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인의 동남아 톺아보기

아세안 속 일본의 존재감, 프놈펜 이온몰에서 보다

2025-12-04 13:00:04 게재

지난달 중순, 캄보디아 프놈펜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린 한·아세안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공식적으로는 민간 차원의 트랙2 회의였지만 다수의 아세안 고위인사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해 사실상 ‘트랙 1.5’의 성격을 띠었다. 회의는 비교적 차분했지만 지역 정세 변화 속 아세안의 전략적 고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캄보디아는 여러차례 방문했던 곳이라 익숙했지만 최근 일부 한국 청년들이 온라인 사기에 연루된 사건 이후 치안 우려가 커져 이번에는 호텔 밖 외출을 자제했다. 대신 객실에서 메콩강과 프놈펜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과거 공관 근무 시절을 떠올렸다. 그러던 중 동행한 MZ세대 일행에게 “캄보디아의 대표 특산품은 후추”라고 말하니 모두 관심을 보였고, 심포지엄 종료 후 짧은 시간 동안 인근 이온몰(AEON Mall)을 찾았다.

그러나 필자의 관심은 쇼핑이 아닌 ‘관찰’에 가까웠다. 일본 대형 유통기업 AEON의 지산지소(地産地消) 전략—현지 소득·취향·구매력에 맞춘 생산·판매 구조—이 캄보디아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AEON Mall 슈퍼마켓의 후추 코너에는 현지에서 생산된 흰·검은·적색 후추가 다양하게 진열돼 있었고, 가격·포장·표기 방식까지 모두 현지 소비자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일부 일행이 신용카드 결제가 되지 않아 애를 먹는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이를 보며 다시 한번 ‘동남아에서 달러는 진정한 비상금’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일본 생산기지 대거 동남아로 이전

동남아에서 일본의 존재감은 전쟁의 기억과는 다르게 전개됐다. 일본은 제2차세계대전 중 동남아 대부분을 점령하며 초기에는 식민세력을 몰아낸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곧 자원수탈과 가혹한 통치가 드러나며 내면의 반감도 커졌다. 상식적으로는 일본이 전범국으로 외면받을 것 같지만 냉전이라는 국제질서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미국은 소련 견제를 위해 일본 부흥을 적극 지원했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일본에게 ‘잃어버린 중국 시장’의 대안으로 동남아 시장을 열어주었고, 일본의 전쟁 배상금은 자국 기업의 동남아 진출 종잣돈이 되었다. 1960~1980년대 일본 기업은 인프라 전력 제조업 등 동남아 경제 기반을 닦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엔고가 진행되자 생산기지를 대거 동남아로 이전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태국을 중심으로 자동차 산업 생태계를 장악했고, 전자제품 시장에서도 오랫동안 절대적 우위를 유지했다.

필자가 인도네시아 근무하던 1990년대 말만 해도 백화점 전자매장 한가운데에는 소니와 파나소닉이 자리했고, 삼성과 LG는 구석에 위치했다. 지금은 판도가 바뀌고 있지만 일본의 기반은 여전히 단단하다. 내연기관차 시장은 일본이 여전히 강세고, 중국 전기차는 저가 공세로 빠르게 확산되며 한국 전기차는 틈새시장을 공략 중이다. 일본은 전기차 대신 하이브리드 기술 고도화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동남아 국가들이 ‘가장 신뢰하는 외부 파트너’로 일본을 꼽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동남아연구소(ISEAS), 호주 로위(Lowy)연구소 등 주요 기관의 2024~2025년 조사에서 일본은 신뢰도 평가에서 미국과 중국을 제치고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 동남아에서 가장 신뢰받는 주요국으로 나타났으며, 신뢰도는 66.8%로 지난해의 58.9%에서 크게 상승했다. 유럽연합(EU)은 신뢰도 51.9%를 기록하며 올해 미국(47.2%)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

응답자의 41.2%는 중국을 불신한다고 답했으며, 이들 중 거의 절반(47.6%)은 중국이 경제력과 군사력을 활용해 자국의 이익과 주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소프트파워 분야에서도 일본은 관광 선호도 1위(33.0%)를 기록하며 가장 선호되는 여행지로 나타났다.(출처: 동남아연구소ISEAS)

일본이 ‘가장 신뢰하는 외부 파트너’

일본의 강점은 단순한 경제력이나 기술력보다 더 구조적인 세 요소에서 나온다. 첫째, 정책의 일관성이다. 전후 70여년 동안 일본은 장기적 관점에서 동남아 정책을 추진해 왔다. 민주당 단기 집권기를 제외하면 자민당이 지속적으로 정책을 이어왔고, 정권이 바뀌어도 기본 방향이 흔들리지 않았다. 한국 외교가 정권교체마다 기조가 크게 흔들리는 모습과 대비된다.

둘째, 산·관·학 협력의 체계화다. 일본의 동남아 연구는 방대한 문헌, 현지 조사, 분야별 전문가 네트워크에 기반해 발전했다. 한국이 아직 ‘제너럴리스트’ 중심의 체제로 운영되는 데 비해 일본은 경제·사회·문화·정치 등 분야별 ‘스페셜리스트’를 지속적으로 육성해왔다. 필자가 일본 근무를 자청했던 이유도 이 체계를 직접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여론 지도층에 대한 장기적 접근이다. 동남아 중견 관료·연구자·언론인 중 일본 유학 경험자가 매우 많다. 이는 단순한 장학 프로그램이 아니라 일본이 수십년간 의도적으로 구축해온 ‘친일 네트워크’의 성과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위기 국면에서도 일본이 안정적 신뢰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다.

한국도 아세안 협력에 적극적이지만 아직 일본과의 격차는 존재한다. 단순히 일본 모델을 모방하기보다 한·일·아세안 3각 협력 모델을 구축해 시너지를 내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방향이 될 것이다.

중산층 겨냥한 실용형 모델 만들어야

프놈펜의 AEON Mall이 일본 현지화 전략의 상징이라면, 베트남 롯데백화점은 한국형 프리미엄 시장의 성공 사례다.

그러나 앞으로의 핵심은 프리미엄 시장뿐 아니라 동남아 중산층을 겨냥한 실용형 유통·서비스 모델을 확장하는 데 있다. 특히 현지 생산품을 단순히 내수용으로 판매하는 것을 넘어 관광객 대상 판매 및 제3국 수출과 연계하는 전략은 한국 기업에도 참고할 만하다. 이는 단순한 상품 판매를 넘어 현지 산업 생태계와 연결된 상생 모델로 발전할 수 있다.

한·아세안 교역 규모는 약 2000억달러에 이르지만 한국의 일방적 무역흑자 구조는 장기적으로 지속가능성이 낮다. 현지 생산품의 역수입과 합리적 국내 공급은 소비자 후생을 높이고 교역 불균형을 완화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낼 수 있다.

이재명정부의 아세안 중시정책 기대

이재명 대통령은 올 10월 쿠알라룸프르 한·아세안정상회의에서 한·아세안 전략적 포괄적 동반자 관계(CSP) 비전을 제시했다.

‘C’는 꿈과 희망의 조력자(Contributor for Dreams and Hope)로서 한·아세안 간 1500만명 교육시대를 열어가고, ‘S’는 성장과 혁신의 도약대(Springboard for Growth and Innovation)로서 한·아세안 3000만달러 교역 시대를 확대해 가는 것이다. ‘P’는 아세안 청년들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평화와 안정의 동반자(Partner for Peace and Stability)로서 최근 캄보디아 사태로 문제가 되는 온라인 스캠 등 국제적 범죄 근절을 위한 한·아세안 협력 비전을 말한다.

이재명정부가 임기 내 이러한 CSP 비전을 구체화해 아세안 중시정책의 실질적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하면 아세안 내 우리의 위상도 한 단계 높아지는데 기여할 것으로 본다.

프놈펜 AEON Mall의 후추 한 봉지는 단순한 향신료가 아니라 일본이 수십 년간 아세안과 구축해온 신뢰·지속성·현지화 전략의 상징이었다. 한국이 진정한 아세안 협력 파트너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단기적 접근을 넘어 현지화·지속성·신뢰라는 세 가지 요소를 장기적으로 축적해야 한다. 이는 한국의 미래 대아세안 외교의 든든한 토대가 될 것이다.

유엔기념공원 관리처장 전 아세안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