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그린란드의 역설 - 갈등인가 기만술인가?

2026-01-26 13:00:28 게재

이한우 국제정치학 박사

21일 스위스 다보스. ‘대화의 정신(A Spirit of Dialogue)’이라는 올해 포럼의 우아한 주제가 무색하게도 연단에 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메시지는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그는 유럽 정상들을 향해 “그린란드를 매각 협상 테이블에 올리지 않으면 6월 1일부터 유럽산 제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초강경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어 “러시아 에너지를 끊지 못하는 유럽에 더 이상 미국의 공짜 안보 우산은 없다”는 호통이 이어지자, 객석의 유럽 리더들은 “주권 침해이자 동맹에 대한 모욕”이라며 얼굴을 붉혔다.

서방 유력 언론들은 앞다투어 ‘대서양 동맹의 균열’ ‘신고립주의의 공포’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아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70년을 이어온 서방 진영은 분열 직전의 위기 상황이다. 하지만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정치적 소음(Noise)을 걷어내고 실제 벌어지고 있는 군사적 실체(Signal)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진실이 드러난다.

필자는 이 사태를 서방 동맹의 붕괴가 아닌 적성국을 속이기 위한 고도의 ‘기만술(Maskirovka; 마스크로프카)’로 본다. 그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바로 북극의 심장, 그린란드다. 현재 그린란드를 둘러싼 서사는 한편의 막장 드라마와 같다. 미국은 “그린란드를 매입해서라도 직접 관리하겠다”고 위협하고 덴마크와 나토(NATO)는 이를 막기 위해 병력을 급파하며 날 선 대립각을 세운다.

‘갈등’이라는 연막탄 속 전략적 이해관계

그런데 그 물리적 ‘결과’는 어떠한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린란드에는 전례 없는 규모의 서방 연합군이 집결해 있다. 만약 평시였다면 어땠을까? 덴마크 의회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유럽의 환경론자들은 “러시아와 중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한다”는 이유로 대규모 병력 증강을 결사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야욕으로부터 영토 주권을 지킨다’는 완벽한 명분이 생기자, 이 모든 복잡한 논의 과정이 생략된 채 일사천리로 군사력이 증강됐다. 미국이 ‘악역(Bad Cop)’을 자처하며 위협을 조성하니 나토가 ‘선역(Good Cop)’이 되어 자연스럽게 주권을 방어한다는 논리로 그린란드를 요새화하는 모양새다.

그 결과 북극해와 대서양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GIUK 라인(그린란드-아이슬란드-영국)’은 냉전 이래 가장 강력한 방어선으로 탈바꿈했다. 트럼프와 유럽 정상이 다보스에서 설전을 벌이는 그 순간에도 그린란드의 툴레(Thule) 공군기지에서는 미군과 덴마크군의 레이더가 24시간 돌아가며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있다. 양측의 총구는 서로를 겨누는 것이 아니라 ‘북극의 실크로드’를 개척하려는 중국의 쇄빙선과 대서양으로 은밀히 진출하려는 러시아의 핵잠수함을 향해 나란히 정조준되어 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미국과 나토의 전략적 이해관계는 소름 끼칠 정도로 일치한다.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의 대서양 진입을 원천 봉쇄(Anti-access)하고 싶고 나토는 정치적 부담 없이 북극 방어선을 강화하고 싶었다. ‘갈등’이라는 연막탄을 터뜨린 덕분에 서방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이 완벽한 시나리오 속에서 웃지 못하는 것은 서방이 분열된 줄 알고 쾌재를 부르다 거대한 ‘불침항모’가 되어버린 그린란드를 마주한 베이징과 모스크바뿐이다.

북극의 나비효과가 한반도에 미칠 영향

이 거대한 ‘북극의 나비효과’는 한반도에 파장을 미칠 것이다. 서방이 그린란드라는 대서양의 대문을 걸어 잠그면 북극 항로를 노리는 중국의 압력은 필연적으로 태평양의 대문, 즉 대한민국의 동해와 남해로 쏠릴 수밖에 없다. 중국은 이미 산둥성 칭다오를 기점으로 북극 항로 개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린란드가 서방의 ‘서쪽 방패’라면, 이제 우리는 ‘동쪽 방패’가 될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울산이 주목받아야 할 이유다. 미 해군 함정의 수리(MRO)와 친환경 에너지 벙커링이 가능한 울산은, 그린란드의 기능을 태평양에서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다보스 포럼의 설전을 다시 복기해보자. 트럼프의 거친 입과 유럽의 날 선 반박, 그 요란한 말싸움 뒤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잠기고 있는 북극의 빗장을 보라. 사상 최대의 연합군이 집결해 한목소리로 적성국을 감시하고 있는 저 현장을 보라. 그래도 이것이 진짜 갈등으로 보이는가? 우리는 소음에 속지 말고 그 뒤에 숨겨진 냉혹한 전략 지도를 ‘해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지도 위에 북극항로의 동북아시아 관문인 울산의 전략을 써 내려가야 한다.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단장 국제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