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일본 100년 소재 기업의 저력
‘시간과 축적’ 통해 기술 다져 …‘빠름’보다 ‘깊음’ 선택해 경쟁력 유지
인공지능(AI)의 등장은 산업 판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많은 테크기업들이 AI 반도체와 데이터센터용 메모리에 투자하는 등 초거대 AI 서비스 구축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공장 중심의 경쟁력이 산업을 좌우하던 시대는 마치 끝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성형 AI시대에도 소재·부품 기업들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AI기술의 기반에는 고급 소재와 정밀부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화학 조성, 초고순도 소재, 정밀 제조 기술에서 수십년의 노하우를 축적하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생성형 AI는 GPU, 메모리, 첨단 패키징 등 반도체에 의존하는데 일본의 소재 기업들은 TSMC 삼성 인텔 등 주요 반도체 제조사에 핵심 소재를 공급한다.
우에무라공업: 177년 표면처리 전문기업
1848년 오사카에서 창업된 우에무라공업(上村工業)은 177년의 역사를 지닌 일본의 대표적인 표면처리 전문기업이다. 도금약품, 표면처리용 기계, 도금가공 서비스를 모두 자사 내에서 직접 개발·제조·판매할 수 있는 기업은 전세계에서도 우에무라가 유일하다. 주요 제품군은 인쇄회로기판(PCB) 및 알루미늄 자기디스크용 도금약품, 각종 산업용 화학약품, 그리고 이를 적용하는 도금장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자 및 반도체 산업의 핵심 공정에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도금 업계 최초로 1968년에 설립된 중앙연구소를 중심으로 다양한 기술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우에무라는 약품만으로도 기계만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기술적 과제를 고객과 함께 해결하며 오랜 세월 동안 신뢰를 기반으로 한 기술 파트너십을 구축해 왔다. 이러한 고객 신뢰는 회사를 지금까지 성장시켜 온 핵심동력이다.
AI 시대에 들어서면서 반도체와 전자부품의 미세화·고신뢰화가 가속화되고 있으며 도금 및 표면처리 기술의 중요성는 더욱 높아졌다. 우에무라는 이 분야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전문기업으로, 정밀 표면처리 기술 기반으로 반도체·전자부품 고도화 트렌드에 부합하는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미세회로용 도금약품 등 고신뢰성 제품 분야에서 강점을 지닌다.
2024년 5월 중기경영계획(2025~2027)을 발표하고 향후 성장을 위한 네 가지 핵심 전략을 제시했다. 첫째, 반도체와 전자부품 분야에서 기술 지원 체제를 강화하고 고부가가치 제품의 비중을 확대한다. 둘째, 아시아·북미·유럽 등 해외 거점을 확충해 글로벌 시장 기반을 강화한다. 셋째, 중앙연구소를 중심으로 도금욕(Plating Bath), 무전해 도금, 용액 관리 장치 등 핵심기술을 고도화하고 차세대 전자부품용 기술을 선행 개발한다. 넷째, 환경 부담을 줄인 공정과 제품 설계를 추진하며 환경규제 대응 시장에서의 판매를 강화하고 지속가능한 사업 모델을 구축한다.
또한 총 200억엔 규모의 성장투자를 계획하고 있으며, 초미세 회로용 전도체 형성 기술, 신소재 표면처리 기술, 친환경 제품, 클린룸 대응 약품 공급체계 강화 등을 통해 차세대 반도체의 습식 표면처리 분야에서 톱 공급업체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177년의 역사와 기술축적을 바탕으로 우에무라는 일본 제조업의 저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꼽힌다.
이비덴: 생성형 AI 시대의 숨은 수혜자
최근 생성형 AI와 반도체 산업의 급속한 확산 속에서 가장 큰 수혜를 입고 있는 일본 기업이 있다. 1912년에 창업해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이비덴(IBIDEN) 은 인구 약 15만명 지방도시인 기후현 오가키시에 본사를 둔 전자부품 제조업체다. 주요 사업은 프린트배선기판(PCB)과 패키지 기판, 그리고 자동차용 세라믹 제품의 생산이며 특히 패키지 기판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AI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엔비디아(NVIDIA)와 인텔(Intel) 등에 공급하는 AI 서버용 반도체 패키지 기판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생성형 AI용 반도체 수요 증가의 최대 수혜 기업 중 하나로 떠올랐다. 이 영향으로 이비덴의 주가는 1년 전보다 약 3배 가까이 상승하며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생산능력을 웃도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이비덴은 본사 인근에 신공장을 신설하고 2025년 10월부터 AI 서버용 IC 패키지 기판 양산을 시작했다.
이비덴은 AI 수요라는 ‘순풍’에만 의존하지 않고 보다 고성능의 IC 패키지 기판 개발과 차세대 핵심 사업 육성을 병행하며 중장기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2026년 3월 결산 기준으로, 이비덴의 연결 순이익은 전기 대비 10% 증가한 370억엔, 매출액은 4200억엔으로 예상되며, 이것이 실현될 경우 사상 최고 실적을 기록하게 된다.
닛토보 :100년의 도전, 시대와 함께 진화
닛토보(日東紡)는 1923년 후쿠시마현에 있던 두 개의 방직회사가 통합되어 설립된 섬유 제조업체이다. 현재 본사는 도쿄에 위치하며, 등기상 본점은 창립의 뿌리인 후쿠시마현에 두고 있다.
설립 이후 닛토보는 섬유사업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혁신을 이어온 소재 제조기업이다. 100년이 넘는 닛토보의 역사는 ‘변혁과 창조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무엇이든 실로 만들어보자”라는 개척정신으로 유리의 섬유화에 도전한 결과, 1938년 세계 최초로 유리섬유의 산업화에 성공했다. 이는 회사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크게 바꾼 전환점이 되었으며 현재 주력 사업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전자기기의 고성능화에 대응하기 위해 1998년에는 저유전 특성을 지닌 특수유리 ‘NE 글라스(NE Glass)’를 개발하는 등 고부가가치 유리섬유 제품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2021년에는 대만에 특수유리 생산 공장을 신설하며 글로벌 전개를 한층 가속화하고 있다. 닛토보는 섬유사업에서 길러온 기술력과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유리섬유와 라이프사이언스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며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소재 제조기업으로 진화해왔다.
닛토보가 보유한 유리섬유(글라스파이버) 관련 소재는 인쇄회로기판 및 서버용 소재와 같은 전자재료 분야에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생성형 AI와 고속 서버 시장 확대가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닛토보는 특정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로 니치 시장을 공략하는 고부가가치 사업 영역으로의 전환을 명확히 선언했다. 모든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실현하고, 잠재 수요를 발굴하며, 고객의 핵심 니즈에 정확히 대응함으로써 글로벌 고객과의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2024 회계연도 실적은 빠르게 회복세를 보였고, 2025 회계연도에도 큰 폭의 이익 성장이 예상된다. 2026년 3월기 1분기(4~6월)에는 매출이 전년 대비 8.1% 증가하고, 영업이익도 10.0% 증가할 전망이다. 2027 회계연도에는 매출 1350억엔, 영업이익 200억엔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23년 창립 100주년을 맞은 닛토보는 2024년 4월, 전자재료·메디컬·복합재·자재·단열재 등 5개 사업본부 체제로 재편해 다음 100년을 향한 성장기반을 강화했다. 각 사업의 전문성을 높이고 시장 대응 속도를 끌어올리는 동시에 사업 간 연계를 통한 새로운 가치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속도와 혁신’으로 성장한 한국과 달라
흥미로운 점은 이들 세 기업 모두 100년이 넘는 역사에, 도쿄와 같은 대도시가 아닌 중소 규모의 지방도시에서 출발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한국이 ‘속도와 혁신’으로 산업을 성장시켜 왔다면, 일본은 ‘시간과 축적’을 통해 기술을 단단히 다져왔다. 일본의 소재·부품 산업은 화려한 스타트업 문화나 대도시 중심의 생태계에서가 아니라, 지방 중소도시에서 오랜 세월 동안 기술을 갈고닦아온 기업들로부터 비롯됐다.
도쿄가 아닌 지방에서 태어난 이들 100년 기업들은 ‘빠름’보다 ‘깊음’을 택했고, 그 결과 오늘날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세대를 이어온 장인 정신과 끊임없는 연구개발의 축적이야말로 일본 제조업의 진정한 힘이다.
생성형 AI 시대에도 기술의 본질은 결국 ‘소재’에 있다. 일본 지방 도시에서 묵묵히 기술을 쌓아온 이들 기업들이야말로 AI 시대 새로운 산업의 기반을 조용히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주역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