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고래싸움에 APEC 활로는 있나
연결·혁신·번영으로 ‘지속가능한 내일’ 열어야 … ‘어떤 원칙에 서느냐’가 중요
과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미중 전략경쟁의 틈에서 새로운 상생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관세장벽을 높이고 있는 미국과 자유무역 수호를 자처하고 있는 중국 간 충돌에서 APEC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APEC의 딜레마는 깊다. APEC은 충돌하는 두 초강대국 모두에 의존하고 있다. APEC의 고민은 미국과 중국 간 줄다리기의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중심을 잃지 않고 버티느냐 하는 것이다.
APEC의 딜레마, 미·중 사이 '중심잡기'
늦가을 경주가 뜨겁다. 29일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가진데 이어 30일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마주 앉았다. 이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도 오늘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전세계 21개국 정상급 지도자들이 10월 29일~11월 1일 연결・혁신・번영을 주제로 열리는 경주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부대행사로 열리는 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에는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케빈 쉬 메보그룹 회장, 데이비드 힐 딜로이트 CEO를 비롯한 1700명의 글로벌 기업인들이 함께하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지난 24일(현지시간) ‘무역의 격랑을 넘어, APEC 길 찾기(Aligning APEC Beyond Trade Turmoil)’라는 보고서를 냈다. CSIS 보고서는 “미국과 중국 시장은 분명 이 지역의 성장 엔진”이라고 전제 한 뒤 “그러나 이 두 바구니에 모든 달걀을 담는 전략에는 대가가 따를 것”이라고 썼다.
이른바 주요 2개국(G2)으로 꼽히는 미국과 중국은 그동안 APEC경제의 영양 공급원 역할을 해 왔다. 미국과 중국 국내총생산(GDP)를 합치면 전세계의 43%를 차지한다. 중국의 GDP는 1990년 3608억6000만달러(약 517조4732억원)에서 2023년 17조7900억달러(약 2경5514조 4180억원)로 49배 성장했다. 같은 기간 베트남은 66배, 싱가포르는 14배, 인도네시아는 13배, 말레이시아는 9배 성장했다.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은 APEC 등을 통해 상호이익을 창출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CSIS 보고서는 “이들 국가의 성장은 경로 의존성을 만들어냈다”면서 “제조 클러스터, 물류 인프라, 금융 시스템, 노동력이 모두 미중 공급망 통합에 맞춰져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APEC 성장 기반은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과 대 중국 견제 정책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중국산 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면서 여러 나라 기업들이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을 채택했다. 중국의 공급망을 유지하면서도 일부 대체 생산기지를 동남아로 옮긴 것이다.
CSIS 보고서는 “중국 기업들마저 지리적으로 가까운 동남아의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하고 미국의 관세를 우회하기 위해 동남아로 제조시설을 확장했다”며 “이들 기업들이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을 채택하면서 동남아 국가들이 대체 시장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마저 그 효력을 잃기 시작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중국산 제품이 제3국을 통해 우회 수출되는 것마저 차단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트럼프행정부는 미국으로 수출되는 제품에 외국산 부품이나 소재 비중이 30%를 넘으면 ‘우회수출’로 간주해 특별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관세전쟁에 APEC 국가 성장 위축 겪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2일 ‘해방의 날’을 선언하면서 주요 통상국에 상호관세를 대대적으로 부과한 바 있다. 이중 상당수는 대미무역에서 흑자를 내는 아시아·태평양 국가를 겨냥한 것이었다. 한국 일본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이 타격을 입었다. 이들 APEC 국가들은 수출 감소와 성장 위축, 물가상승 등의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APEC 정상회의는 과연 그 활로를 찾을 수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부산 정상회담에서 어떤 화해의 메시지라도 내놓을까? CSIS 보고서는 그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고 있다.
“양국의 경제구조(미국의 소비·서비스 기반 경제 vs 중국의 수출 주도형 모델)는 근본적 차이를 갖고 있다. 돌파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두 나라간 경제적 긴장은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의 시장 및 공급망 통합을 위협하고 있다.”
그렇다고 APEC 회원국들이 미국과 중국만을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된다. APEC 자체의 역량으로 돌파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번 APEC이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내일 : 연결, 혁신, 번영’이라는 주제를 선택한 것도 이런 고민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확실성의 파고, 다자협력으로 넘어야
지난 5월 제주에서 열린 APEC 포럼은 미중 갈등의 틈새에서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이 스스로의 활로를 모색하는 자리였다. 이날 포럼에서 ‘불확실성의 파고, 어떻게 넘나(Navigating Uncertainty)’라는 제목의 APEC 정책 보고서가 발표됐다.
보고서는 APEC 경제가 향후 수년 간 세계의 다른 지역보다 더 큰 폭의 성장률 하락을 겪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5~2026년 APEC 역내 GDP 성장률은 2.6~2.7%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9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전세계 GDP 성장률은 2025년 3.2%, 2026년 2.9%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APEC 경제에 이런 먹구름을 몰고오는 요인은 무엇일까? 첫째, 무역의 위축이다. 미중 무역갈등과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장벽 등의 영향으로 2025년 글로벌 무역 환경은 더 악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APEC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APEC 역내의 재화와 서비스 수출은 평균 1.1% 성장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상품 무역량 성장률은 당초 3.0%으로 예상됐으나 최근 0.2%에 그칠 것으로 수정됐다.
둘째, 불확실성의 상승이다. 올해 글로벌 무역정책 불확실성 지수는 900포인트까지 상승했다. 이는 2015~2024년 평균 85포인트 상승에 비해 10배 이상 급등한 수치다. 관세인상과 무역보복 확대, 지정학적 긴장, 무역정책의 파편화 등이 불확실성의 급등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셋째, 금융시장의 변동성이다. 글로벌 변동성 지수는 2025년 4월 52포인트까지 올랐다. 이는 2023~2024년 평균 16포인트 상승의 세 배를 넘는 수치다. 그만큼 무역 긴장과 인플레이션 리스크, 지정학적 불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고래싸움에서 ‘영리한 돌고래’ 역활을
APEC 경제에 드리운 먹구름을 걷어내는 방안은 무엇일까? APEC 정책 보고서는 단기적인 위험 관리 뿐 아니라 장기적인 회복력을 구축하기 위한 해법으로 △무역정책 재조정과 △민첩한 통화・재정정책 △회복력 제고를 위한 구조개혁 △다자간 협력 재활성화 등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먼저 정책 불확실성을 줄여 무역과 투자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라고 했다. 전략적 부문에 재정을 집중 투자함으로써 장기성장과 건전 지출 사이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첨단 정보통신기술(ICT) 경제로 전환과 디지털 혁신에 따른 노동시장의 적응을 지원해야 한다고도 했다. APEC 회원국 간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공동의 경제적 도전에 대응하는 다자 협력도 권고했다.
결국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내일’은 이번 경주 APEC의 주제대로 연결과 혁신과 번영으로 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재명 대통령이 29일 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 개막식에서 행한 특별연설 역시 그런 맥락을 강조했다. “위기 상황일수록 역설적으로 연대의 플랫폼인 APEC의 역할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다. APEC은 위기의 순간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연대하며 상호 신뢰가 상호 번영의 지름길임을 입증해 왔다.”
고래싸움에서 아둔한 새우는 등이 터지지만 영리한 돌고래는 이득을 챙긴다. 두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 간 싸움에서 APEC은 ‘영리한 돌고래’가 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지정학적 여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어느 편에 서느냐’보다 ‘어떤 원칙 위에 서느냐’가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