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진의 미국 톺아보기
2026년 세계경제의 변수, 트럼프발 ‘돈로주의’
영국의 시사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돈로의 망상(Donroe’s Delusion)‘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통해 지난 3일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진 미국의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체포사건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이코노미스트가 문제삼은 것은 단순한 주권 침해가 아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 외교전략 전반에서 감지되고 있는 지정학적 현실주의다.
이코노미스트가 명명한 ‘돈로주의(Donroe Doctrine)’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름 ‘돈(Don)’과 19세기 미국 외교원칙인 ‘먼로주의(Monroe Doctrine)’를 결합한 신조어다. 먼로주의는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선언한 외교원칙으로, 유럽 열강의 아메리카 대륙 개입을 거부하는 동시에 미국 역시 유럽의 분쟁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상호불간섭의 약속이었다. 보다 정확하게 당시 이 원칙은 신생 독립국이었던 미국이 유럽 강대국 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든 방어막에 가까운 것이었다.
돈로주의 종착점은 트럼프 정신과 닿아
그러나 ‘돈로주의’는 이 전통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뒤틀어 놓았다. 과거 미국 대통령들이 민주주의 인권 국제질서라는 명분으로 다른 나라에 대한 내정 간섭을 정당화했다면 트럼프는 더 이상 이를 애써 포장하지 않는다. 이번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 미국은 베네수엘라의 석유 자원 확보, 남미에서의 미국 지배력 회복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힘이 곧 정의이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의 우위가 다시는 의심받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전세계인들에게 각인시켰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움직임은 올해 들어 트럼프정부가 유엔 산하기구를 포함해 무려 66개 국제기구에서 탈퇴하겠다고 서명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인류 보편의 규범으로 여겨졌던 다자주의는 이제 미국에게 더 이상 지켜야 할 원칙이 아니라 계산해야 할 비용에 불과하다.
미국의 이번 베네수엘라 공습은 ‘돈로주의’의 지향점이 종국에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트럼프 정신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미국 경제를 견인하고 있는 인공지능(AI) 산업은 일견 최첨단 소프트웨어 산업으로 보이지만 그 작동 기반은 에너지 산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AI 산업을 움직이는 대규모 데이터센터가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까닭에 전력 생산의 대부분을 석유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미국으로서는 원활한 원유 확보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미국의 셰일혁명으로 촉발된 석유수출국기구(OPEC)과의 미묘한 긴장 속에서 유가변동이 미국 경제와 정치에 부담으로 작용하자 미국은 자국의 지정학적 이익을 앞세워 세계 최대 수준의 확인 매장량을 보유한 베네수엘라를 전략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여기에는 중국 견제라는 또 다른 명확한 메시지도 담겨 있다. 중국은 지난 10여년간 라틴아메리카에서 자원개발과 금융지원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해왔다. 베네수엘라 원유의 상당 부분이 중국과 연결돼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조치는 석유자원 확보를 넘어 미중 전략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하겠다는 지정학적 목적이 다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트럼프가 그린란드에 눈독 들이는 까닭
최근 불거지기 시작한 미국의 그린란드에 대한 지나친 관심 역시 ‘돈로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그 중심에는 분명한 지정학적 고려가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동맹국인 덴마크 왕국 자치령 그린란드는 인구도 적고 경제규모 역시 크지 않다. 그러나 그린란드가 갑자기 국제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이유는 단순한 영토문제가 아니라 북극을 둘러싼 질서변화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지구온난화로 북극빙하가 빠르게 녹으면서 과거에는 상상에 가까웠던 북극항로가 현실적인 해상물류 경로로 떠올랐다. 이른바 북극항로는 유럽과 아시아 북미를 잇는 새로운 바닷길로 기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항로에 비해 항해 거리와 시간 모두를 크게 단축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
해상물류의 질서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이 변화는 곧 북극을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이 그린란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미국은 이미 그린란드를 북극항로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린란드에 매장된 희토류를 비롯한 각종 전략광물은 전기자동차 반도체 첨단 무기체계 등 미래산업과 직결되는 자원이다. 희토류에 대한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는 미국으로서는 그린란드를 단순한 북극의 섬이 아니라 공급망 재편의 핵심변수로 볼 수밖에 없다.
안보적 측면에서도 그린란드는 중요하다. 이 지역은 미국 본토와 유럽, 그리고 러시아와 중국의 북극 진출을 가로지르는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북극을 둘러싼 경쟁이 경제문제를 넘어 안보문제로 확장되는 상황에서 그린란드에 대한 미국의 움직임은 ‘돈로주의’가 더 이상 남미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님을 보여준다.
결국 그린란드는 지구온난화라는 환경의 변화, 북극항로라는 새로운 통행로의 등장, 그리고 미중러 간 전략경쟁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미국이 이 지역을 예외적인 전략공간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트럼프식 ‘돈로주의’가 자원과 안보가 결합된 21세기형 현실주의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모두가 중간선거 시간표에 맞춰진 전략
트럼프식 ‘돈로주의’는 철저히 올해 11월 중간선거에 맞춰진 전략이다. 트럼프는 집권 초반, 관세를 앞세운 통상정책으로 미국 경제의 체질개선을 시도했다. 제조업을 되살리고 일자리를 지키겠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관세는 기업의 원가를 끌어올렸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소비자 가격으로 전가됐다. 인플레이션 압력은 다시 커졌고 생활비 부담에 민감한 유권자들의 불만도 함께 쌓여갔다.
경제성과에 대한 실망은 곧 정치적 부담으로 이어졌다. 트럼프행정부의 경제운영에 대한 전문가들의 비판이 이어졌고 관세정책에 대한 반대여론이 비등했다. 대통령직 수행 전반에 대한 지지율 역시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이 지점에서 트럼프 특유의 승부수가 등장했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려운 복잡한 경제정책 대신, 악의 축으로 여겨지던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생포하고 안정적인 원유 확보로 국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미 대통령의 이미지가 지지층의 정치적 호응을 이끌어 내기에 더 효과적이라는 계산을 한 것이다. 그린란드 매입 논의 역시 같은 흐름 위에 있다.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해 막대한 부와 전략적 이익을 축적했던 과거의 추억은 미국이 그린란드를 사들임으로써 또 다시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자극한다.
그러나 실패한 관세정책의 후유증을 만회하려는 트럼프식 ‘돈로주의’ 전략 역시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미래에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자원 확보와 군사적 압박은 단기간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으나 그 과정에서 동맹과의 신뢰를 소모하고 국제질서의 안정성을 흔든 대가를 피하기는 어렵다.
일부 국가는 ‘미국 우선주의’의 다음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 할 것이고, 또 다른 국가들은 중국이나 러시아가 주도하는 대안적 질서로의 편입을 현실적인 선택지로 검토하게 될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가 더 이상 안정적이지 않다면 불확실한 국제환경에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다른 강대국과의 협력을 모색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힘은 언제든 과시할 수 있지만 한번 무너진 신뢰를 대신해 줄 수는 없다. 동맹의 신뢰를 잃어 고립되고 분열된 미국의 모습이 과연 강한 미국의 모습일지 깊은 고민이 필요한 때다.
조태진 법무법인 서로변호사·M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