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식의 유럽 톺아보기

미국과 충돌하고 남미와 힘을 합치는 유럽

2026-01-22 13:00:00 게재

세계질서가 심각하게 요동치고 있다. 대서양을 둘러싼 유럽과 아메리카의 관계에서 특히 구조적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새해 들어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납치하는 군사작전을 전개한 뒤, 무력을 사용하더라도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차지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미국과 유럽의 관계는 결정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남미의 베네수엘라와 북미의 그린란드 모두 아메리카 대륙에 속한다는 점에서 미국이 서반구를 지배해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을 반영하는 움직임이다. 베네수엘라는 오랜 기간 반미 좌파정권이 집권한 독재체제였기에 미국의 눈엣가시였다. 반면 그린란드는 21세기 들어 미국의 대외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덴마크의 영토이며, 미국이 이미 군사기지를 두고 운영해 온 땅이다.

무엇보다 덴마크는 제2차대전 이후 대서양 평화의 축이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으로 미국의 전통적 정치·군사 동맹국이다. 러시아나 중국 등 외부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하는 미국과 유럽인데, 미국이 오히려 동맹 유럽을 향해 군사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협박’하니 나토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는 무책임한 태도다. 이로 인해 지난 80여년 동안 가장 효율적이고 성공적이었던 집단안보 체제가 붕괴한다면 세계의 안정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유럽의 ‘헤어질 결심’ 실천하도록 강요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7일 덴마크와 연대를 표명한 프랑스 영국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관세를 올리겠다는 정책도 발표했다. 이들은 모두 나토 회원국이며 대부분 작년 여름 스코틀랜드 턴베리에서 미국과 굴욕적 관세협상을 체결했던 국가들이다. 유럽 여론은 이제 미국과 트럼프의 비위를 맞추는 전략은 한계에 도달했다며 본격적으로 반격을 가해야 한다는 분위기다.

유럽연합(EU) 의회는 턴베리 협상의 비준을 보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일부에서는 EU가 작년 여름 보류했던 930억유로 규모의 보복관세를 부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리며, 유럽 차원의 강력한 보복 정책(ACI)을 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ACI는 원래 2023년 중국의 위협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정책 도구인데, 오히려 미국을 향해 처음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는 지경이다. 그만큼 상황은 유럽이 조용하게 다짐했던 ‘헤어질 결심’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강요하는 모양새다.

그린란드를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대립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미지수이지만 인구 5만명에 불과한 거대한 동토가 미국과 유럽을 서로 등 돌리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은 확실하다. 유럽의 관점에서 미국은 이제 굳건한 동맹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 협력할 수도, 대립할 수도, 심지어 싸울 수도 있는 경쟁세력일 뿐이다. ‘체계적 경쟁자’인 중국의 수준으로 떨어진 셈이다. 국제관계를 단기적 거래로만 바라보는 트럼프가 재집권 1년 만에 만들어낸 결과다.

트럼프가 EU-남미 FTA 체결 이끌어

미국과의 대립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바로 그 시점에 유럽은 남미와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기 위한 합의를 이뤘다. 지난 17일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유럽연합 27개국과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를 형성하는 4개국(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인구 7억명에 달하는 시장을 만듦으로써 유럽은 자동차 기계 포도주 등의 수출을 촉진하고 남미는 쇠고기와 닭고기 설탕 콩 등의 농산품 수출을 늘릴 수 있게 되었다.

원래 탄탄한 제도에 기반한 대서양 관계의 대명사는 바로 나토였다. 그러나 기존의 나토가 트럼프의 무책임하고 충동적인 언행으로 존재의 위기를 맞는 상황에서 유럽연합과 메르코수르를 제도적으로 묶는 합의가 이뤄졌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유럽과 남미의 자유무역협정을 향한 협상은 1999년, 즉 지난 세기 시작되었다. 무려 26년 만에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는 의미다. 그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유럽과 남미는 협상을 포기하거나 폐기하지 않고 계속 추진한 결과 합의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역설적으로 유럽과 남미의 협정 타결에 결정적으로 일익을 담당한 인물이 바로 트럼프다. 기존의 전통과 제도를 부수면서 불안한 국제환경을 조성했기에 취약한 유럽이나 남미는 안정을 향한 제도적 기반을 추구하게 되었다. 트럼프는 메르코수르의 대국 브라질의 좌파 룰라 대통령과 사사건건 대립했고, 이는 브라질을 유럽으로 향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예를 들어 브라질은 인도와 함께 트럼프의 관세정책에 저항한 드문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유럽-남미의 자유무역협정은 국제사회에서 협력의 장점과 제도의 중요성을 부각했다. 남미에서 브라질의 좌파 룰라 대통령과 아르헨티나의 극우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은 거의 모든 사안에서 대립함에도 유럽과의 자유무역 추진에서만은 동의한다고 할 정도였다. 이념은 접어두고 국익을 추구하는 협력의 장점을 보여준 것이다.

심지어 유럽연합에서는 역내 강대국 프랑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수결로 자유무역협정을 밀어붙여 체결시켰다. 수출 강국 독일과 역사적 이유로 남미와 관계개선에 적극적인 스페인이 주도하는 가운데, 기계 수출에 장점을 드러내는 이탈리아가 가세하면서 프랑스의 반대를 무력화할 수 있는 ‘특정 다수’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은 회원국의 55%와 인구의 65%라는 기준을 반영하는 ‘특정 다수결’이라는 조건을 맞출 수 있었다. 트랙터를 몰고 파리로 몰려온 농민들의 반대에 직면한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 내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되더라도, 프랑스 국민정서를 고려해 반대표를 던지는 선택을 했다. 정해진 규칙을 지키는 선택, 그 결과를 존중하는 태도, 즉 제도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과정이다.

유럽은 사실 자신의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찍부터 유럽을 넘어 전세계 다른 대륙에도 지역 통합을 촉진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메르코수르 즉 남미 공동시장의 계획에는 유럽이 직·간접적인 동인으로 작동했다. 동아시아와 아셈(아시아·유럽 미팅)도 유럽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1990년대의 작품이고, 2011년 수립된 한·중·일 사무국은 그 동북아적 지역주의 버전이고 결과다.

유치원생 수준 리더가 최강국 지배하면

2026년 1월 대서양 관계는 이렇게 상반된 양상이다. 북미와 유럽이 그린란드를 두고 서로 대립하면서 기존의 동맹관계는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다. 반면 유럽과 남미는 26년 만에 어려운 협정을 타결하면서 자유무역이라는 경제통합의 길로 들어섰다. 트럼프라는 충동적 권력자의 과대망상과 유치한 성격으로 장기적으로 공들인 탑이 붕괴하는가 하면, 그로 인해 열린 기회의 창을 활용해 새로운 지역 간 협력이라는 장기적 제도의 초석을 놓았으니 아이러니다.

미국과 미국으로 인한 세계의 추락을 보여주는 몇 개의 에피소드가 씁쓸하게 연초부터 떠오른다. 트럼프 대통령은 노르웨이 총리에게 “당신의 나라가 내게 노벨평화상을 주지 않기로 했으니 나는 이제 오로지 평화만 생각할 의무는 없다고 느낀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유치원생 수준의 대통령이 세계 최강국을 지배하는 셈이다. 오죽하면 “노벨평화상 위원회가 트럼프에게 ‘2028년에 새 임기를 추진하지 않고 조용히 퇴임하면 상을 주겠다’고 제안하는 게 어떠냐”는 농담이 유럽에서 유행할 정도다.

영국 의회 일부에서는 자존심 강한 트럼프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창피를 주는 방법이 제일 효과적이라고 여겨 올 6월부터 미국·캐나다·멕시코에서 열리는 축구 월드컵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보이콧을 추진한다는 소식이다. 덴마크의 그린란드를 함께 지키기 위해 이웃 나라 영국에서 논의되는 눈물겨운 일화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 한 경험이 생각난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 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