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아세안 협력 대전환: 기여·도약·동반의 새 질서

2025-11-14 13:00:00 게재

CSP 구상으로 새로운 협력의 틀 재설계 … 전략적 동반 성장 향하는 현실적 로드맵

손 맞잡은 한-아세안 정상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아세안 정상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하우 칸 솜 미얀마 외교부 사무차관, 로런스 웡 싱가포르 총리, 아누틴 찬위라꾼 태국 총리, 사나나 구스마오 동티모르 총리, 팜 민 찐 베트남 총리, 이재명 대통령,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훈 마네트 캄보디아 총리, 손싸이 시판돈 라오스 총리. 쿠알라룸푸르=연합뉴스 김도훈 기자
한국과 아세안은 2024년 대화관계 35주년을 계기로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CSP: 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를 수립했다. 올해 7월 제28차 한-아세안 외교장관회의 계기에 한국과 아세안은 ‘2026-30년 한-아세안 행동계획(PoA)’을 채택하고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CSP) 강화’ 및 ‘아세안 공동체 비전 2045’의 실현을 위해 더욱 협력하기로 했다.

올해 10월 이재명 대통령은 아세안정상회의 참석 계기에 대아세안 외교의 확대 비전인 ‘CSP 구상(Contributor–Springboard–Partner)’을 밝혔다. CSP 구상은 단순한 협력 선언을 넘어, 한국의 대아세안 지역 전략을 ‘상생과 동반자’의 틀로 재편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아세안 지역을 경제협력 상대국이 모여 있는 단편적인 공간으로 규정하기보다는, 불확실한 글로벌 경제 환경 속에서 함께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고 성장하는 동반자로 정의한 것이다.

CSP 구상에서 ‘기여자(Contributor)’는 한국이 아세안공동체의 비전과 꿈을 실현하는 데 적극 조력하겠다는 의미다. ‘도약대(Springboard)’는 상호 혁신과 성장을 위해 양측이 서로의 발판이 되겠다는 약속이다. 우리는 널을 뛸 때. 상대방과의 조화 속에서 합을 맞춰야만 더 높이 도약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동반자(Partner)’는 평화·안정을 함께 추구하는 공동체적 연대의 확장을 의미한다.

이 대통령은 이와 함께 연간 교역액 3000억달러, 인적교류 1500만명이라는 구체적 목표를 제시했다. 또한 2029년 한-아세안 대화관계 4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정상회의 개최도 제안했다. 2009년, 2014년, 2019년에 이어 10년 만에 양 지역 정상 간 우의와 신뢰를 다지는 자리를 한국이 다시 마련한 것이다. 기존의 경제협력 중심 접근에서 경제·디지털·문화와 함께 안보까지 아우르는 다층적인 협력을 통해 실질적인 연결성 중심의 지역 협력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한-아세안 협력 격상과 다층적 외교 진전

한국은 2025년 한-아세안 정상회의 및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했다. 특히 다자회의 속에서 형식적인 파트너가 아니라, 이제는 ‘혁신의 촉진자’이자 ‘실행력 있는 파트너’로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 주었다. 회의의 핵심 의제였던 역내 공급망 회복력, 디지털 전환, 식량·에너지 안보, 기후변화 대응에 대해 한국은 “포용적 성장과 혁신의 파트너십 강화”를 강조하며 AI·디지털 협력, 녹색산업 협력, 기술 인력 교류 확대 등을 제안해 혁신의 파트너를 자임했다.

또 한국은 ‘실행력 있는 파트너’로서 초국가범죄, 해양안보, 재난·재해 등 역내 평화와 안정 수요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스캠센터와 같은 조직적 범죄 단지를 근절하기 위해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43차 아세아나폴(ASEANAPOL) 총회에서는 한국이 제안한 ‘브레이킹 체인(Operation Breaking Chains)’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온라인 사기·인신매매 등 초국가적 범죄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첫 공식 협력체계로, 한국 경찰청과 아세아나폴 간 공조를 제도화한 사례다. 이는 지난 10월 쿠알라룸푸르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아세아나폴과의 공조를 통해 지역 내 조직적 범죄를 근절하겠다”고 밝힌 정부 방침을 제도화한 외교-치안협력 사례이자, 한국이 주도한 첫 다자 치안 협력 모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캄보디아와도 국경을 넘는 스캠(온라인 사기)과 인신매매 대응을 위한 협력체계를 구축하기로 하고, ‘한국인 대상 범죄 전담반(TF)’을 11월부터 가동하기로 합의했다.

다른 한편 한국과 말레이시아 정상은 한-말레이시아 FTA 타결을 환영하며 디지털·AI 전략산업 협력을 가속하기로 합의했다. 양자 간 FTA 타결은 협력의 제도적 기반 마련을 의미하므로, 양국 간 무역과 투자의 확대를 기대할 수 있다. 기 발효된 한-아세안 FTA는 양국 간 무역 촉진에 기여했지만, 변화하는 국제경제 환경 속에서 양국 간의 니즈를 충족하기에는 부족했었다. 이번 타결을 계기로 미래산업 분야에서의 협력이 더욱 촉진될 것으로 기대한다.

글로벌 재편 속 ‘전략적 가치’ 커진 아세안

아세안 지역을 둘러싼 세 가지 구조적 변화는 이 지역의 가치를 한층 높였다. 첫째, 글로벌 공급망 분절화로 인해 특정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위험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아세안 지역은 산업 및 광물자원 공급망 다각화의 주요 후보지로 주목받고 있다.

둘째, 글로벌 경제가 미국, 중국, EU를 중심으로 하는 다극 체제로 전환되면서, 지역 간 무역보다는 이들 축을 중심으로 한 지역 내 무역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이는 글로벌 경제에서 한국과 일본의 입지가 축소될 수 있음을 의미하므로, 아세안 지역뿐 아니라 다른 글로벌 사우스와의 협력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셋째, 6억8000만명의 인구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중산층 규모를 보유한 아세안 지역은 생산기지이자 소비시장으로 빠르게 변화할 전망이다. 이 지역의 경제적·인구학적 잠재력을 활용하기 위해서도 아세안과의 협력은 중요하다.

이번 한국 정상의 아세안 순방은 단순한 연중행사가 아니라, 한국이 아세안 지역을 중시한다는 점을 국제사회에 재차 알리는 한국 외교의 전략적 재정렬로 이해해야 한다.

이번 순방 계기 이 대통령이 발표한 ‘CSP 구상’은 시의적절하고 야심찬 비전이다.

CSP 실현을 위한 세 축별 행동전략

그러나 아직 실행 메커니즘은 명확하지 않다. 기존의 ‘한-아세안 행동계획(POA) 2026-2030’은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CSP)’의 제도적 틀을 제공하지만, 금번 발표한 ‘CSP 구상’을 실제로 작동시킬 세부 실행계획, 예산, 평가 체계를 구체적으로 포함하지는 않았다. ‘CSP 구상’이 아세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도록 한국은 ‘누가’, ‘언제’, ‘어떻게’, ‘무엇을’ 실행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로드맵을 서둘러 마련할 필요가 있다.

먼저 3대 축별 행동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CSP의 세 축(Contributor–Springboard–Partner)별로 구체적 행동계획을 마련하기 위한 범부처 협력이 필요하다. 먼저, 기여자(Contributor) 영역에서는 한-아세안 스타트업·AI 펀드조성, 디지털 역량 강화, 기술공유 플랫폼 구축이 필요하다. 혁신의 파트너로서 위상을 드높일 수 있다. 다음 도약대(Springboard) 영역에서는 공동 문화콘텐츠 제작, 청년 교류, 혁신 인재 양성 프로그램 등을 추진해 창의적 상호성(creative reciprocity)을 구현해야 한다. 이는 인적 교류 1500만명 달성을 더욱 촉진할 것이다. 또한 튼튼한 도약대를 만들기 위해 양 지역간 신뢰를 더욱 굳건히 하고 상생을 위한 국제경제환경의 조성을 위해 양 지역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동반자(Partner) 영역에서는 공동 사이버범죄 대응, 규범·안보 협의체 구축 등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같은 세 축의 발전을 위해 외교부·산업부·과기부·문체부 등 관련 부처는 CSP 전략문서(Strategy Paper)를 함께 구축하고, 민관 공동 거버넌스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둘째, 양 지역간 출범하기로 한 협의체나 신규로 타결한 FTA에 대한 후속 관리가 중요하다. 캄보디아와의 한국인 대상 범죄 TF 출범을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플랫폼으로 발전시켜야 하고, 이를 한국이 제안한 ‘브레이킹 체인’으로 연계시켜야 한다. 특히, 범죄정보 공유·합동훈련·제도 연계 등을 포함한 운영 로드맵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지속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또한 한-말레이시아 FTA 협상 타결의 후속 관리도 신경 써야 한다. 디지털 협력, 기술표준 적합성 확보, 투자환경 개선 등을 통해 기업이 성과를 체감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공급망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 한-아세안 협력의 핵심은 ‘공급망 연결성(supply chain connectivity)’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공동 물류허브 구축, AI 기반 스마트 인프라 설치 등은 유망한 사업이다. 예를 들어 태국의 ‘EEC(동부경제회랑)’와 한국 기업의 밸류체인을 결합하는 모델을 통해 ‘함께 만드는 생산-개발-유통 구조’를 실현할 수 있다. 이는 베트남에 집중된 한국의 공급망을 아세안 전역으로 확장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선언 넘어 실천으로, 다층 협력의 출발점

CSP 구상은 한국-아세안 관계를 단선적인 경제협력에서 ‘실행력 있는 다층적 협력’으로 전환하는 외교의 새로운 지평이다. 실제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한국과 아세안 지역의 기업과 시민이 변화를 체감하며, 상호 신뢰에 기반한 제도적 협력을 확산할 때, 비로소 CSP 구상은 완성될 것이다. 기여자이자 도약대이며 동반자가 되겠다는 한국의 다짐이 단순 구호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한국과 아세안은 지금 서로를 진실되게 연결하고, 번영하는 포용적 지역 질서를 함께 그려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CSP 구상은 양 지역 협력의 종착지가 아니라, 함께 써 내려갈 새로운 지역 이야기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2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