려졌다.
당국은 현재 이민 단속 과정에서 체포된 미국 시민권자수를 공식적으로 집계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퍼블리카’가 집계한 수는 소셜미디어, 소송기록, 법원자료, 지역언론 기사 등을 직접 검토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집계가 안된 경우를 포함하면 실제 수는 더 클 수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례들은 체포된 미국 시민 대부분이 히스패닉 라티노라는 사실이다. 영장이나 합리적 의심없이 특정 인종을 타깃으로 한 ‘인종 프로파일링’ 단속 패턴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많은 미국시민들이 단속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미국 여권이나 시민권 증서 등을 매일 소지하고 다닌다고 ‘뉴욕타임즈’는 보도했다. 하지만 이런 서류들도 무차별 체포와 구금을 막는 데 소용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단순한 ‘이민법 집행 문제’를 넘어 시민의 기본권 침해 문제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연방대법원이 인종 프로파일링 허용
지난달 연방대법원은 이민 단속에서 ‘인종 프로파일링’을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관들의 의견이 6대 3으로 갈린 가운데 대법원은 인종이나 언어 등 외적인 요소만을 가지고 체포하는 것은 안되지만 언어 외모 직업 거주지 등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불법체류 판단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트럼프정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실질적으로 ‘인종 프로파일링’을 허용한 것이다. 인종차별에 제동을 걸어야 할 헌법 수호 기관인 대법원이 반헌법적인 행위에 그린라이트를 준 것이다. 이에 인권단체들은 “이런 요소들은 곧 특정 인종·민족 집단을 표적으로 삼는 인종 프로파일링”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캐버너 대법관은 판결문에서 단속 요원들이 상대가 미국시민이거나 합법적으로 미국에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즉시 해당 개인을 놓아 줄 것이기 때문에 미국 시민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미국 시민조차, 적어도 유색 인종 미국시민은 안전하지 않다는 우려를 자아낸다. 이민법을 위반했다는 합리적 의심 없이도 라티노 히스패닉 아시안 등 피부색이 다르거나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모든 이들이 무차별적인 단속대상이 되는 상황이다. 10월 21일 뉴욕 맨해튼 차이나타운에서 벌어진 이민 당국의 대규모 급습에서도 시민권자 4명이 연행됐다가 풀려난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대법원 판결 덕분에 트럼프정부의 인종차별적 이민단속 관행은 더 급속히 확대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시민권이나 합법체류 신분 여부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불법체포와 구금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와 비판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민주당 소속인 로버트 가르시아 하원의원과 리차드 블루멘설 상원의원은 의회가 직접 나서서 진상조사를 하겠다고 10월 20일 발표했다.
각각 연방하원 정부감시 개혁위원회와 연방상원 상설조사위원회 소속인 두 의원은 크리스티 놈 국토안보부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시민권자 체포 패턴은 특히 라티노를 대상으로 한 인종 프로파일링의 급증과 일치한다’며 ‘국토안보부가 시민권을 가진 이들에게조차 인권을 무시하고 장기간 구금하는 전형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두 의원은 국토안보부가 지금까지 이민 당국에 의해 구금된 시민권자의 숫자와 각 개인이 구금된 기간을 보고하고, 이민세관단속국(ICE)과 세관국경보호국(CBP) 요원들이 무력사용에 대해 어떤 교육을 받는지를 포함한 세부정보도 제출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미국의 근간 이뤄오던 가치들 무너져
히스패닉으로는 역사상 최초로 연방대법관에 임명된 소토마이어 대법관은 인종 프로파일링을 이민단속 잣대로 허용한 대법원 판결에 반대하는 소수의견서에서 ICE 요원들이 총기까지 동원해 폭력적으로 서류 미비자와 미국 시민 모두를 체포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라티노로 보이고, 스페인어를 구사하며, 저임금 직종에 종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정부가 체포하는 나라에서 우리가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의 헌법적 자유가 상실되는 것을 방관하는 것에 반대한다.’
영장없는 체포와 구금 불허, 적법절차(due process)라는 지금까지 미국의 근간을 이뤄오던 가치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와 한탄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