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2
2025
2025년 10월 22일 정부는 2021년 11월 코로나19 대응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한시적으로 시작한 유류세 인하 조치를 18번째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2025년 10월 29일에 유명한 의학저널인 랜싯(Lancet)은 최근 폭염으로 인한 전세계 사망자가 연간 약 55만명이라고 보고했다. Lancet의 이번 보고서에 대해 국외에서는 저명언론 기관과 세계보건기구 같은 공공기관에서 심도있는 분석기사를 내보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연간 55만명이 사망자는 1분당 1명 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대단한 사건인데도 말이다. 이런 정도의 사망자는 이제 언론에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거나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는 더더욱 일견 이해가 가기도 한다. 경기부양을 위해 우리나라에서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유류세 인하다. 일견 서로 상관없어 보이지만 전례 없는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 증가는
11.25
날이 제법 춥다. 장갑 낀 양손을 웃옷 주머니에 넣은 채 종종걸음을 옮기면서도 시선은 배풍등(排風藤)을 향한다. 가운데께로 푸른 빛 절반, 가장자리로는 짙은 갈색 절반쯤이라 가지에 달린 몇 개의 배풍등 잎은 막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서는 북반구 온대지방의 날씨를 닮았다. 풍(風)을 쫓는 효능이 있다는 이 식물을 영어로는 리라(lyre) 닮은 잎을 가진 ‘밤그늘(nightshade)’이라 부른다. 리라는 한쪽 끝이 백자 손잡이 흡사한 현악기를, 밤그늘은 밤에 독성을 띠는 열매의 특성을 빌어 지은 이름이다. 대체로 밤그늘은 감자나 토마토 가지 등 가짓과 식물을 가리키지만, 때마침 까만 열매를 단 까마중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필자에게 올 한해는 배풍등을 처음 보고 그 이름을 찾고 더운 여름 지나 맺은 푸른 열매가 오롯이 붉은색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느라 다 지나갔다. 이른 봄 배풍등 잎을 처음 보았을 때는 뒤늦게 나팔꽃 잎 모양을 떠올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식물의 이름을 유추할 수 없어
11.18
11월 둘째주 목요일, 창의성을 억누른다고 오랫동안 비판받아 온 큰 시험이 치러졌다. 이 수학능력시험(수능)을 중심으로 한 입시체제는 과연 창의적 사고를 억제하는가? 자, 이 질문에 ‘소신껏’ 답하지 말고 끝까지 읽은 후 ‘과학적’으로 답해보자. 우선, 창의성의 정의와 구성 요소는 무엇인지, 어떤 단계를 거쳐 창의적 문제해결을 하게 되는지, 그런 역량을 키우려면 학습 경험을 어떻게 설계해서 적용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창의적인지 어떻게 판단할지 따져야 한다. 이런 질문은 인지과학 교육공학 심리측정학 경영학 등 여러 학문에서 다루어진다. 그 모든 분야를 이 짧은 글에서 설명할 수는 없으니 그 대신 요리를 해보자. 당신은 한국에서 나고 먹고 자란 청년인데 어떤 요리 대회에 참가한다. 과제는 두부를 주재료로 한 서양 코스요리 만들기. 설정부터가 창의성을 억지로라도 끌어내도록 되어 있다. 두부란 한국인의 밥상엔 너무나 익숙한 식재료인 반면, 서양의 마트에선 일부 아시아 섹션에서나 간
11.11
지구 주변에는 기상위성 통신위성 정찰위성 허블우주망원경 국제우주정거장 등 인간이 쏘아올린 인공물체들이 수없이 떠 있다. 지구 궤도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뉜다. 지구로부터 약 2000km 이내의 저궤도(Low Earth Orbit, LEO), 약 3만 5000km 거리의 정지궤도(Geostationary Earth Orbit, GEO), 그리고 그 사이의 중궤도(Medium Earth Orbit, MEO)다. 우리가 사용하는 GPS 위성은 중궤도에 있고, 통신위성은 정지궤도에 자리한다. 국제우주정거장은 약 400km 상공의 저궤도를 따라 지구를 돈다. 최근 전세계가 새롭게 주목하는 영역이 있다. 바로 초저궤도(Very Low Earth Orbit, VLEO)다. 지구에서 약 200km 근처의 초저궤도는 기존 저궤도보다 훨씬 낮다. 지구와 가까워 발사비가 적게 들고, 통신 지연이 작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영역은 오랫동안 ‘금지된 궤도’로 여겨져 왔다. 지구 대기의 잔여
11.04
반도체 산업 기술 동향에 관심이 있다면 요즘 많이 접할 수밖에 없는 용어가 HBM(high bandwidth memory)이다. 우리말로는 ‘고대역폭 메모리’인데, 속도가 매우 빠른 반도체 기억소자다. 컴퓨터가 하는 일이 인간의 두뇌가 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보면 컴퓨터에서도 기억장치인 메모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른바 폰노이만 구조의 컴퓨터는 메모리와 연산기로 구성되고, 연산기가 더하고 곱하는 데이터뿐만 아니라 연산기가 할 일을 알려주는 명령도 메모리에 저장된다. 연산기는 명령과 데이터를 메모리로부터 가져와서 연산을 수행한 후 다시 메모리에 저장한다. 따라서 연산기의 성능이 좋아지면 메모리에서 데이터를 가져오는 속도도 빨라져야 한다. 현재 컴퓨터에 사용되는 메모리 중에서 가장 느린 것은 하드디스크(HDD) 인데 속도가 초당 200MB 정도로, 고해상도 영화 한편을 옮기는데 10초 정도 걸린다. 물론 이는 최대값이고 실제 사용시의
10.28
지구상 온갖 생물의 유전자원을 활용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하다. 미생물부터 바이러스까지, 유전다양성이 극도로 높은 생물 등에 대한 유전체 정보 확보 연구가 이에 해당한다. 수만에서 수십만 종류의 유전체 정보를 대량으로 획득하고 이를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유용 유전자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발굴하는 분야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이렇게 확보한 유용 유전자는 마치 공장의 조립라인처럼 양산용 세포에 장착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러한 신규 유용 유전자 발굴을 통해 주요 생체 분자를 합성하고 대량생산하는 일이 손쉬워질 것으로 기대된다. 수십억년의 역사가 담긴 진화라는 기나긴 시간 속에서 최적화된 유전자, 이를 죄다 꺼내 우리 삶에 더 가깝게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합성생물학 연구는 유전자와 생화학 반응을 최적화하면서 유용한 생체분자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홉 없이도 맥주에 홉 향을 추가해주는 효모 개발이나 꽃 없이도 꽃가루의 양분을 대신 생산해
10.21
도톰한 쇠고기 안심이 달구어진 프라이팬 위에 놓인다.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육즙과 기름이 각각 다른 목청을 낸다. 수분은 작은 알갱이가 되어 튀어오른다. 향신료와 소스, 버터를 넣자 TV 화면은 스테이크의 향미로 가득 찬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들뜬 진행자는 과장스럽게 손을 펼쳐 흔들며 냄새를 맡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스테이크를 뒤집더니 갈색으로 익은 표면을 가리키며 “봐요 봐요! 이 마이야르 반응으로 먹음직스러운 색으로 변했어요!”하고 손뼉을 친다. 순간 필자의 TV 화면 안에는 물음표로 가득 차 버린다. 마이야르는 사람 이름이다. 루이 카미유 마이야르(Louis-Camille Maillard)라는 프랑스 화학자로 1912년에 아미노산과 환원당이 반응해 갈색물질을 형성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식품의 가열, 조리 또는 저장 중 일어나는 갈변현상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는 아미노 카보닐 반응이라고도 하며 아미노기와 카보닐기가 합쳐져 특유의 색과 향을 생성하는 반응이다. 당시 마
10.14
오래전 가족과 강원도의 한 산골에 갔을 때였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산책 중 우연히 반딧불이 무리와 마주쳤다. 따뜻한 황록색으로 물든 빛의 반점들이 허공을 떠도는 모습은 난생처음 본 은하수처럼 경이롭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이런 은은한 빛을 내 옆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동아시아의 민간 설화에 종종 반딧불이를 모아 등불처럼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 같다. 반딧불이의 희미한 빛은 루시페린이라는 유기화합물에서 비롯된다. 루시페린은 루시페라제 효소의 도움으로 산화하며 빛을 낸다. 분자의 빛 방출이 대개 그렇듯이 산화된 루시페린의 여기 상태에 놓인 전자가 안정한 바닥 상태로 돌아오며 두 상태의 에너지 차이가 빛으로 방출된다. 반딧불이 외에도 야광버섯을 포함해 빛을 내는 생물은 많지만(특히 심해 생물 중 빛을 내는 종류가 많다) 발광원리는 비슷하다. 생물발광의 효율, 즉 생체가 소비하는 화학 에너지를 빛으로 바꾸는 비율은 매우 높아서 많은 과학자들의
09.30
큰아버지는 멀쩡한 두 아들을 놔두고 나이어린 조카에게 팽이를 만들어주어 구설에 올랐었다. 나무 귀한 평야지대에서 한쪽 다듬잇방망이를 절반 좀 안되게 잘라 깎아 팽이를 만들어놓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풀 쑤어 먹인 옷가지를 두드려 펼 때마다 큰어머니는 “시상에나, 갸가 을매나 이뻤으면” 하고 넋두리처럼 말을 내놓았다. 기억에 의지해서지만 그 팽이의 주인공인 내 깜냥에도 할 말이 없지는 않다. 타작을 끝낸 건넌방에서 새끼 꼬는 어른들 쌈지담배는 내가 일일이 침 발라 가며 다 말았다. 그것도 담배 연기 맡아가며. 그뿐이랴. 막걸리 심부름도 했고 큰아버지 아버지 무릎을 번갈아 오가며 북도 쳤고 갖은 재롱을 다 피워댔던 것이다.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도구도 마땅치 않았던 시절 단단한 다듬잇방망이를 자르고 손질하는 게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톱질은 물론이고 못 박기도 쉽지 않은 다듬잇방망이는 흔히 물푸레나무로 만들었다. 단단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무였다는 뜻이다.
09.23
우리 인간은 영웅이 필요하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을 영웅화하고, 신화나 영화 속 영웅으로 대리만족을 하기도 한다. 슈퍼맨 원더우먼과 마블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우리의 이런 마음을 대변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영웅은 있지만 위기를 사전에 막는 영웅은 찾기 힘들다. 재난과 시련은 늘 일어나는 막을 수 없는 상수이기 때문일까? 기후위기를 다룬 영화에서도 기후재난을 막지 못한 상황에서 시작한다. 흔히 난세에 영웅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위기를 사전에 감지하고 경고하는 사람을 우리는 ‘예언자’라고 한다. 위기해결사인 영웅과 달리 우리는 예언자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예언자는 흔히 허풍쟁이거나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트로이의 공주였던 카산드라는 누구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못하도록 저주를 받았다. 카산드라의 예언을 믿지 않은 트로이는 멸망했고, 카산드라 역시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지금 우리는 데이터 기반으로 과학적 추론에 근거한 예측능
09.16
“우린 휴대폰 속에 사는 일상 로봇. 집으로 가는 길엔 돌기둥처럼 혼자서 우뚝 서 있지.” 데이먼 알반(Damon Albarn)의 노래 ‘에브리데이 로봇(Everyday Robots)’은 기술에 의존한 인간의 소외를 노래한다. 카페에 마주 앉은 연인도, 쉬는 시간의 아이들도, 붐비는 지하철의 사람들도 저마다 손 안의 화면에 갇혀 수천년 전부터 그 자리에 멈춰 선 스톤헨지처럼 고립되어 있다. 노래 속에 반복되는 autonomous(1. 자율적인 2. 인간의 제어없이 스스로 작동하는)라는 단어는 우리가 자유롭게 사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음을 조용히 읖조린다. “이 사람들 저 사람들,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머무는 이곳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라는 가사 또한, 끝없이 스크롤을 내리면서도 방향을 잃은 우리의 모습을 비춘다. 그런데 이 소외는 사회적 문제에 그치지 않고, 집중력의 붕괴와도 맞닿아 있다. 오늘 우리가 도둑맞은 집중력은 사실 2인칭을 잃은 결과다. 디지
09.09
1957년 구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을 때 미국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우주로 위성을 보낼 수 있는 발사체를 보유했다는 건 곧 대륙간 탄도미사일도 쏠 수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뉴욕타임즈 1면 헤드라인은 ‘소련 위성이 미국 상공을 돌고 있다’였다. 그 충격은 곧바로 정책 변화를 불러왔다. 불과 몇달 뒤, 미국 의회는 새로운 우주 전담 기관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958년 나사(NASA)가 창설된 것이다. 그때까지 흩어져 있던 연구소와 군사 기관의 일부를 통합해 우주개발이라는 거대한 목표 아래 묶었다. 같은 해 제정된 국방교육법은 수학과 과학 교육에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했고, 미국은 인재 양성과 연구 기반 확대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한 국가의 위기의식이 과학기술 정책의 급격한 전환으로 이어진 순간이었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겠다”는 목표를 천명했다. 이 선언은
09.02
1960년 미국 벨 연구소에서 한국계 강대원과 모하메드 아탈라가 발명한 모스펫(MOSFET) 트랜지스터는 지금까지도 모든 반도체 소자의 기본 구성요소다. 실리콘 집적회로 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최신 CPU나 GPU에 100억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 있다고 할 때 바로 이 모스펫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다. 인텔의 창업 멤버이자 최고 경영자를 지낸 고든 무어가 주창한 ‘무어의 법칙’에 의하면 70년대 초반 최초의 상용 CPU 칩이 발매된 이후 일정한 면적에 집적된 모스펫의 숫자는 1.5~2년마다 두배씩 증가해 왔다. 반도체 칩에서 모스펫을 작게 만들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데너드 스케일링(Dennard scaling)이라 부르는 법칙에 따르면 반도체 칩의 면적이 일정하면 이 칩을 구동하는데 소모되는 전력도 거의 일정하며, 칩에 집적된 모스펫의 숫자와는 큰 상관이 없다. 다시 말해서 일정한 면적의 칩에서 모스펫의 숫자가 증가하면 연산능력도 비례해 증가하지만 소모 전력은 거의 비슷
08.26
영국 바이오뱅크 사업에서 50만명의 DNA를 분석한 완성본을 공개했다. 2006년 즈음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업이 약 20년 만에 일단락된 셈이다. 해당 사업은 참여자로부터 시료를 수집하고, 이들의 의료영상과 다양한 건강정보를 수집하며 진행되고 있다. 전례 없는 수준의 방대한 자료다. 이러한 고품질 자료는 전세계 연구자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이를 이용한 논문도 수천 편 이상 발표됐다. 이제는 인공지능 연구의 기반 자료로서 활발하게 쓰이고 있기도 하다. 고품질 자료를 생산하고 제공함으로써 전세계 연구자들이 영국인의 건강증진을 위한 연구를 하게끔 고안한 것이다. 해당 연구는 50만명을 대상으로 DNA 자료인 유전체 데이터를 4경8000조 염기쌍만큼 생산했으며 이를 분석해 총 15억개의 변이를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동일 사업에서 기존에 확인한 변이정보에 비해 20배에서 40배 가량 늘어난 수치다. 변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게 확인되는 DNA의 차이를 가리킨다. 서로 다른
08.19
최근에 과학산책 집필진과 모임이 있었다. 물리 분야의 교수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네이선 미어볼드(Nathan Myhrvold)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스티븐 호킹과 양자물리학을 연구한 천재 물리학자이며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기술책임자(CTO), 세계 최대 특허전문기업 인텔렉츄얼 벤처스 설립자였지만 1999년 은퇴 후 ‘모더니스트 퀴진(Modernist Cuisine)’이라는 6권으로 구성된 요리 백과사전을 펴낸 사람이다. 이 책은 제임스 비어드 어워드 올해의 요리책 상까지 수상했다(그 책을 온라인으로 외국 사이트에 주문했으나 배송이 아직도 안되고 있다). 여하튼 나는 그저 천재들의 오지랖인가 하는 생각으로 그를 ‘괴짜’라고 단정하고 지나쳤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Richard P. Feynman)은 한밤중 컴퓨터 과학자 대니 힐리스(Willam D. Hillis) 와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중 스파게티의 이상한
08.12
언젠가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아프리카의 푸른 과일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적이 있었다. 마블 베리(marble berry)라는 별명의 과일이 내뿜던 금속성 짙푸른 색은 기억하는 가장 강렬한 색상 중 하나다. 흔히 접하는 꽃이나 과일은 보통 특정 색을 흡수하는 색소로 고유한 색을 발현한다. 가령 바나나는 카로티노이드 계열 분자들이 햇빛 중 청색영역을 흡수해서 노란색을 띤다. 그런데 마블 베리가 내는 색의 원리는 전혀 다르다. 과일 외피에 층층이 쌓인 미세구조가 파란빛만 집중적으로 반사해 만드는 구조색(structural color)이기 때문이다. 구조색은 식물보다 동물계에서 더 흔하다. 모르포나비의 푸른 날개, 공작의 화려한 무지갯빛 깃털, 딱정벌레를 포함한 다양한 곤충들의 현란한 등껍질 색상은 모두 색소 대신 특정한 미세구조가 빛에 반응해 만들어진다. 판상의 구조가 쌓여 있거나 작은 구슬들이 주기적으로 배치된 미세구조는 입사하는 태양빛을 반사하거나 산란시키며 일정한 방향으로 특정
08.05
세계기상기구(WMO)는 기상과 기후, 수문학 분야 정부 간 기구로 올해로 창립 75년을 맞아 “과학을 행동으로”라는 슬로건을 만들었다. 어떤 행동을 하라는 것일까? 과학을 바탕으로 어떤 행동을 하라는 것일까?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은 크게 기후위기 유발 물질인 온실가스 배출을 없애는 것과 이미 일어나고 있는 기후위기에 사회경제 시스템을 적응시키는 두가지가 있다. 과학을 기반으로 탄소중립 지원에서 중요한 에너지전환과 전력시스템을 위한 기후변화 적응을 위해 WMO는 구체적 행동 방안을 마련하고 지원하고 있다. 구체적인 행동은 무엇일까? 지난번 이 칼럼에서 프로야구를 포함한 스포츠에 폭염이 미치는 영향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에 대해 쓴 바 있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폭염은 폭주하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재생에너지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만 우리나라가 늦었을 뿐이다. 재생에너지를 도입했을 때 생기는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단점에 초점을 맞춰 문제 제기하는
07.29
수정과는 차게 먹는다. 더위가 한창일 때 한모금 마시면 안성맞춤일 음료수다. 생강과 계피를 달여 식힌 물에 곶감을 넣은 다음 설탕이나 꿀을 가미한 수정과는 필자 기억에 별미였다. 계피의 맵고 알싸한 향미가 곶감을 씹는 단맛과 어우러지는 이런 고급스러운 음료의 주재료는 뭐라고 해야 할까? 설날 제사 마치고 큰아버지가 싸리나무 꼬챙이에서 딱 2개씩 나눠주던 곶감 귀한 시절이라면 마땅히 곶감이라는 답을 했겠지만, 지금은 계피 달인 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계피는 톡 쏘는 단맛이 있지만 매운 뒷맛이 센 편이다. 그렇기에 수정과에는 생강이나 꿀을 더해 계피의 매운맛을 누그러뜨리려 했을 것이다. 혈액순환을 돕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니 감기에 걸렸거나 심하게 추위를 타는 사람이라면 계피를 차로 마셔도 좋을 것이다. 지금 보면 학교 앞에서 사 먹었던 계피는 중국이나 아시아에서 자라는 녹나무과(Lauraceae) 상록교목의 가지 껍질을 벗겨낸 것이었다. 그것 말고도 지역에
07.22
인당수에 빠졌던 심청이가 21세기를 산다면 유튜브에 빠졌을까? 우물에 빠졌던 장화와 홍련은 또 어떨까? 심청이는 거절하기 힘든 거래를 성사시키며 가족의 생존을 위해 바다에 몸을 던졌고, 장화와 홍련은 말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가족의 균열을 떠안으며 우물에 빠졌다. 목숨을 희생해 겨우 목소리를 내던 동화의 주인공들이 지금이라면 어떤 유튜브 채널에 빠지고, 어떤 댓글을 달며, 또 어떤 콘텐츠를 만들지 궁금해진다. 심청이는 아르바이트 서너개 전전하며, 틈틈이 아버지의 삼시세끼나 병간호에 필요한 영상을 봤을까, 아니면 현실을 잊는 무념무상의 쇼츠에 빠졌을까? 장화 홍련은 눈칫밥 먹고 사느라 스마트폰 볼 기회조차 없이 스러졌을지도 모른다. 다른 상상을 해보자. 심청이에게 오빠가 있었다면? 장화와 홍련에게 남동생이 있었다면? ‘‘가족들은 너를 몰라줬지만, 나는 네 말에 귀 기울여줄게’라고 속삭이는 알고리즘에 빠졌을지 모른다. 이런 상상이 쉬운 건 주체적 선택 없이 희생 서사에 갇힌
07.15
우리는 매일 아침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을 본다. 밤하늘의 별들은 계절마다 익숙한 자리를 지키고, 계절은 어김없이 순서를 따른다. 이렇게 반복되는 세상의 움직임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준다. 익숙한 규칙, 익숙한 결과, 익숙한 세계. 우리는 그렇게 ‘확신’을 쌓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확신을 좋아한다. 뚜렷한 어조로 말하는 사람에게 끌리고, 명확한 해답을 주는 전문가를 신뢰하고, 확신에 찬 지도자를 믿고 따른다. "아마도”보다는 “틀림없이”가, “가능성이 있습니다”보다는 “확실합니다”가 우리를 안심시킨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과 삶에서 선명한 판단, 뚜렷한 해답은 때때로 진실보다 더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그런데 확신은 위험하다. 확신은 질문을 멈추게 하고, 의심을 불필요하게 만들며, 틀렸을 가능성을 애써 외면하게 만든다. 한 번 굳어진 믿음은 설령 그것이 틀렸다 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되는 증거를 애써 부정하거나, 모순을 꿰맞추며 더욱 단단해진다. 그래서 과학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