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Y정신과 ‘질’에 대한 통찰이 일군 혁신

2025-11-14 13:00:01 게재

실리콘밸리 탄생시킨 DIY 문화 … 애플 성공 배경에도 두가지 요소 녹아 있어

생일을 맞은 아들은 자전거를 사달라고 했다. 자전거 한대에 수십만원, 아니 수백만원씩 하는 시대다. 생일인데 좋은 걸 사줘야 하나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먹는다. 넌지시 아들을 떠본다. “자전거는 중고로 사고 남는 돈으로 맛있는 식당 가지 않을래?” 웬일로 아들은 흔쾌히 동의한다.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자전거를 검색한다. 수십 건의 매물 중 적당한 제품을 찾아 판매자에게 말을 건다. 당장 와도 좋다는 답변이다. 아들의 헬멧을 챙겨 지하철을 탄다. 올 때는 자전거를 타고 올 요량이다. 막상 확인한 자전거는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뒷바퀴가 심하게 닳아 있었다. 구매를 망설이자 실망하는 아들의 표정을 살핀다. “살게요. 대신 손봐서 타야 하니 30%는 깎아주셔야 합니다.”

상태가 좋지 않은 자전거를 산 이유는 커다란 의무감과 약간의 자신감 때문이다. 근래에 알게 된 책이 구매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책은 1974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이다. 이 책의 저자 ‘로버트 피어시그’는 1940년대에 한국에서 미군으로 복무했다. 군생활을 하며 한국에서 본 어떤 성벽의 완벽한 형상이 그에게는 원체험으로 남았다.

무엇이 완벽한 형상을 가능하게 했을까. 피어시그가 평생 천착한 주제는 ‘질(quality)’이다. 미국에 돌아와 그는 기술제품 설명서를 쓰는 ‘테크니컬 라이터’로 일한다. 일과 병행하며 일생의 주제를 놓지 않는다. 몇년에 걸쳐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부제로 자전적 이야기를 쓴다. 800쪽 짜리 책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은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500만부가 넘게 팔렸다.

유명 논문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는 “컴퓨터의 발전은 DIY 문화에 의존해 왔다”고 말한다. 컴퓨터만이 아니다. 자동차도 그렇다. 미국 근무 중 웬만하면 자동차를 직접 고쳐서 탔다. 타이어도 살 수 있었다. 설치를 맡기면 바퀴 하나에 19.99달러를 내야 했다. 촬영 김욱진

피어시그가 평생 천착한 주제는 ‘질’

책은 피어시그가 아들을 뒤에 태우고 자신의 친구 부부와 오토바이로 미국 대륙횡단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여행 초기, 피어시그는 친구 부부와 오토바이 수리를 두고 작은 의견 차이를 보인다. ‘오토바이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접근법 때문이다. 피어시그는 오토바이 운전자가 도구상자와 매뉴얼을 이용해 직접 오토바이를 정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친구 부부는 굳이 손에 기름때를 묻힐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능력 있는 수리공을 찾아 금액을 지불하고 일을 맡겨야 제대로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작은 차이가 결국 세계를 이해하는 커다란 틀로 확장된다. 피어시그는 친구 부부와 달리 기계문명과 정신문화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신성은 산꼭대기나 꽃봉오리에 머무르는 것처럼 디지털 컴퓨터의 회로나 오토바이 트랜스미션 기어 위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세계를 총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국에서 마주한 성벽과 같이 온전한 형상의 ‘질’을 구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책을 알게 된 후 필자도 아들의 자전거 뒷바퀴를 직접 갈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몇 만원을 들여 자전거 수리점에 가도 되지만 매뉴얼을 보고 충분히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매뉴얼은 물론 유튜브다. 집에 와서 바퀴 인치를 확인하고 타이어를 주문했다. 주말을 기다려 자전거를 끌고 올라와 아파트 현관에 주저앉았다. 아들은 신기한지 어느새 옆에 와서 조수 역할을 자청한다.

자전거 튜브에 바람을 살짝 넣은 채 타이어를 끼워야 하는 점, 바퀴의 주행 방향을 맞춰서 타이어를 끼워야 하는 점, 살짝 풀었던 브레이크를 알맞게 다시 조여야 하는 점까지 유념해야 할 사항이 적지 않았다. 직접 수리를 해보니 자전거는 그저 사고, 적당히 타고, 때가 되면 버리는 물건이 아니었다.

내친 김에 앞바퀴 튜브에 펑크가 난 필자의 자전거까지 고치기로 마음 먹었다. 인터넷으로 펑크 패치와 수리도구를 주문했다. 자전거 앞바퀴를 빼서 튜브에서 구멍난 부위를 찾았다. 사포로 펑크 부분을 연마하고 접착제를 발랐다. 접착제가 굳기 전에 패치 스티커를 붙이고 손에 힘을 쥔 채 3분간 고정했다. 집에 있는 공기주입기로 바람을 넣었다. 더 이상 바람이 새지 않는다. 신이 난 필자와 아들은 곧장 자전거를 타고 라이딩을 나갔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로버트 피어시그와 그의 아들을 흉내낸 채 말이다.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할 때는 일부러 차를 직접 고쳐서 탔다. 어느 여름, 2년 넘게 탄 자동차의 에어컨 바람이 시원찮았다. 모델을 확인하고 부품점에 가 냉매인 R1234YF를 사와 차고에서 갈아 끼웠다. 실리콘밸리 탄생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1970년대 미국 사회의 DIY 정신(가정용품의 제작·수리·장식을 직접 하는 것. do-it-yourself의 약어)을 빼놓을 수 없다.

1995년 발표된 유명 논문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는 실리콘밸리 탄생의 사상적 배경을 다뤄 호평을 받았다. 이 논문에는 “컴퓨터의 발전은 DIY 문화에 의존해 왔다(The evolution of computing has also depended upon the involvement of DIY culture)”는 직접적 표현이 나온다. 미국의 혁신을 다룬 책 ‘이노베이터’의 저자 월터 아이작슨도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그는 “혁신을 장려하는 사회·문화적 힘을 탐구”하며 “DIY 취미로 컴퓨터를 만들던 집단”을 비중 있게 다룬다.

컴퓨터 발전, DIY 문화에 의존

멀리 갈 것도 없이 애플이 그렇다. 1976년 4월, DIY로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고 있던 두 명이 회사를 창업했다. 법인등록을 마친 회사의 작업장은 여전히 부모님 집의 차고였다. 취미나 다름없던 이들의 비즈니스는 50여년이 지나고 시가총액 기준 3조 달러를 넘긴다. DIY로 시작한 애플이 번창할 수 있었던 까닭에는 인간이 감응하는 완벽한 제품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다는 창업자의 정신이 있다.

웬만한 회사는 적당한 제품을 적당하게 만들어 적당한 가격에 판다. 애플은 반대로 갔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피어시그가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제시한 원체험과 일맥상통하는 ‘질’과 ‘가치’에 대한 애플의 직관적 통찰이 자리하고 있다.

피어시그는 책에서 “인간적 가치와 기술 공학적 요구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기술 공학에서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원적 사유라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정신과 물질은 본래 하나이므로 이를 구분해 어느 한쪽만 취하는 방식으로는 총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애플의 성장요인과 꼭 같다. 애플은 예술과 기술을 구분하지 않고 인간이 감응하는 온전한 기계를 만들려 했다. 완벽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물질’에 해당되는 하드웨어와 ‘정신’에 해당되는 소프트웨어 사업을 모두 운영했다. 보편적인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이런저런 외부 기기에 탑재하는 것은 금기였다. 폐쇄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생태계에 발을 들인 사용자는 금세 감화됐다.

팀 쿡 체제의 애플은 십년 넘게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심심찮게 위기설도 흘러 나온다. 창업자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가 제품을 보지 않는 데에 있다. 지난해 발간된 ‘애프터 스티브 잡스’의 저자 트립 미클은 책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팀 쿡은 소프트웨어 디자인팀과의 회의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거절했고, 잡스를 매일 볼 수 있었던 장소인 디자인 스튜디오에는 거의 들르지 않았다.”

운영과 관리의 달인인 팀 쿡이지만 디자인 마케팅 등 애플의 ‘질’과 ‘가치’를 만드는 일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팀 쿡과 달리 잡스는 1997년 “마케팅은 결국 가치에 관한 것(Marketing is about values)”이라는 말을 남겼다.

피어시그, “정신과 물질은 본래 하나”

두 명의 기업가를 비교하며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피어시그와 교수 부부가 떠오른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오토바이를 제 손으로 고치거나 제품 개발에 직접 관여하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오토바이 수리는 돈을 주고 우수한 정비공에 맡기거나 전문가에게 제품 개발을 일임하려는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도 있다.

어느 한쪽이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생활인과 직업인으로서 사는 동안 더욱 온전한 총체를 느껴보고 싶다는 마음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삶의 태세를 갖추기 위해 반드시 오토바이를 타거나 기업을 경영해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다. 실리콘밸리 근무가 무엇을 남겼냐고 묻는다면 뭔가 직접 만들고 고쳐보는 일에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들겠다. 이번 주말에도 아들과 함께 자전거를 손보고 서울 시내를 내달려야겠다.

김욱진 코트라 경제협력실 차장 ‘실리콘밸리 마음산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