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물러난 ‘G-제로 시대’ 열린다

2026-01-09 13:00:05 게재

다극질서 ‘폴리신 시대’ 도래 … 국가권력과 기술권력 결합인 ‘기술극단’ 경계해야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은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찰을 자임해 온 미국이 공공연하게 독립국의 주권 침탈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설혹 마두로 대통령이 흠 많은 지도자였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었다. 미국은 이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할 명분을 잃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는 국제사회의 우려마저 쏟아지고 있다.

2026년이 어수선하게 열리고 있다. 미국 정치위험 분석기관인 유라시아그룹 회장 이안 브레머는 일찌감치 ‘G-제로 세계’의 도래를 예고했다. 그는 2012년 5월 출간한 ‘각자도생의 시대: G-제로 세계의 승자와 패자’라는 책에서 앞으로 어떤 강대국도 세계질서를 좌지우지 못하는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2026년 1월 5일 미국 뉴욕 맨해튼 다운타운 헬리포트에서 미 연방 마약 테러, 공모, 마약 밀매, 자금 세탁 등 혐의로 기소된 베네수엘라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와 부인 실리아 플로레스가 첫 법원 출석을 위해 맨해튼의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 연방 법원으로 이동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중국 중심의 G2 체제의 와해

브레머 회장의 예언은 적중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주요 2개국(G2) 체제가 와해되고 있다. 브레머는 “G2의 협력 붕괴, G7의 영향력 약화, G20의 합의 기능 상실이 겹치고 있다”면서 “국제사회는 ‘누구도 운전대를 잡지 않은 ‘G-제로 세계’를 맞이하고 있다”고 짚었다.

‘G- 제로’ 시대는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까?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경제포럼(WEF) 등이 전망한 2026년을 들여다보자. IMF는 “경제권마다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비동조 회복”을 예상했다.

IMF는 지난해 10월 ‘세계경제전망보고서’를 통해 “2026년은 단일 글로벌 질서가 아니라 복합적인 상태”라면서 “새해엔 AI과 에너지, 기후, 금융시장 등에서 다중위기가 나타날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보호무역과 공급망 재편이 세계 경제에 구조적 분절을 야기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블록화된 경제축이 성장률을 잠식할 것이다. 공급망의 탈동조화 및 무역장벽 증가는 장기성장률을 0.3~0.7%p 낮출 수 있다. 2026년 세계성장률은 3.1 %로 예상한다.”

OECD는 “경제블록마다 각기 다른 규칙을 채택하는 다중규제 국면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했다. OECD는 지난해 9월 ‘OECD 중간 경제전망 보고서’를 통해 “2026년 세계경제는 정책 분절과 인공지능(AI)으로의 전환, 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라는 세 축이 충돌하는 복합구조로 진입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추가 관세인상 및 투자·무역의 불확실성 증가로 인해 2026년 글로벌 성장률은 2.9 % 수준으로 낮아 질 것이다. AI 도입이 생산성 상승을 가져올 수 있지만, 자본 집중과 노동소득 침체, 고용불안과 같은 위험도 동반한다.”

경제분야는 이미 다극화 시대 도래

다극화 시대를 점치는 이가 또 있다. 퓰리처상을 세 차례 수상한 저널리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폴리신(Polycene) 시대’를 예고했다. 생소한 ‘폴리신’이란 말은 그리스어로 다극·복합을 의미하는 ‘폴리(poly)’와 새로운 시대를 뜻하는 ‘신(cene)’이 결합해 만들어진 신조어다.

프리드먼은 최근 뉴욕타임스(NYT)에 기고한 칼럼에서 자신이 냉전시대에 태어나 탈냉전시대~미국 단극질서~미중 양극 시대를 살아왔다면서 이제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작금의 복합적이고 다극적인 질서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자문했다. 프리드먼은 지금 우리는 ‘폴리신 시대’를 살고 있다고 자답했다.

폴리신이란 신조어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프리드먼이 어느 날 마이크로소프트(MS) 전 연구·전략 총괄책임자였던 크레이그 먼디와 세상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프리드먼이 먼디에게 말했다. “요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과거의 좌우 이분법 체계가 무너졌다. 세상은 이제 복잡하게 연결된 다원체계로 바뀌고 있다. 그 과정에서 냉전과 탈냉전의 두 패러다임이 지녔던 응집성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먼디가 말을 받았다. 20세기의 이분법 체계가 분해되고 새롭게 형성되는 세계질서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말 이었다. “이 새로운 시대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안다. 바로 ‘폴리신’이다.”

요즘 세상 구석구석이 다원체계로 바뀌어 가고 있다. AI는 ‘전방위적 범용 인공지능’으로 진화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복합위기’로 격화한다. 지정학은 ‘다극적’이고 ‘다원적’ 연합 관계로 나아가고 있다. 국제무역은 ‘다중경제’ 공급망으로 흩어진다.

폴리신의 도래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분야는 바로 경제다. 지난 세기 세계 경제를 이끌던 모델은 비교적 단순했다. 미국과 영국 독일 일본 등 선진국들은 우주항공이나 ICT, 금융 등 고부가가치 산업을 담당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물건을 만들었다. 한국과 대만 등 중견국가들은 중간재·부품·장비를 만드는 중간허브 역할을 했다. 개발도상국들은 광물과 농산물 등 원자재를 공급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 같은 선진국도 모든 물건을 자국에서 만들겠다며 관세장벽을 높이고 있다. 중국은 이미 전기차와 태양광 2차전지 통신장비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제품들을 쏟아낸다. 개발도상국들도 원자재를 가공해 판매하겠다는 입장을 보인다. 글로벌 공급망이 다극화하고 국제무역 질서가 복잡해지는 ‘폴리신’의 시대가 닥친 것이다.

기술권력-국가권력의 섬뜩한 결합

‘G-제로 세계’를 예고했던 브레머 회장은 ‘기술극단의 시간’이 닥칠 것으로 내다봤다. 브레머 회장은 주요 기술기업들이 디지털 공간은 물론 물리적 세계에까지 주도하면서 국가권력 못지않은 힘을 지니게 될 것으로 우려했다. 브레머 회장은 지난해 5월 포린어페어즈에 기고한 ‘기술극단의 역설’이라는 칼럼을 통해 “기술권력과 국가권력의 섬뜩한 결합”을 경고했다.

과연 기술권력은 얼마나 강한 걸까? 브레머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한 사례로 설명했다. 2022년 2월,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공격했다. 우크라이나정부는 심각한 취약점에 직면했다. 인터넷과 통신망이 공격받으면서 우크라이나 군대는 무기력해 질 위기에 처했다. 테슬라와 스페이스X 등 첨단기술 업체를 거느린 일론 머스크가 나섰다. 며칠 만에 스페이스X는 우크라이나에 수천 대의 스타링크 단말기를 설치해 주었다. 위성 인터넷 서비스도 무료로 제공했다. 머스크는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몇달 후, 우크라이나정부는 러시아 점령지인 크림반도까지 스타링크 서비스를 확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러시아 잠수함을 겨냥한 드론 공격을 하기 위해서였다. 확전을 우려한 머스크는 스타링크 추가 서비스를 거절했다. 미 국방부까지 나서서 간곡히 요청했지만 머스크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머스크의 우크라이나전쟁 개입은 민간 기술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정치와 국제 문제에까지 얼마나 큰 힘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실제로 주요 기술 기업들은 강력한 지정학적 행위자로 부상했다. 디지털 공간은 물론 점차 물리적 세계에까지 국가의 주권에 필적하는 형태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G-제로’ 시대, 각자도생 모색해야

2026년은 그야말로 예측불허의 시대다. 그 용어만큼이나 알기 어려운 ‘폴리신 시대’와 ‘기술극단 시대’와 ‘G-제로’ 시대를 맞아 우리 역시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불과 1년여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은 아찔한 역주행을 하고 있었다. 윤석열 정부는 다극화된 ’폴리신‘과 ‘G-제로’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채 미·일 편중의 가치외교에 몰두했다. 특히 첨단기술 시대의 핵심 동력인 연구개발(R&D) 예산을 전례 없이 삭감했다. 자폭이나 다름없는 국가운영을 했다는 평가마저 나오고 있다.

다행히도 이재명정부가 ‘폴리신 시대’에 걸맞은 ‘실용적 다자외교’를 펴고 있다. AI를 국가 성장엔진으로 설정하고, 에너지·디지털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파격적인 R&D 투자를 하고 있다. ‘기술극단 시대’의 부작용에 대비해 ‘디지털 기본권’과 ‘AI 민주주의’도 다지고 있다. ‘G-제로’라는 혼미한 국제질서 속에서 제조업 강국의 역량을 국제무역과 관세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는 지혜도 발휘하고 있다.

위기는 기회다. 누구도 운전대를 잡지 않은 ‘G-제로’의 운전석에 우리가 앉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개발도상국인 글로벌사우스와 선진국 글로벌노스의 중간쯤에 있는 대한민국이 글로벌 질서의 표준을 세우는 조정자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박상주 칼럼니스트 지구촌 순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