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시설 보강’ 넘어, 시스템안전으로 항공을 다시 설계해야
29일은 제주항공 무안사고 1주기다. 정부는 로컬라이저(방위각 시설) 지지시설 개선, 활주로 종단안전구역(RESA) 240m 확보 또는 EMAS(활주로 이탈방지시설) 도입 검토 등 긴급 안전조치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공정이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일부 공항은 장기 일정이 거론되면서 국민이 느끼는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이 불안은 단지 “공사가 늦다”는 감정이 아니다. 핵심은 “국가의 항공안전 시스템이 정말 바뀌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우리가 직시해야 할 사실은 분명하다. 항공안전은 시설물만으로 담보되지 않는다. 항공사고는 거의 예외 없이 단일 원인이 아니라 조직·절차·인력·문화·기술이 맞물린 복합적 실패의 결과다. 따라서 재발 방지를 위한 해법은 시설 보강을 포함하되, 그보다 상위에 있는 ‘시스템’의 설계와 운영을 바꾸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시스템안전(System Safety)의 출발점이다.
안전행정과 사고조사는 분리돼야
첫째, 행정과 사고조사는 분리돼야 한다. 항공안전 행정(인증·감독·집행)과 사고조사(원인 규명·권고·학습)는 목적과 논리가 다르다. 행정은 규정 준수와 집행을 통해 위험을 낮추는 기능이고 사고조사는 처벌이 아니라 재발 방지를 위한 학습 기능이다. 이 둘이 조직적으로 뒤섞이면 조사 결과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미국의 NTSB(국가교통안전위원회)가 독립된 조사기관으로서 행정과 분리된 구조를 유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립성과 전문성을 가진 조사기구가 사실관계를 투명하게 밝히고 권고를 제시하며 그 권고가 현장에서 이행되는지까지 점검할 때 비로소 ‘조사–개선–검증’의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이제 ‘조사 기능의 독립’이 선언적 구호가 아니라 법과 조직으로 작동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둘째, 시설 개선은 ‘필수’이지만 ‘전부’가 아니다. 로컬라이저 지지시설 개선, RESA 확보, EMAS 검토 같은 조치는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항공안전은 활주로 끝에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위험은 운항계획 단계에서 시작해 교육훈련, 정비, 관제, 공항운영, 승무원 피로, 조직의 의사결정 구조까지 전과정에 걸쳐 분포한다. 즉 시설이 좋아져도 시스템이 허술하면 사고는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될 수 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시설 공정률’이 아니라 안전이 실제로 강화되는 ‘작동 방식의 변화’다. 이를 위해 정부는 공항별 개선 일정과 공정뿐 아니라 지연 사유, 잔여 리스크, 임시 완화조치(절차 강화·운항 제한·감시 강화 등)를 정례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투명성이 신뢰를 만든다.
셋째, 안전은 절차 하나도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 항공은 절차 기반 산업이며 절차는 서류가 아니라 생명과 직결된 안전장치다. “이번만 예외” “현장 상황상 생략” “효율을 위해 단축” 같은 관행이 누적되면 그 순간부터 시스템은 붕괴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특히 안전과 관련된 승인·점검·정비·운항절차는 단 한 단계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법이 정한 기준은 ‘최저선’이라는 점이다. 법을 지켰다는 이유로 안전이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안전은 법적 기준을 넘어서는 ‘상위의 안전문화’, 즉 위험을 먼저 보고하고 작은 이상징후에서도 멈추고 점검하며 학습을 반복하는 조직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넷째, 항공안전은 리더십의 자격에서 시작된다. 병원장을 하려면 의사면허가 필요하듯 항공사의 최고경영자도 항공의 위험과 운항·정비·안전체계에 대한 최소한의 자격과 지식을 갖춰야 한다.
안전은 숫자로만 관리할 수 없는 전문 영역이며,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위험을 이해하지 못하면 조직은 비용과 일정의 압력에 쉽게 휘둘린다. 경영의 언어로 안전을 다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전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 경영은 ‘성과’가 아니라 ‘리스크’를 증폭시킨다. 항공사의 리더십 요건(자격·교육·책무)을 제도적으로 강화하고 안전에 대한 최종 책임이 실제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국가감독은 데이터와 현장중심으로
다섯째, 국가의 감독은 데이터와 현장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오늘날 항공안전은 사고 이후의 사후 조치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데이터 기반 위험감지, 인공지능 분석을 통한 이상징후 탐지, 위험기반 감독, 그리고 개선조치가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안전보증(Safety Assurance) 체계가 상시로 돌아가야 한다. 감독은 서류를 모으는 활동이 아니라 실제 운항과 정비가 어떻게 변동을 흡수하며 안전을 유지하는지를 확인하고, 고위험 영역에 집중 개입하는 ‘시스템 운영’이어야 한다.
무안사고 1주기는 추모의 시간인 동시에, 국가 항공안전을 재설계할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국민이 기대하는 것은 ‘진행 중’이 아니라 ‘완료된 변화’다. 그 변화가 눈에 보이는 제도와 운영으로 증명될 때 항공은 다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권보헌 한국시스템안전학회 회장 극동대 항공대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