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인간 존엄’을 위한 새로운 ‘인정투쟁’
인공지능(AI)이 현실이 되고 있다. 2025년 독일에서는 이미 기업 3곳 중 1곳(36%)이 AI를 사용하고 있다. 불과 1년 전(20%)보다 두배 가까이 급증했다. 동시에 노동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던 인간의 존엄성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 현실을 독일의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ennth)의 시각으로 살펴보자. 인간은 법적 권리, 사회적 존중, 그리고 공동체 내에서의 유대감을 통해 온전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러한 ‘인정’이 체계적으로 거부될 때, 즉 ‘무시’될 때 개인의 존엄성이 파괴된다고 한다.
지금 디지털 노동현장, ‘나의 노동 무시’
지금 AI라는 정교한 기술이 디지털 노동의 현장에서 ‘나의 노동을 무시’한다.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노동환경은 노동자의 존엄성을 세가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위협한다.
먼저 ‘권리가 부정’된다. 호네트에 따르면 모든 개인이 법적 권리를 지닌 주체로서 존중받는 것이 첫번째 ‘인정’의 차원이다. 그렇다면 ‘일하는 사람들’은 ‘인정’받고 있을까. 독일의 경우 플랫폼 기업들은 노동자를 ‘독립 계약자’ ‘자영업자’로 규정하며 병가 휴가 최저임금과 같은 기본적인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다가 2020년 연방노동법원의 판결로 상황이 바뀌었다.
당시 이른바 ‘가짜 자영업’이라는 문제가 대두되자 연방노동법원이 온라인 플랫폼의 지시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는 클라우드 워커는 노동자에 해당한다고 판시함으로써 플랫폼 노동자의 법적 권리가 인정받았다. 기술을 내세워 노동자의 법적 권리를 ‘무시’하는 관행에 사법부가 제동을 걸었고 인정투쟁의 중요한 성과다.
개인의 능력과 기여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존중받는 것이 두번째 ‘인정’이라면, 노동자의 숙련과 기여가 데이터로 환원돼 폄하되는 디지털 현실은 인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가령 아마존 물류창고의 알고리즘 관리시스템은 잘 알려진 사례다. 독일 언론과 노조가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이 시스템은 노동자의 모든 움직임을 스캐너로 추적해 ‘업무 외 시간’을 초 단위로 측정하고 통제한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노동자가 발휘하는 문제해결 능력이나 숙련도는 무시되고 오직 기계적인 속도만이 평가의 척도가 된다. 이는 노동자의 사회적 기여와 전문성을 ‘무시’하고 오직 생산성의 부품으로만 취급하는 것이다.
호네트가 말한 세번째 인정의 차원인 공동체 안에서의 구성원들과의 유대감과 소속감 연대의식도 알고리즘에 의한 개별 통제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독일의 음식 배달플랫폼 ‘리퍼란도’나 퀵커머스 ‘고릴라스’의 종사자들이 ‘사업장 평의회’를 설립하려 했을 때 사측의 조직적인 방해에 부딪혔던 사례다. 사업장 평의회는 종사자들이 연대해 목소리를 내는 핵심적인 창구다. 기업들이 이를 방해하는 것은 직원들이 공동의 문제를 인식하고 함께 대응하는 것을 막아 고립된 개인으로 남게 하려는 의도다.
이러한 ‘인정의 위기’에 맞서 독일과 유럽(EU)은 구체적인 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인정투쟁’에 나서고 있다. 기술이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도록 규칙을 재설계하는 용기인 것이다.
독일·EU, 기술폭주 막고 상호인정 증진
지난해 3월 최종 채택된 EU의 ‘플랫폼 노동지침’은 플랫폼 기업이 알고리즘만을 통해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징계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모든 최종 결정에 인간이 개입하고 감독하도록 했다. 2023년 6월 EU의회가 통과시킨 ‘인공지능법’은 기술이 인간과 환경에 이로운 방향으로 개발되고 사용돼야 한다는 원칙을 명시했다. 고용·관리·채용 등 분야에서 사용되는 AI 시스템의 투명성과 인간의 감독 의무를 부과했다.
독일 ‘사업장 평의회’ 제도는 새로운 기술 도입 시 종사자의 참여를 보장한다. 평의회는 알고리즘의 불투명성에 맞서고 기술이 인간을 통제하는 도구가 아닌 일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되도록 요구하고 있다.
앞으로 AI 시대의 진짜 질문은 ‘일자리 상실’ 문제를 넘어 ‘새로운 인정투쟁’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기술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악셀 호네트의 시선은 이 문제가 결국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엄성을 지키려는 정치의 문제임을 일깨워준다. 독일과 EU 사례는 기술의 폭주를 막고 상호인정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서명준 독일 베를린자유대 미디어사회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