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에 오른 2026년 동아시아 경제
미국 ‘팍스 실리카(Pax Silica)’ 구상 …동아시아 경제구조 전환 가속화될 듯
글로벌 인공지능(AI), 반도체 패권경쟁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12월 미국은 한국 일본 네덜란드 영국 이스라엘 UAE 호주 싱가포르 등 8개국(대만과 캐나다는 특별초청국)과 함께 ‘팍스 실리카(Pax Silica)’ 구상을 제시했다. 이는 ‘탈중국 디지털 생태계’ 구축을 목표로 한 기술·경제 안보협의 프레임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도쿄 일렉트론, 소니, 구글 딥마인드, ASML 등 핵심 기술기업도 국가 전략과 결합하며 기술안보의 주요 행위자로 완연히 부상했다.
이 구상의 특징은 전례 없는 포괄성이다. 과거 수출통제나 제재가 특정 장비나 반도체 공정에 국한된 규제였다면 팍스 실리카는 핵심광물의 채굴부터 에너지 인프라, 제조 및 후공정, AI 데이터센터까지를 하나의 안보사슬로 통합한다. 동시에 ‘우려 국가’에 대한 접근 통제가 정책적으로 구체화하면서 투자·합작·기술 이전의 기준 역시 안보중심으로 재편되는 추세다.
다만 미국이 주도하는 이 전략은 동맹을 보호하는 질서라기보다 미국의 안보·산업이익에 기반한 ‘조건부 협력 네트워크’에 가깝다.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공급망 블록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전략적 경쟁 관리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양상을 보이며, 미국의 필요에 따라 강도와 범위가 조정될 가변성을 지닌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은 미국 전략의 유동성을 고려해 각자의 산업·안보전략을 재조정하게 되는 ‘불안정한 균형’ 상태에 놓여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2026년을 맞이한 동아시아 경제는 AI·반도체 붐이 지속되더라도 갈림길을 만날 것이다.
적극적으로 전략 위치 조정하는 일본
가장 적극적으로 전략적 위치를 조정하는 국가는 일본이다. 일본은 팍스 실리카 구상의 설계 단계부터 참여하면서 미중 전략경쟁을 자국 산업 구조재편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다카이치 내각은 출범 직후인 11월에 AI·반도체, 조선, 그린 전환, 양자, 방위산업 등 17개 전략 분야를 설정해 ‘투자 확대를 통한 성장전략’을 발표했다.
2024년 대만의 TSMC 반도체 생산라인을 구마모토에 준공한 것도 기업의 일부 생산기지와 공정, 특히 20나노급 성숙 공정과 일부 준첨단 공정까지 포괄하는 ‘보완적 생산 거점’을 구축해 공급망 리스크를 분산하려는 전략적 포석이었다.
나아가 장비·소재·후공정·첨단패키징과 AI 서버용 반도체를 자국 내에 집적함으로써 유사시에도 공급망이 작동한다는 신뢰를 제공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홋카이도에서는 라피더스를 통해 2나노급 차세대 반도체에 도전하며 장기적 기술주권 회복도 병행하고 있다.
중국과는 경제대화 채널을 유지하며 첨단기술은 ‘디리스킹(De-risking)’으로 관리하되 비민감 영역에서는 협력을 지속하는 선별적 헤지(Hedge)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는 단기적 안정과 장기적 경쟁력을 결합해, 글로벌 공급망의 규칙과 흐름을 조율하는 전략적 조정자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전략은 정치담론에서도 반영된다. 일본 정치권에서 반복되는 ‘대만 유사=일본 존립위기’라는 말은 단순한 군사적 경고라기보다 대만 충돌이 일본의 산업과 해상 물류, 첨단 공급망 전반에 연쇄 충격을 줄 수 있음을 해석하는 틀에 가깝다.
이는 미국과 동맹국을 향한 ‘산업·안보 패키지 투자’ 제안서로도 읽힌다. “대만을 지키는 것은 일본을 지키는 것이며, 일본에 투자하는 것은 곧 공급망을 지키는 일”이라는 논리를 국제사회에 각인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프레임 위에서 일본은 기술과 지정학을 엮고, 동맹체제 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가치의 무게를 한단계 끌어올리고 있다. 일본의 공급망 집적은 소모적 경쟁을 피한다면 ‘한일 공급망 보완관계’의 전략적 토대가 될 수도 있다.
장기적 체력전으로 끌고가는 중국
중국의 대응 역시 계산적이다. 중국은 팍스 실리카를 포위전략으로 인식하지만 전면적 충돌보다 ‘위협과 대화’를 병행하는 관리전략을 택하고 있다. 일본에 대해서도 강경한 외교 수사와 군사적 신호로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실제 제재조치는 관광·문화 교류 등 신호 효과가 큰 영역에서 선택적으로 조절하고 있다. 이는 양국 간 깊은 산업·공급망 연계 속에서 전면충돌이 자국 경제에 부담이 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아울러 중국은 내부 체력 강화에 주력한다. 반도체와 AI에서 기술자립을 추진하지만 완전한 자립이라기보다는 차단돼도 경제가 멈추지 않는 수준의 복원력(Resilience)을 목표로 한다. 28나노급의 범용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고 응용 AI를 중심으로 내수와 제3국시장을 지탱하는 전략이다.
동시에 부동산·지방정부 부채 리스크를 점진적으로 정리·재배분하며 내부시장의 충격 흡수능력을 키우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성장을 잠시 늦추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체제의 안정을 지키겠다는 명확한 우선순위를 보여준다. 중국이 단기적 충돌이 아닌 장기적 체력전으로 국면을 끌고 가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중대립 구조 딜레마에 놓인 대만
대만은 미중대립 구조 속에서 가장 복잡한 딜레마에 놓여 있다. 과거 개방적인 국제시장 환경에서 미국의 설계, 대만의 파운드리, 중국의 생산이 결합된 수평적 분업을 통해 최첨단 반도체의 중심에 섰고, 2025년에도 AI 수출 붐이 투자·소득을 견인해 7%를 웃도는 고성장을 실현했다. 그러나 이제는 효율과 성장보다 위험 관리를 중시해야 하는 국면을 맞고 있다.
대만의 선택은 기술 우위를 유지하되 생산과 투자의 일부를 분산하는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첨단기술과 생산역량을 제공하는 대신 안보적 신뢰를 확보하고, 유럽과 일본에서는 산업협력과 기술분업을 통해 실질적 이익을 극대화하며, 동남아와 인도에서는 생산기지 다변화를 통해 효율성과 비용 경쟁력을 높이는 다층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복합 구도의 최대 변수는 미중 정상 간 협상이다. 이 협상은 질서를 되돌리는 분기점은 아니지만 경쟁의 작동 방식을 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관세나 일부 기술 규제의 완화를 논의한다면 시장은 이를 완화 신호로 해석하겠지만 이는 경쟁의 종식이 아니라 경쟁이 관리되는 방식의 변화에 가깝다. 이 회담의 실질적 의미는 2026년을 향해 각국이 경쟁과 공존의 비중을 어떻게 재배치할지 가늠하는 기준점을 제공하는 데 있다.
중국은 외교적 완충 공간을 활용해 내부 구조조정과 기술·산업의 체력 보강에 집중할 시간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일본은 그사이를 파고들어 반도체·AI·에너지 분야에서 자신의 전략적 가치를 한층 공고히 하려 할 가능성이 크고, 대만은 기술 분산의 속도를 스스로 통제하며 핵심 역량의 유출을 최소화하려 할 것이다.
가장 어려운 선택 요구받는 한국
가장 어려운 선택을 요구받는 국가는 한국이다. 한국은 팍스 실리카의 핵심 참여국이면서도 중국 의존도가 높은 산업구조를 동시에 안고 있다. 반도체·AI·배터리에서는 미국과의 협력이 불가피하지만 중국과의 급격한 단절 역시 현실적 대안이 아니다.
2025년 한국경제는 반도체 수출 반등에도 불구하고 내수와 설비투자 회복이 지연되며 저성장에 머물렀고, 산업 전반의 체질 개선이 정책적으로 충분히 진전되지 못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올해 한국 경제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라는 이분법보다, 선택의 비용을 어떻게 분산하고 관리할 것인가라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필요한 것은 전략적 모호성이 아니라 산업별로 속도와 깊이를 달리하는 ‘전략적 정밀화’다. 이는 수사적 선언이 아니라 산업·금융·에너지 정책 전반에서 실행되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첨단 공정의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고 이를 국제표준으로 정착시키되 범용 분야에서는 시장 상황에 따른 유연한 실리 위주의 대응을 이어가는 ‘이원화 전략’, 그리고 특정국 의존을 탈피한 핵심광물 및 에너지 안보 체계 구축이 그 핵심일 것이다. 그리고 만일 미중 갈등이 전면화되는 최악 경우에도 대비해 독자적인 기술 복원력을 확보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다.
결국 올해 동아시아 경제는 단순한 성장률 경쟁을 넘어 산업구조 전반에 걸쳐 가변적인 질서 속에서 외부 충격을 흡수할 독자적 복원력을 얼마나 빠르게 내재화하느냐를 가르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이찬우 일본경제연구센터 특임연구원 전 테이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