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보건 선진국으로 가는 길

희생이 헛되지 않으려면, 조사와 수사 분리해야

2025-11-28 13:00:01 게재

지난 6일 울산 화력발전소 해체공사 중에 많은 희생자를 낸 처참한 사고가 또 발생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과 부상당하신 분들의 쾌차를 빈다.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은 유사 사고 재발방지를 위해 사고에서 배우는 것이다.

사고 이후에야 비로소 결함이 보이는 작업계획서와 같은 포괄적 조치 외에 이번 사고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현장조치는 법규에 정한 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도 그럴 것이 해체 대상 구조물의 구조·부재·크기·노후정도·공법에서 사람까지, 여러 요소들의 조합인 특정 사고위험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조치를 모두 법규에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체공사업은 한국표준산업분류에 등재된 산업이다. 같은 분류 단위에 1196 종의 산업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산업과 나아가 현장마다 다를 수백만 가지가 넘을 구체적인 조치를 규칙에 정하고 규제와 처벌로 전체 산업재해를 예방한다는 생각은 허무맹랑한 망상이다.

상호 치명적인 조사와 수사의 엮임

유사 사고예방을 위해 사고에서 배워야 한다. 이미 정해진 법규에서 위반을 찾는 일은 수사지 조사가 아니다. 조사는 미래의 사고방지, 수사는 과거 단죄가 목적이다. 수사와 엮인 사고조사는 사고에 관한 정확한 사실 정보를 얻기 어렵다. 재발방지에 필요한 핵심 정보 대부분은 해당 공사 관계자들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자신 또는 주변인이 수사 대상이 되는 순간, 방어 기제 작용으로 그들 정보의 유용성은 소멸되고 사고의 물리적인 사실 파악마저 어려워진다. 그 조건에서 미래의 유사 사고방지를 위한 사고조사는 기대 할 수 없다.

현재 중대재해 조사기관인 안전보건공단은 수사를 담당하는 고용노동부의 수사지원 차원의 조사를 하고 있다. 이렇게 조사와 수사가 엮이면 자연적으로 조사와 수사에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조사는 수사를 의식해 기존의 법규에 정한 의무 중 사고원인에 해당할 만한 사항들을 사고원인으로, 재발방지 대책은 해당 의무 준수라고 정리하기 십상이다. 이 점이 우리나라 산업안전을 제자리 뛰게 하는 도돌이표다.

게다가 위반 조항을 찾기 어려운 경우나 수사자의 다른 의도가 있을 경우에 수사자는 자신 주장의 근거 확보를 위해 조사에 개입한다. 겉보기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이나 이 점이 수사가 울림 없는 무리한 추궁과 부당한 마녀사냥으로 빠져들게 하는 함정이다.

이와 같은 사고 조사와 수사의 엮임은 법규에 정한 의무 이행으로 모든 산재를 예방할 수 있다는 사회적 착각을 유발해 규제와 처벌 중심 정책이 당연시 된다. 이에 관한 문제의식 없는 담당 부처는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도 없다.

독립성이 사고조사의 생명

이런 이유들 때문에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등 국제기구는 사고조사의 독립성과 비처벌 원칙을 의무화하고 있다. 상당수 선진국은 대통령 직속 또는 의회 직접 보고 형태의 완전 독립된 조사기구를 운영한다.

우리도 항공산업 사고 조사와 수사 분리는 법에 정한 원칙이다. 하지만 같은 부처 소관인 건설사고 조사는 그 역할을 수사로 착각해 공익 아닌 공해가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고속성장의 그늘로 뒤떨어진 산업안전의 발전을 가속하기 위해 우리는 항공 철도 외의 모든 산업사고 조사기구를 통합해 대통령 또는 국회 직속 기구로 독립성과 전문성을 확보해야 한다.

사고조사 방법도 속히 고전에서 벗어나야 한다. 선진 석학들로부터 FRAM(기능 공명 분석법, Functional Resonance Analysis Method. 에릭 홀나겔), Acci-Map(사고 기여요인 분석, Accident Mapping. 얀센 라스무센), STAMP(시스템적 사고 모델링, System-Theoretic Accident Model and Processes. 낸시 리브슨) 등 시스템 개선을 위한 훌륭한 사고조사 분석기법들이 제시돼 이미 활용 단계에 진입해 있다. 국내 일각에서도 이들 선진 조사기법의 실용화가 진행되고 있으나 관료행정의 그늘에 덮여 있는 실정이다.

정부 담당 조직의 차관급 격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고의 필연성 이해가 목적이 아니라면 고위직의 사고현장 방문도 무의미하다.

경제가 취약한 나라들 보다 높은 비율의 무고한 노동자가 산재로 숨지고 있음에도 그 사고에서 미래의 사고예방을 배우지도 못하는, 사고 보다 처참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런 사회적 불행과 낭비의 흐름을 끊기 위한 조사와 수사 혁신은 대통령의 결단이 아니면 기대하기 어렵겠다.

고재철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