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경제의 성장, 한국에 기회인가 위기인가?

2026-01-16 13:00:02 게재

단순 조립·가공에서 산업 업그레이드·디지털 전환으로 … 기회와 경쟁이 동시에 커지는 한국의 선택

지난해 12월 2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세안(ASEAN) 특별 외교장관회의 모습. 신화=연합뉴스
최근 한국의 대외경제정책연구원과 아시아개발은행(ADB)은 2026년 아세안(ASEAN) 주요국들이 4%대 중반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글로벌 고금리 기조와 미·중 갈등, 지정학적 불확실성과 보호무역의 확산 속에서도 아세안 지역 경제는 수출 회복과 내수 진작, 해외직접투자(FDI)의 유입 확대를 바탕으로 비교적 견조한 성장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전망은 아세안이 여전히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성장 축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아세안 경제의 성장을 낙관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양적으로는 지역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성장 방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제는 아세안 지역제가 ‘얼마나 더 성장하느냐’보다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아세안 경제의 성장 방식 전환은 역내 문제에 그치지 않고, 결국 중장기적으로 한국 경제의 대외경제 전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의 수출시장이자 투자 대상지로만 여겨졌던 아세안이 견조한 성장을 유지한다면, 과거와 차별되는 경쟁 및 협력 전략의 수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장의 외형과 구조적 제약

아세안 지역은 지난 수십 년간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매김했다. 풍부한 노동력과 비교적 낮은 임금, 개방적인 투자 환경을 바탕으로 제조업 육성에 성공했고 수출도 확대됐다. 그 결과 역내 다수 국가가 저소득국에서 중진국 단계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미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는 글로벌 기업의 생산기지로 자리 잡았고, 말레이시아와 태국은 중간재와 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장 모델은 동시에 구조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단순 조립 및 가공 중심의 산업 구조, 다국적 기업에 대한 과도한 의존, 기술 내재화의 한계, 혁신 생태계의 취약성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도약을 가로막는 요인이었다. 최근 동남아 관련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중진국 함정’ 문제도 이러한 구조적 제약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ADB나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2026년 성장률 전망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전제로 한 수치라고 보기 어렵다. 대신에 글로벌 경기 회복과 정책 부양 효과를 반영한 경기순환적인 성격이 더욱 강하다. 다시 말해 아세안 경제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지만, 그 성장의 질적 전환은 아직 진행 중이며, 성공 여부도 향후 정책 선택과 제도 개혁에 달려 있다.

아세안경제공동체 전략계획 2026-2030

이러한 한계를 인식한 아세안 국가들은 최근 몇 년간 공통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올해부터 ‘아세안경제공동체 전략계획(AEC Strategic Plan 2026-2030)’을 추진한다. 이 전략계획은 단순한 경기 부양책이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역내 경제 및 산업 구조 전환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첫째, 디지털 전환의 본격적 추진이다. 전자상거래, 핀테크, 데이터 기반 서비스, AI와 클라우드 인프라는 아세안 지역경제 전반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끌어올리는 핵심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중소기업의 시장 접근성을 확대하고 금융 포용성을 제고함으로써, 국가 간 성장격차 완화를 통해 역내 통합을 촉진할 수 있다.

둘째, 산업의 업그레이드를 추구한다. 아세안은 더 이상 ‘세계의 공장’ 역할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중간재·완제품·브랜드 역량을 강화하고,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상위 단계로 이동하려 한다. 이는 산업 정책뿐 아니라, 교육·인력·기술 정책 전반을 포괄하는 과제다.

셋째, 내수시장 확대와 중산층 형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6억명이 넘는 인구를 보유한 아세안은 이미 거대한 단일 시장이다. 다만 수출 의존도를 완화하고 외부 충격에 대한 회복력을 높이기 위해서 역내 중산층 확대와 소비 기반 강화가 요구된다.

넷째, FDI의 질적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외국인 투자를 단순한 자본 유입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기술 이전, 연구개발(R&D), 현지 가치사슬 고도화에 기여하는 투자를 선호하고 있다. 기존의 성장 모델이 다국적 기업의 투자에 의존한다는 한계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조만간 아세안은 더 이상 중진국이 분포하는 공간이 아니라, 독자적 산업 및 기술 역량을 갖춘 중견 경제권으로 전환하게 될 것이다.

보완적 협력에서 경쟁적 협력으로

문제는 한국과 아세안의 경제관계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한–아세안 경제관계는 비교적 명확한 분업 구조 위에서 작동했다. 한국은 기술·자본·중간재를 공급하고, 아세안은 생산과 조립, 그리고 소비 시장의 역할을 담당하는 ‘보완적 협력’ 관계였다. 그러나 아세안의 산업 고도화와 기술 내재화가 본격화될 경우, 이 구조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자, 배터리, 자동차 부품, 디지털 서비스 등에서 아세안은 한국과 직접 경쟁할 수 있는 위치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글로벌 시장뿐 아니라, 중동·아프리카·남미와 같은 제3국 시장에서도 수출 경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외국인 투자와 글로벌 인재 유치를 둘러싼 경쟁 역시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협력에서 대립으로의 전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협력과 경쟁이 동시에 존재하는 ‘경쟁적 협력(Co-opetition)’ 단계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대응할 준비를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세안 경제의 성장은 한국에 위기라기보다는, 전략적 전환을 요구하는 시험대이다. 협력 대상이 성장할수록 경쟁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중요한 점은 경쟁을 관리하고, 협력의 질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정책적 준비이다. 이를 위해 한국은 기존의 ‘보완적 협력’ 프레임을 넘어선 경쟁적 협력 단계에 걸맞은 정책 패키지를 선제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첫째, 산업 협력의 초점을 단순 생산 분업에서 공동의 가치 창출로 전환해야 한다. 단기적인 투자 확대에 머무르기보다는, R&D, 표준 설정, 플랫폼 구축을 중심으로 함께하는 협력 구조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아세안의 산업 고도화를 의도적으로 억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과정에 공동 설계자로서 참여함으로써 우리기업의 활동공간을 넓혀야 한다는 의미이다.

둘째, 경쟁이 불가피한 영역과 협력이 필수적인 영역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제조업과 일부 중간재 분야에서는 경쟁 관리 전략이 필요하지만, 기후·에너지, 공급망 안정, 디지털 규범, 데이터 이동과 같은 분야에서는 우리나라에 떨어지는 협력의 이익이 훨씬 크다. 특히 디지털 규범과 표준을 함께 설계할 수 있다면 중장기적으로 한국기업에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아세안을 단순한 생산기지나 소비시장으로 보지 말고, 제3국 공동 진출의 파트너로 인식해야 한다. 중동·아프리카·남미 등 신흥 시장에서 한국과 아세안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함으로써, 경쟁을 완화하고 협력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

넷째, 양 지역 간 산업 협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도 협력, 인재 교류, 금융 협력을 결합한 종합적 전략이 필요하다. 아세안 국가들과의 제도적 정합성을 높이고, 인재 교류를 확대하며, 공동 금융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은 장기적 협력의 기반 강화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2025년 10월 서명된 ‘중국-아세안 FTA 3.0’ 이후 중국의 대아세안 협력을 견제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 대외경제 전략의 시험대

2026년, 아세안 경제의 성장 전망은 분명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 성장의 방향은 한국 경제의 중장기 대외경제 전략에 중대한 함의를 갖는다. 아세안 지역이 중진국 함정을 극복하고 성장할수록, 한국과의 관계는 ‘보완’에서 ‘경쟁’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피할 수 없는 변화다. 중요한 점은 그 변화에 한국이 어떻게 대응하느냐다. 경쟁을 전제로 한 협력 전략, 즉 ‘경쟁적 협력(Co-opetition)’을 관리할 수 있는 국가만이 아세안 뿐 아니라, 글로벌 사우스의 성장과 추격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모색할 수 있다. 아세안 경제의 성장은 한국에 위기일 수도, 더 큰 도약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개발도상국과의 협력에서 한국의 정책과 전략이 계속해서 진화해야 하는 이유이다.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2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