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초거대 AI시대의 디지털 기본권, 복지국가의 새로운 약속

2025-12-18 05:41:30 게재
서울사이버대
박태정 교수 서울사이버대 사회복지대학

휴대전화로 병원을 예약하고, 은행 앱으로 송금하며, 장보기와 결제를 화면 터치 몇 번으로 끝내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됐다. 하지만 이 ‘몇 번’의 절차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는 않다. 화면은 작고, 글씨는 빠르게 바뀌며, 인증서와 비밀번호, 알 수 없는 외래어가 뒤섞인 복잡한 절차 앞에서 많은 이들의 손은 멈춘다. 어르신은 인증번호 확인 단계에서 막히고, 누군가는 잦은 인증과 낯선 용어 때문에 길을 잃으며, 저소득층은 데이터 비용과 느린 속도 앞에 접속을 망설인다.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될수록 대면 창구는 사라지고, 여기서 발생하는 한 번의 오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권리 행사의 ‘미완료’, 곧 ‘탈락’으로 직결된다.

‘디지털 일상’조차 버거워하는 이들을 남겨둔 채, 사회는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이제는 사람이 직접 화면을 누르는 단계를 넘어, 인공지능(AI)이 예약을 대행하고 서류를 처리하는 ‘에이전트(Agent) AI’ 시대에 진입했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인증 문자 확인조차 버거운 반면, 다른 쪽에서는 AI 비서가 업무를 자동으로 처리한다. 과거의 정보 격차가 누가 더 많이 아느냐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누가 더 빠르고 안전하게 실행하게 하느냐’의 격차로 바뀐 것이다.

초거대 AI와 에이전트 서비스의 확산은 기존의 불평등이라는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 기술 격차라는 급경사를 덧씌우고 있다. 이 가파른 기울기를 방치하면 격차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고착될 것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보편적 디지털 접근권은 ‘선택적 편의’가 아닌 필수 사회기반시설의 관점에서 재정의되어야 한다. 도로와 수도가 깔려야 도시가 기능하듯, 초거대 AI 시대에는 ‘디지털사회를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비단 사회적 약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디지털 기본권’을 마련해야 할 이유다. 그렇다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일까?

첫째, ‘기능 교육’에서 ‘설계 역량’으로의 전환이다. AI를 잘 쓴다는 건 다양한 도구나 프롬프트 활용법을 아는 게 아니라, 일을 쪼개 목표를 정의하고 결과를 검증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디지털 기본 교육의 방향 역시 기기 조작법을 넘어, AI에게 맡길 일과 사람이 할 일을 구분하고 검증하는 ‘설계 역량’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동시에 공공서비스 자체도 재설계가 필요하다. 챗봇이나 자동화를 앞세워 “AI가 편리하게 알아서 해준다”는 선언 뒤로 숨지 말고 AI의 처리 과정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고, 필요시 대면 지원과 즉시 연결되는 ‘설명 가능한 행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둘째, ‘끊김 없는’ 연결망부터 제대로 구축해야 한다. AI 활용, 특히 음성 인식과 대용량 데이터 처리가 동반되는 에이전트 서비스는 단순한 인터넷 접속 이상의 속도와 안정성을 요구한다. ‘인터넷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제대로 된 고품질 연결이 보장되어야 한다. 공공 와이파이 확대와 취약지역 망 품질 개선은 편의 제공이 아니라 ‘연결권’의 실현이다. 나아가 도서관, 주민센터 등에 보안과 접속 환경이 최적화된 이른바 ‘공용 디지털 워크스테이션’을 구축해, 고성능 기기가 없거나 데이터 사용요금이 부담스러운 개인도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공유 인프라를 마련해야 한다.

셋째, 안전과 책임의 제도화다. 고도의 디지털 사회로 나아갈수록 우리는 피싱이나 오류에 더 크게 노출된다. 안전망 없는 접근권 확대는 오히려 더 큰 위험을 키울 뿐이다. 따라서, 망 연결에 기반한 공공 및 상업 서비스에서는 사용자가 별도로 조작하지 않아도 필수 안전장치가 ‘기본값으로 설정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고위험 기능의 기본 차단, 중요 행위의 이중 인증, 이상 징후 즉시 알림 등 안전조치가 표준화되어야 하며, 피해 발생 시 상담부터 복구까지 이어지는 구제 절차를 제정하고, 편리한 기술이 위험으로 돌아오지 않도록 체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

또한 이 모든 정책은 측정 가능해야 한다. 단순 이용률이 아니라 접속 가능성, 활용 역량, 안전성 등을 지표화하여 지역·집단별 격차가 실제로 줄어들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추적하고 관리해야 한다.

AI 에이전트는 이미 교육과 노동, 일상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이 거대한 흐름을 멈출 수 없다면, 국가는 누구나 이 도구에 다가설 수 있도록 토대를 다져야 한다. 보편적 디지털 기본권은 단지 인터넷, 혹은 특정 AI도구를 무료로 쓰게 해주자는 구호가 아니다. 연결 환경과 활용 역량, 안전한 서비스 설계와 성과 관리를 하나로 묶어 국민의 삶을 지키는 ‘복지국가의 새로운 약속’이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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