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칼춤에 잔뜩 움츠린 캐나다
관세폭탄 이어 군사적 행동 가능성에 촉각 … “그린란드 다음은 캐나다” 우려
“미국과 ‘경계 섞인 우정’의 시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이제 세계화와 ‘대륙 통합’이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캐나다 일간지 ‘글로브앤메일’의 8일자 사설 중 일부다.
1년여 전 미국 트럼프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캐나다의 정치경제적 상황은 암울함의 연속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초 캐나다를 향해 “미국의 51번째 주”라며 조롱했고, “가장 가깝다는 우방이 미국에 빨대를 꽂아 이득을 취했다”며 관세폭탄을 안겼다. 최근 미군이 중남미 베네수엘라의 마두라 대통령을 체포해 압송하고, 그린란드에 대한 군사행동 가능성까지 시사하면서 캐나다인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글로브앤메일’은 이날 사설을 통해 1775년 미국의 퀘벡 침입과 1812년 캐나다 합병 시도, 1890년대의 관세 부과를 통한 압박 등 미국과 엮였던 사건을 일일이 거론했다. 그러면서 “역사의 상당 기간 동안 캐나다와 미국의 관계는 그리 친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장하고 번영해 왔다”며 “미래에 역사적 사건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성공적으로 저항할 것”이라고 적었다.
“군사무력 사용은 추측 아닌 토론의 주제”
안보를 둘러싼 캐나다인들의 불안은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지난 14일 나온 여론조사업체 ‘레제’의 발표에 따르면 캐나다인 31%는 ‘미국이 캐나다를 장악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시도할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지난 9일부터 11일 사이 캐나다인 15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조사 결과다.
‘캐나다통신’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같은 문항을 조사했는데, 미국인의 20%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캐나다인 55%는 미국이 그린란드를 장악하기 위해 결국 무력을 행사할 것으로 내다봤다.
캐나다 공영방송 CBC는 “이전에는 터무니없는 추측으로 치부되었던 캐나다에 대한 미국의 군사력 사용 가능성이 이제는 진지한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고 8일 보도했다. 멜라니 졸리 전 외교장관의 고문을 지낸 아담 고든 박사는 방송에서 “트럼프행정부가 캐나다에 대해 군사적 행동을 할 실질적인 위험이 있다는 증거가 쌓이고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한다’거나 ‘국가안보 전략’에 대한 반복적 언급, 국제기구를 대하는 태도 등에는 일련의 패턴이 있다는 것이다.
고든 박사는 특히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 마두로를 권좌에서 몰아낼 때 내세웠던 명분, 즉 미국으로 유입되는 마약 밀매 근거지라는 논리는 지난해 캐나다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할 때 했던 언급과 맥락이 비슷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치 리스크 컨설팅업체 ‘유라시아 그룹’이 이달 초 발표한 보고서는 “캐나다가 미국과 맺고 있는 깊은 경제적 안보적 지리적 유대 때문에 미국의 불안정성에 특히 심하게 노출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정치적 격변에 캐나다보다 더 심각한 영향을 받는 국가는 없을 것이라는 경고다.
이와 관련 로이드 액스워디 전 캐나다 외교장관은 “이러한 리스크들이 이미 가시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행정부는 자신들이 서반구의 주인이며, 언제든 누구에게나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특히 그린란드 문제는 캐나다의 국가 안보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새로운 ‘급소’라고 지목했다. 캐나다의 뒷마당인 북극을 통째로 내줄 수 있다는 우려다.
그린란드 출신으로 캐나다로 이주해 누나부트 준주에서 활동하는 아쥬 피터 변호사는 “만약 트럼프가 그린란드를 어떤 식으로든 합병한다면 그 다음 목표는 명백히 캐나다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안보 불안한데 군은 노후화
마크 카니 총리는 14일부터 중국 방문길에 올랐다. 캐나다 지도자의 중국 국빈방문은 8년 만인데, 미국에 절대 의존적인 무역구조를 탈피하기 위한 고육책이란 지적이 많다. 하지만 캐나다를 둘러싼 여러 불확실성보다 캐나다인들을 더 불안하게 하는 것은 허술한 대비 태세다. 이미 트럼프발 관세전쟁에서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만에 하나 무력충돌까지 벌어진다면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특히 캐나다군은 인력 부족부터 노후화된 장비에 이르기까지 전반적 문제를 안고 있다. 군 지도부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잇따라 우려가 나오는 대목이다. 캐나다의 전투기와 잠수함 함대는 노후화돼 교체가 절실한 상황이다. 하지만 미국 록히드마틴으로부터 F-35 전투기를 구매하기로 한 계획은 지난해 미국과의 관세분쟁이 불거지며 거의 1년째 검토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한국 한화오션 등이 입찰에 나선 잠수함 현대화 사업도 수년이 걸리는 일이다.
무엇보다 병력이 문제다. 캐나다군은 약 1만6500명이 부족하다고 추산했다. 2022년부터 2025년 사이 캐나다군은 1만9700명 이상의 신규 병력을 모집할 계획이었는데, 이 기간 동안 거의 19만2000명이 지원했다. 그러나 최종 입대한 인원은 고작 1만5000명에 불과했다.
지난해 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그나마 군 복무 지원자 13명 중 1명만 실제로 기초훈련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지원자들이 중도에 포기하거나 훈련을 끝까지 마치지 못한 이유조차 군당국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자 캐나다정부는 지난해 30만명 규모의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부대를 창설해 국가방위를 강화하려는 계획안까지 작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방동원계획’이란 제목의 비공개 문서는 “가속화되는 주변의 위협들 때문에 캐나다가 스스로 방어할 능력을 시급히 키워야 한다”면서 “기후변화와 관련된 자연재해 빈도와 증가하는 국가 간 안보문제도 심각하게 대두됐다”고 지적했다.
계획안에 따르면 예비군 규모는 3만명에서 10만명으로 늘리고, 30만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보조병력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원봉사 병력이 유사시 얼마나 전력에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제니 카리냥 캐나다군 참모총장은 “역사적으로 우리는 남쪽에 위대한 친구 미국이 있고, 동서에 거대한 바다가 있으며, 또 얼어붙은 북극이 있어 많은 위협으로부터 캐나다를 잘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그랬다”면서 “하지만 이제 그런 기대는 사라졌다”고 말했다.
“미국보다 중국이 주적” 주장도
물론 이 같은 우려에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라고 보는 시각도 만만찮다. 톰 로슨 캐나다군 예비역 장성은 14일 CTV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행정부의 최근 행보를 ‘권력을 이용해 사적 이득을 챙기는 도둑정치’(kleptocracy)라고 비난하면서도 “미군이 캐나다 민간인과 직접 접촉하거나 캐나다군인과 무력으로 맞서는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주장했다.
저스틴 트뤼도 전 연방총리의 고문을 지낸 제럴드 버츠 박사도 “트럼프행정부가 무역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며, 여기에는 캐나다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가 포함될 수 있다”면서도 “군사적 행동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맥매스터대 헨리 지루 교수는 “현 상황에서 더 큰 우려는 베네수엘라에서의 미국의 행동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부활을 알렸다는 점”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를 군사의 영역으로 축소시킨 반면, 이윤을 위해서라면 어떤 자원이든 동원하는 천박한 자본주의로 나아간 것”이라고 지적했다.
존 볼턴 전 트럼프 정부 국가안보보좌관은 최근 캐나다 언론과 인터뷰에서 “만약 그린란드나 캐나다에 대한 어떤 움직임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이는 NATO 동맹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며, 미국뿐만 아니라 전체 서구세계에 헤아릴 수 없는 피해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혼란 중에 캐나다의 경계 대상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시각도 있다. 보수적 성향의 일간지 ‘토론토선’은 캐나다 최대의 안보 위협은 중국이라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마크 카니 총리의 중국 국빈방문을 앞두고 “역사적으로 미국은 캐나다 수출의 75%를 차지해 왔다”면서 “무역 분야에서 미국 의존도를 낮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국의 안보위협으로부터 캐나다 국민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연방정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