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순 칼럼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 위기는 그렇게 온다

2026-01-19 13:00:01 게재

탁월한 문학작품은 세월이 흘러도 영감을 주는 명언을 남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장편소설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도 그렇다. “자네는 어떻게 파산했나?” “두 가지 방법으로…서서히 그러다 갑자기.” 촌철살인 같은 대화는 인간의 실패를 통찰한다.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 현상은 자연과 사회 변화에서 숱하게 등장한다. 변화의 압력은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커지다 임계점에 이르러 어느 순간 폭발한다.

한국의 IMF 외환위기는 경제적 고난을 상징하는 대명사다. 고도성장 경제의 표본이던 한국의 1996년 경제성장률이 8%로 떨어졌다. 1995년 9.7%에서 조금 떨어지자 언론은 경기침체를 우려했다. 쓸데없는 걱정 같았다. 8% 정도면 낮지 않은 경제성장률이었다. 하지만 불황조짐은 이전부터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성장률 감소가 수출액 감소, 대외채무 폭증과 맞물려 있었다.

한국 기업들은 성장세만 믿고 무분별하게 외국자본을 차입했다. 아시아 경제 전반에 불안감을 느낀 외국자본이 급격하게 유출되기 시작했다. 1997년 1월 한보사태를 시작으로 대기업과 협력업체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경제사령탑이었던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 말은 역사에 남는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괜찮다.”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1997년 12월 13일 “한국은 눈앞에 닥친 현실적 위기를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고 꾸짖었다.

30대 기업 가운데 11개 그룹이 사라졌다. 단기간에 기업파산 부도 대량실직 사태가 벌어졌다. 빚 독촉에 몰려 일가족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중소기업 사장이 투신했다. 어제까지 회사 중견간부이던 사람이 졸지에 집 잃고 노숙자가 됐다. 훗날 ‘IMF 때보다 힘든 시기’ 같은 유행어를 낳았다.

4년 만에 IMF에서 빌린 달러를 다 갚고 졸업했으나 상처는 지금까지 남았다. ‘공대에 미친 중국, 의대에 미친 한국’이라는 인재의 쏠림은 그때 생긴 난치병이다. 나라의 미래가 구조적으로 바뀌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그랬지만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통화량 과도하게 풀려 원화가치 하락 유도

원달러환율이 사실상 외환위기 수준으로 고착되고 있는 것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원달러환율은 평균 1470원을 넘어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16일 오후 종가 기준 1473.6원에 주간 거래를 마감했다. 이대로라면 1500원 선을 넘어설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1480원대를 위협하던 원달러 환율이 미국 재무부 장관의 구두 개입으로 1460원대로 잠시 떨어졌다 스콧 베선트 장관의 “원화약세가 과도하다”라는 말의 효과는 하루에 그치고 환율은 다시 장중 1470원대로 반등하고 말았다.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미국 재무장관의 발언에도 우리 시장은 백약이 무효”라고 경종을 울렸다.

고환율이 위험수위에 오르자 ‘주범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부터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환율은 10월 1400원대로 올라섰다. 일부 전문가들은 문재인정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강동구 둔촌아파트 1만2000가구 재건축사업 장기화와 건설사 구조조정 실패가 환율상승의 실마리가 됐다고 주장한다. 이재명정부는 내국인의 해외투자가 원인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개인과 기관이 해외주식·채권에 투자하고 기업의 해외직접투자가 늘어나 달러 수요가 많이 증가한 탓이라는 주장이다.

그런 면도 없지 않으나 구조적이고 더 근본적인 문제를 살펴봐야 한다는 견해도 설득력을 얻는다. 정부의 소비쿠폰 지급과 한국은행의 완화적 통화정책이 맞물리며 통화량이 과도하게 늘어나 환율이나 집값을 끌어올렸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시중에 원화가 과도하게 풀려 가치가 떨어졌다는 논리다. 현재 시중에 풀린 통화량은 2025년 10월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인 4470조원(한국은행 새 통화량 기준으로는 4057조5000억원)에 이른다.

IMF도 한국의 환율 변동성 취약 경고

고환율이 뉴노멀 현상으로 자리를 잡지 않겠느냐는 두려움이 크다. 정책당국자들은 우리가 순대외채권국이어서 위험하지 않다고 한다. 문제는 환율이 오르면 물가가 오른다는 점이다. 대중이 화폐가치에 대한 신뢰를 잃는 순간 하이퍼인플레이션은 하루아침에 찾아온다. 경제 전반의 초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더 무섭다. 경제위기 때마다 그랬듯이 서민만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여권은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돈 풀 생각을 먼저 하지 않나 싶다. 2026년 예산안에서 적자국채 발행 규모는 110조원에 이른다. 지역화폐·소비쿠폰 집행 같은 일은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돈이 많이 풀리면 당연히 자산가격이 상승하고 원화가치가 하락한다.

그렇지 않아도 IMF는 한국이 구조적으로 환율 변동성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어제(18일) 발표된 연례 ‘글로벌 금융안정보고서’에서 경고했다. 환리스크에 노출된 한국의 달러자산이 외환시장 규모보다 25배나 크기 때문이다.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 파국을 맞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김학순 고려대 미디어대학 초빙교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