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의 역설, 탄력&취약 '동시신호'
IMF “잔잔한 표면 아래 지반 흔들 …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하방요인 다각도 감지”
소리 없이 다가오는 위험이 더 무섭다. 눈에 보이는 높은 파도보다 잔잔한 수면 아래 소용돌이가 더 겁난다. 경제위기 역시 조용히 닥쳐올 때 더 심각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요즘 세계경제를 ‘잔잔한 표면 아래 흔들리는 지반(Shifting Ground beneath the Calm)’에 비유했다. IMF 10월 글로벌 금융안정 보고서는 “세계경제가 겉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하방위험 요인들이 다각도로 감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경제위기 조용히 닥쳐올 때 더 심각
여러해 동안 세계경제는 제법 탄력적이었다. 미중 전략경쟁에 무역질서가 흔들리고, 우크라이나와 중동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불거졌지만 세계경제는 그 충격을 잘 견뎌냈다. IMF에 따르면 지난해 3.3%를 기록한 세계경제 성장률은 올해 3.2%, 내년 3.1%로 예상된다. 트럼프 발 관세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191개 회원국 중 188개국이 보복성 관세 조치를 자제했다. 세계 교역의 약 72%는 여전히 최혜국 대우 조건하에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수면 아래로 감지되는 조짐은 불안하다. 우선 중장기 세계경제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 IMF는 “코로나 팬데믹 이전의 세계경제는 연평균 3.7% 성장을 구가했지만 이제 중기적으로는 연평균 3% 성장에 그칠 것”이라면서 “앞으로10년간 ‘지속적으로 부진한(persistently lacklustre)’ 성장이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IMF보고서에는 세계경제의 하방위험으로 볼 수 있는 신호들이 중층적으로 담겨있다. 첫째, 위험자산 가격이 치솟고 있다. 지난 4월 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가별 상호관세 발표 이후 위험자산은 잠깐의 조정을 거쳤지만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글로벌 시장의 여러 위험신호에도 불구하고 주식과 부동산, 암호화폐 등의 가격은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다.
둘째, 정부부채가 늘고 있다. 지난 수년 동안 세계 여러 나라들이 앞다퉈 국채발행을 늘렸다. 코로나 대응과 고령화・실업대책, 군비 확장 등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서다. 선진국 국채시장에서마저 안정적인 장기투자보다는 헤지펀드나 뮤추얼펀드 등 변동성이 큰 투자의 비중이 늘고 있다. 펀더멘털이 약한 신흥국의 경우 재정파탄이나 외환위기의 위험성이 제기되고 있다.
셋째, 기업의 관세 부담이 늘고 있다. 트럼프 발 관세인상 이후 기업의 영업이익이 줄고 있다. 취약한 기업들은 이미 유동성 압박을 받고 있다. 기업의 신용등급 강등이 이어질 경우 금융 시스템 전체의 불안정성으로 번질 수도 있다.
IMF “위험 관리할 지혜 필요한 시기”
세계경제가 이런 하방위험들을 이겨낼 수 있을까?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지난달 17일 2025 IMF 연차총회에서 ‘불확실한 세계 속의 회복력(Resilience in a World of Uncertaint)’이라는 제하의 개막연설을 했다. 그는 “세계경제 불확실성이 급등하고 있는데도 시장심리는 잘 버티고 있다”면서 “지금은 불확실성과 회복탄력성이 공존하는 시기”라고 진단했다.
무엇이 불확실성을 야기할까? 기술과 지정학, 기후, 무역에 이르기까지 기존 질서가 여러 곳에서 흔들리고 있다. 과거 여러 나라에 번영을 안겨준 세계무역체제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변화에 뒤쳐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이 부족하다”면서 “수입허가와 수출통제, 항만 수수료에 이르는 비관세조치들도 확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엇이 탄력성을 지탱하나? 가장 든든한 축은 민간 부문의 적응력이다. 기업들은 지난 수년 간 견실한 수익을 축적했다. 기업들은 이를 밑천으로 관세인상과 물가상승 등에 따른 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하지 않고 있다.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민간 기업들은 수입 앞당기기와 재고 축적, 공급망 강화 등을 통해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복탄력성의 또 다른 축은 인공지능(AI) 투자 붐이다. 특히 미국과 중국 등이 선도하고 있는 AI 투자는 세계경제의 회복을 견인하고 있다. AI는 회복탄력성이면서도 불확실성의 요인이기도 하다. IMF는 AI가 연간 전 세계 생산성 성장률을 0.1~0.8%p 끌어올릴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수백만개의 기존 일자리를 대체할 것으로 내다봤다. 오래된 직업은 사라지고, 데이터 전문가, 핀테크 엔지니어, 머신러닝 전문가 등 새로운 직업이 생겨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낙관론을 경계했다. 그는 “철도, 인터넷 등 기술혁신이 등장할 때마다 금융시장은 과잉 기대와 조정을 반복했다”면서 “닷컴버블의 사례처럼 세계는 이런 위험을 관리할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FT “세계경제 취약성 과장됐다”
회복탄력성과 불확실성을 동시에 보이는 것은 분명한 역설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탄력적이면서도 취약한 세계경제의 역설(The paradox of the resilient, fragile economy)’이라는 특집기사를 통해 IMF 보고서를 분석했다. FT는 “IMF가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면서 “일부 선택된 통계에만 의존함으로써 세계경제의 취약성을 과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세계경제 상황이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취약한 정도는 아니다”라고 FT는 짚었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와 FT가 공동으로 발표하는 ‘세계경제 회복 추적 지수- 타이거 지수’에 따르면 올해 10월 세계경제는 의외의 회복탄력성을 보이고 있다. 선진국과 신흥국을 아우르는 대부분의 실물 및 금융 지표가 평년보다 양호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선임연구원 에스와르 프라사드(Eswar Prasad)와는 FT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세계 무역과 지정학의 불확실성이 극심하다. 장단기 경제적 압력도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제성장은 놀라울 만큼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IMF의 비관론과 브루킹스연구소의 낙관론 중 어느 쪽이 맞을까? 아직은 속단하기 어렵지만 우려할 만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며칠 동안 미국과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증시가 급락세를 보였다. 지난 4일 미국에서는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이 2% 폭락했고, 대형주 중심의 스탠더드&푸어스(S&P 500)지수는 1% 넘게 내렸다. 거의 한달 만에 가장 큰 하루 낙폭을 기록한 날이었다. 다음날 아시아 시장은 7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한국과 일본의 주요 주가지수는 전날 기록했던 사상 최고치에서 5% 이상 급락했다.
월가 거물들 “AI투자 과열” 경고
세계증시 조정의 트리거는 뭘까? 월가 거물들이 잇따라 AI 투자 과열을 경고하고 나섰다. 데이비드 솔로몬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4일 “기술주 밸류에이션이 너무 높다”며 “향후 12~24개월 내 주식시장이 10~20%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테드 픽 모건스탠리 CEO는 “거시경제 충격이 아닌 자연스러운 시장 흐름 속에서도 10~15% 정도의 조정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며 “이는 오히려 시장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밝혔다. 앞서 지난달 9일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CEO는 “지정학적 긴장 등 여러 요인을 감안할 때 향후 6개월에서 2년 사이에 상당한 주식시장 조정 위험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세계경제 동력, 여전히 AI일 수밖에 없어
모든 혁명은 진통을 수반한다. 1차 산업혁명의 증기와 2차산업혁명의 전기, 3차산업혁명의 정보통신기술(ICT)은 예외없이 여러 성장통을 안겼다. 4차산업혁명의 AI 역시 취약성과 불확실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더라도 앞으로 세계경제의 동력은 AI일 수밖에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내년 예산안을 설명하는 국회 시정연설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화의 고속도로를 깔고, 김대중 대통령이 정보화의 고속도로를 낸 것처럼, 이제는 AI 시대의 고속도로를 구축해 도약과 성장의 미래를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말대로 AI 시대에는 하루가 늦으면 한 세대가 뒤처진다. 하루속히 AI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AI 불확실성과 버블이 걱정된다고?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