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천 칼럼
민원서류 천국으로 드러난 국가 행정망의 아이러니
‘디지털플랫폼정부’라는 거창한 이름이 사용된 것은 지난 정부 때부터다. 이번엔 ‘인공지능(AI)정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의 간단한 배터리 화재 하나로 국가정보시스템의 중추신경이 완전히 망가진 처지에서 보면 전혀 몸에 맞지 않는 옷 이름들이다. 민생은 마비될지언정 국정까지 마비되진 않을 거라는 공직사회 특유의 믿음이 있었던 것일까.
시대에 맞지 않는 행정과 정치를 보면서 느끼는 자괴감은 누구든 예외가 없을 것이다. 이게 디지털 대한민국의 이율배반적 자화상이다. 이번보다도 규모가 컸던 2년 전 행정망 마비 사태를 상기해보면 행정망 마비가 얼마나 민생을 괴롭히는지 알 수 있다. 불과 2년밖에 되질 않았다. 그저 산불 대응하듯 했다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정부는 이번 사태 후속대책으로서 첫째로 시스템 즉각 복구 지시와 국민 불편 최소화에 총력을 기울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과연 어떤 성격의 불편을 겪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불편이 과연 무엇 때문에 야기되는지 먼저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 마비된 709개 시스템의 대다수는 민원에 속한 것들이다.
마비된 709개 시스템, 민원서류 관련
불편의 정중앙은 다름 아닌 민원서류다. 국가행정망을 민원행정서류망, 줄여서 민원망으로 불러도 무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정을 해 볼 수가 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주민번호 같은 민감번호를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공무원이 (민원)서류에 해당하는 서류를 공무원 스스로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 이게 바로 미국과 영국 같은 선진국들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번 화재 사고에서도 민원 마비 진통을 판박이로 겪고 있다. 진통의 공통점은 주민증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서비스가 전부 마비됐다고 하는 점이다. 주민번호가 있어야만 뗄 수 있는 서류, 즉 민원서류를 발급받을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행정망을 대변하다시피하는 ‘정부24’ 사이트에서 뗄 수 있는 민원서류 종류는 무려 1300종이다. 이 중 절반에 해당하는 것들이 국정자원 담당이라는 사실이 이번 사고로 밝혀졌다. 또 그 중 20%는 무인민원서류 발급기를 통해 발급 가능하다. 민원서류란 주민번호를 토대로 해서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주민번호 없이는 만들지 못하는 서류들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를 뒤집으면 놀랍고도 중요한 단서가 나온다. 즉 만일 주민번호가 없다면 (혹은 다른 말로 하면 일상 속에서 절대 사용되지 않는다면) 뗄 필요가 전혀 없는 서류들이란 뜻도 된다.
외국에서 생활해 본 사람들은 공감할 내용이지만 우리 같은 민원서류를 요구하는 일 자체가 없다. 그 이유는 공공번호인 주민번호를 민간(일상)에서 전혀 사용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아 놓은 까닭이다.
데이터센터 전원으로는 배터리는 물론 터빈발전기도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무중단 가동을 위해서는 무조건 쌍으로 작동돼야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러나 이 기본이 지켜지지 않았다.
이번 행정망 서버 복구는 정부가 약속했던 4주라는 시간을 훨씬 넘겼다. 시스템 간 연계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이는 정부가 자인한 부분이다. 이런 연계성이 일으킬 부작용은 크다.
애당초 전체 시스템을 통합형으로 개발해 연계 개연성을 없앴어야 했다. 이 점도 이중화 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지만 이런 설계기본까지도 외면한 것이 화근이었다.
행정망 자체가 데이터통합 설계를 외면해 온 탓에 복구완료까지는 1년 넘게 걸릴지도 모른다. 1년이면 시간으로 환산하면 무려 8600시간이다. 그만큼 걸릴 일을 3년 전 카톡 먹통 사태 때 국정자원 측 스스로 “우리 같으면 단 3시간 만에 복구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으니 시간 관점에서 환산해보면 무려 2800배나 튀긴 허풍이었던 셈이다.
유감스럽게도 정부가 이런 호언장담의 그릇됨을 놓고 대국민 사과를 한 적이 없다. 2년 전 행정망 마비 때도 정부는 마비의 원인을 네트워크 오류로 지목하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당시 행정망 오류가 수개월 지속되던 중 그런 마무리에 정면으로 반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다름아닌 어느 민원인이 정부24에 자신의 서류를 신청했더니 엉뚱하게도 타인 서류가 출력돼 나온 일이다. 그건 누가 봐도 네트워크 오류가 아니라 당연히 데이터 오류라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 그렇다면 정확한 진상규명을 위해 지금이라도 사태의 진상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재발도 막는다.
주민번호 관련 부작용 해결에 적극 나서야
다시 강조하지만 모든 국민불편의 시작은 민원 때문이다. 말로만 할 게 아니라 주민번호 관련 부작용 해결에 즉각 행동을 보여야 한다. 민원서류 전면 폐지에 앞장 서주는 게 여야가 당장 나서서 할 일이다.
온갖 법은 다 손대면서 국민 불편을 제거할 이런 법개정은 왜 착수하지 않는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