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3
2026
지난 1월 7일, 미국 보건복지부와 농무부는 새로운 ‘식생활지침(DGA, Dietary guidelines for Americans) 2025–2030’을 발표했다.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Robert F. Kennedy Jr.) 보건복지부 장관과 브룩 롤린스(Brooke L. Rollins) 농무부 장관이 공개한 식이 지침 슬로건은 단순했다. “Eat Real Food, 진짜 음식을 먹어라.” 정부는 거꾸로 된 새로운 식품 피라미드를 내놓았다. 위쪽에는 고기와 유제품, 지방이 자리 잡았고, 곡류는 아래로 내려갔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이는 기존 ‘곡류 기저’ 피라미드와 상징적으로 결별하는 선언이었다. 새 지침의 핵심은 단백질 우선이다. 성인 하루 단백질 섭취량을 체중 1kg당 0.8g에서 1.2~1.6g으로 대폭 상향했다. 매 끼니마다 고품질 단백질을 먹으라고 권한다. 흥미로운 건 김치가 이 지침에 명시됐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서를 자세히 읽으면 고개가 갸웃
01.27
‘인공조명으로 밝아진 야간은 생태계의 탄소저장 능력을 줄인다!’ 최근 영국의 한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의 핵심 결과다. 연구팀이 유럽과 북미의 도시 외곽 지역에 대한 위성 데이터와 지상 데이터를 종합해 분석한 결과 빛 공해가 생태계 호흡을 강화해 이산화탄소 방출량을 늘린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간 빛 공해가 개별 생물종의 군집변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다수 있었지만 이처럼 탄소순환에 미치는 영향을 체계적으로 조사한 결과는 처음이다. 빛 공해란 ‘야간에 광자의 체적 농도가 자연상태에서 예상되는 값보다 증가한 상태’를 말한다. 현재 전세계 인구의 약 80%가 빛 공해에 노출되어 있고, 유럽과 미국에서 이 비율은 99%를 넘는다. 200여편의 문헌을 메타 분석한 한 연구에 의하면 지구 표면의 거의 절반 정도가 밤에 인공 빛의 영향권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도시의 건물 조명, 경관/광고 조명, 가로등이 빛 공해의 원인이라 간주되지만 이 연구에 의하면 야간 인공광의 절반 이상
01.20
해마다 겨울이면 우리 집 부엌에는 짙은 갈색 실뭉치 모양의 말린 고사리가 있었다. 외할머니가 손톱으로 일일이 끊어서 말린, 전라도 부안의 외가에서 건네 온 물건이었다. 한식날 성묘 가는 길목에서 금관악기 모양으로 구부러진 고사리 어린잎을 보면 필자도 외할머니가 그러셨듯 엄지와 검지 손톱으로 고사리순을 따곤 했다. 고사리는 양치(羊齒)식물이다. 이름의 유래인 양의 이빨을 본 적은 없으나 톱니 모양의 푸른 고사리 잎과 늦가을 마른 잎 뒤에 쭉 늘어선 고사리 포자의 섬뜩한 정렬을 뚜렷이 기억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자는 양치류를 동물의 양서류와 등치시킴으로써 물을 헤엄쳐 가야 하는 개구리와 고사리 정자의 성생활을 떠올린다. 개구리나 고사리는 물을 멀리 떠나서는 사는 일이 괴롭다. 양치류는 그늘지고 습한 곳을 골라 자신의 성세를 누리지만 인간은 그들의 조상이 한때 물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자주 잊곤 한다. 15억년 전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어떤 조류가 파도를 타고 떠돌던 남세균을
01.13
‘게으른 일머리’가 필요한 시대다. 중요한 판단과 책임은 ‘꽉’ 쥐고 매번 씨름할 필요가 없는 일은 ‘놔’ 버리는 것, 기계의 일과 내 일을 구분하고 에너지를 어디 쓸지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태도 말이다. ‘게으른 일머리’는 개념과 절차를 정의하는 일로 시작한다. 이 단계를 가로막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니야?”라는 질문처럼 보이는 선언문이다. 이로 인해 같은 단어로 다른 것을 떠올린다는 사실을 모른 채, 우리는 관계를 틀어지게 하고, 때로는 엄청난 손실을 입기도 한다. ‘내 말 좀 들어봐’라며 시작한 대화가 ‘왜 내가 니 말을 들어야 하는데?’라고 반발하다 한참을 싸운 커플이 있다. 알고 보니 ‘듣다’라는 단어를 한 사람은 ‘귀를 기울이다’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은 ‘시키는대로 따르다’라는 뜻으로 써, 같은 단어를 담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버전의 대화가 생성된 것이다.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의되지 않은 단위와 절차로 4000억원을 날린 일도 있다. 1999년 나사(NASA
01.06
2025년 11월 27일 오전 1시 13분,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KSLV-II)가 네번째 비행에 성공했다. 누리호는 차세대 중형위성 3호와 12기의 부탑재 큐브위성을 예정된 궤도에 투입했다. 발사부터 비행, 분리, 궤도 안착에 이르는 주요 비행 이벤트들은 모두 계획대로 수행됐고, 발사체와 탑재체의 상태 역시 정상으로 확인되었다. 결과만 보면 이번 발사는 또 하나의 성공의 기록이다. 그러나 누리호 4차 발사는 ‘성공했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되기에는 아까운 사건이다. 이미 2차 발사에서 완전한 성공을 경험했고, 3차 발사를 통해 그 성공이 우연이 아님도 확인했다. 그럼에도 이번 발사가 특별하게 읽히는 이유는 이 성공의 성격이 이전과 분명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누리호 4차 발사는 단순히 발사 횟수를 하나 더 늘린 사건이 아니라 한국 우주개발이 새로운 단계로 넘어갔음을 보여주는 신호에 가깝다. 누리호 1차 발사는 ‘성공적인 실패’로 불린다. 궤도 진입에는
12.30
2025
최근의 인공지능(AI) 열풍은 기술적 혁신을 넘어 에너지산업 지형까지 흔들고 있다. GPU나 HBM 같은 첨단 반도체 확보 경쟁이 1차전이었다면 이제는 이들을 가동하기 위한 막대한 전력 확보가 2차전으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나라에 도입 예정인 약 25만장의 GPU를 가동하기 위해 필요한 0.5~0.8기가와트의 전력은 원자력발전소 하나의 발전량에 근접하는 양이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이러한 데이터 센터를 세계 곳곳에 건설한다면 이는 지금까지 인류가 예상하지 못한 수준의 전력수요를 의미한다. 안정적인 전력 확보가 AI 기술패권경쟁의 필수조건이 된 셈이다. 필자는 평소 반도체 물리학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컴퓨터는 전열기다”라는 농담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농담이 아닌 물리적 실체다. AI 데이터센터나 개인용 PC의 반도체 칩으로 들어간 전기는 최종적으로 모두 열에너지로 변환되어 방출된다. 우리는 뜨거운 컴퓨터를 식혀야 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왜
12.23
한때는 농경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노동력으로, 현재는 가장 고급화된 육류 중 하나로 한우는 한국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며 한국인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한우는 여느 소와 마찬가지로 전세계에서 인류와 함께 진화한 주요 생물이다. 인류가 처음 소를 길들인 것은 약 1만 년 전 즈음으로 추정된다. 그 오랜 세월, 우리는 서로 중요한 자원을 주고 받으며 역사 속에서 함께 변화했다. 현대 소는 크게 한국에서 흔히 소라고 부르는 타우루스 소와 인도 혹소라고 불리는 인디쿠스 소 둘로 나뉜다. 이러한 현대 소는 모두 멸종한 야생 소인 오록스(aurochs)로부터 별도로 유래해 진화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인류와 함께 다양한 지역을 오고 가며 서로 섞이기도 하고 지역 오록스와 섞이기도 하는 등 복잡한 역사를 거치며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소의 진화과정은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지구를 떠돌며 살아온 역사만큼이나 복잡하다. 소의 진화, 그 중에서도 인류와 길들여
12.16
지방 특산자원을 국가 부처에서 지원해주는 과제가 있었다. 과제심사를 한 날이 마침 첫눈이 수북이 내린 날이었다. 심사를 마치고 나오니 굵은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쌓여 있었다. 다시 일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불편함보다 한적한 눈길을 달리고 싶다는 욕망이 앞섰다. 눈에 취해 차를 운전하다보니 길을 잘못 들었다. 월출산 자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차를 잠시 주차하고 월출산에 취해 산허리를 눈으로 좇다보니 산 아래 마을에 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잎을 잃고 눈을 위태하게 얹은 가지에 휘청하듯 감이 달려있었다. 하얀 눈을 바탕으로 주황빛을 끝까지 붙들고 서 있었다. 그제서야 그 지역 과제 주제가 ‘감’이었던 것이 기억났다. 감은 과육 껍질 씨 잎 심지어 떫은 미숙과까지 고유한 생리활성 성분과 다양한 쓰임새가 있다. 단감의 껍데기는 주황색 특유의 베타카로틴과 크립토잔틴등 카로티노이드이며, 과육부분은 고유의 단맛뿐 아니라 비타민 A와 C, 칼륨과 식이섬유, 그리고 폴리페놀과 카로티노
12.09
21세기 초, 필자가 한 디스플레이 부품 회사에 근무할 때다. 당시 회사는 시장이 커지던 액정표시장치(Liquid Crystal Display, LCD) TV의 후면에 들어가는 광원을 개발하고 있었다. TV는 보통 스크린에서 직접 빛이 만들어져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LCD는 후면에 백색광을 내는 조명장치, 즉 백라이트가 따로 들어간다. 액정 패널은 조명이 쏘아주는 빛의 투과도를 화소별로 조절하는 광스위치 역할을 할 뿐이다. 여기서 핵심적 역할은 ‘액정’이라 불리는 물질이다. 미국의 트럼프정부가 기초과학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상황에서, 한 프리랜서 작가가 혁신적 산업으로 이어진 기초과학의 다양한 성과를 소개하는 글을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었다. 그중 한 분야가 바로 액정이었다. 액정은 말 그대로 ‘액체’와 ‘결정(고체)’의 합성어다. 액체처럼 흐르는 유동성을 보이지만 결정과 비슷하게 빛의 편광을 조절하는 성질도 갖는 상이 바로 액정상이다. 오늘날 주류 디스플레이로 부상한
12.02
2025년 10월 22일 정부는 2021년 11월 코로나19 대응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한시적으로 시작한 유류세 인하 조치를 18번째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2025년 10월 29일에 유명한 의학저널인 랜싯(Lancet)은 최근 폭염으로 인한 전세계 사망자가 연간 약 55만명이라고 보고했다. Lancet의 이번 보고서에 대해 국외에서는 저명언론 기관과 세계보건기구 같은 공공기관에서 심도있는 분석기사를 내보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연간 55만명이 사망자는 1분당 1명 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대단한 사건인데도 말이다. 이런 정도의 사망자는 이제 언론에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거나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는 더더욱 일견 이해가 가기도 한다. 경기부양을 위해 우리나라에서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유류세 인하다. 일견 서로 상관없어 보이지만 전례 없는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 증가는
11.25
날이 제법 춥다. 장갑 낀 양손을 웃옷 주머니에 넣은 채 종종걸음을 옮기면서도 시선은 배풍등(排風藤)을 향한다. 가운데께로 푸른 빛 절반, 가장자리로는 짙은 갈색 절반쯤이라 가지에 달린 몇 개의 배풍등 잎은 막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서는 북반구 온대지방의 날씨를 닮았다. 풍(風)을 쫓는 효능이 있다는 이 식물을 영어로는 리라(lyre) 닮은 잎을 가진 ‘밤그늘(nightshade)’이라 부른다. 리라는 한쪽 끝이 백자 손잡이 흡사한 현악기를, 밤그늘은 밤에 독성을 띠는 열매의 특성을 빌어 지은 이름이다. 대체로 밤그늘은 감자나 토마토 가지 등 가짓과 식물을 가리키지만, 때마침 까만 열매를 단 까마중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필자에게 올 한해는 배풍등을 처음 보고 그 이름을 찾고 더운 여름 지나 맺은 푸른 열매가 오롯이 붉은색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느라 다 지나갔다. 이른 봄 배풍등 잎을 처음 보았을 때는 뒤늦게 나팔꽃 잎 모양을 떠올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식물의 이름을 유추할 수 없어
11.18
11월 둘째주 목요일, 창의성을 억누른다고 오랫동안 비판받아 온 큰 시험이 치러졌다. 이 수학능력시험(수능)을 중심으로 한 입시체제는 과연 창의적 사고를 억제하는가? 자, 이 질문에 ‘소신껏’ 답하지 말고 끝까지 읽은 후 ‘과학적’으로 답해보자. 우선, 창의성의 정의와 구성 요소는 무엇인지, 어떤 단계를 거쳐 창의적 문제해결을 하게 되는지, 그런 역량을 키우려면 학습 경험을 어떻게 설계해서 적용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창의적인지 어떻게 판단할지 따져야 한다. 이런 질문은 인지과학 교육공학 심리측정학 경영학 등 여러 학문에서 다루어진다. 그 모든 분야를 이 짧은 글에서 설명할 수는 없으니 그 대신 요리를 해보자. 당신은 한국에서 나고 먹고 자란 청년인데 어떤 요리 대회에 참가한다. 과제는 두부를 주재료로 한 서양 코스요리 만들기. 설정부터가 창의성을 억지로라도 끌어내도록 되어 있다. 두부란 한국인의 밥상엔 너무나 익숙한 식재료인 반면, 서양의 마트에선 일부 아시아 섹션에서나 간
11.11
지구 주변에는 기상위성 통신위성 정찰위성 허블우주망원경 국제우주정거장 등 인간이 쏘아올린 인공물체들이 수없이 떠 있다. 지구 궤도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뉜다. 지구로부터 약 2000km 이내의 저궤도(Low Earth Orbit, LEO), 약 3만 5000km 거리의 정지궤도(Geostationary Earth Orbit, GEO), 그리고 그 사이의 중궤도(Medium Earth Orbit, MEO)다. 우리가 사용하는 GPS 위성은 중궤도에 있고, 통신위성은 정지궤도에 자리한다. 국제우주정거장은 약 400km 상공의 저궤도를 따라 지구를 돈다. 최근 전세계가 새롭게 주목하는 영역이 있다. 바로 초저궤도(Very Low Earth Orbit, VLEO)다. 지구에서 약 200km 근처의 초저궤도는 기존 저궤도보다 훨씬 낮다. 지구와 가까워 발사비가 적게 들고, 통신 지연이 작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영역은 오랫동안 ‘금지된 궤도’로 여겨져 왔다. 지구 대기의 잔여
11.04
반도체 산업 기술 동향에 관심이 있다면 요즘 많이 접할 수밖에 없는 용어가 HBM(high bandwidth memory)이다. 우리말로는 ‘고대역폭 메모리’인데, 속도가 매우 빠른 반도체 기억소자다. 컴퓨터가 하는 일이 인간의 두뇌가 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보면 컴퓨터에서도 기억장치인 메모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른바 폰노이만 구조의 컴퓨터는 메모리와 연산기로 구성되고, 연산기가 더하고 곱하는 데이터뿐만 아니라 연산기가 할 일을 알려주는 명령도 메모리에 저장된다. 연산기는 명령과 데이터를 메모리로부터 가져와서 연산을 수행한 후 다시 메모리에 저장한다. 따라서 연산기의 성능이 좋아지면 메모리에서 데이터를 가져오는 속도도 빨라져야 한다. 현재 컴퓨터에 사용되는 메모리 중에서 가장 느린 것은 하드디스크(HDD) 인데 속도가 초당 200MB 정도로, 고해상도 영화 한편을 옮기는데 10초 정도 걸린다. 물론 이는 최대값이고 실제 사용시의
10.28
지구상 온갖 생물의 유전자원을 활용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하다. 미생물부터 바이러스까지, 유전다양성이 극도로 높은 생물 등에 대한 유전체 정보 확보 연구가 이에 해당한다. 수만에서 수십만 종류의 유전체 정보를 대량으로 획득하고 이를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유용 유전자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발굴하는 분야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이렇게 확보한 유용 유전자는 마치 공장의 조립라인처럼 양산용 세포에 장착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러한 신규 유용 유전자 발굴을 통해 주요 생체 분자를 합성하고 대량생산하는 일이 손쉬워질 것으로 기대된다. 수십억년의 역사가 담긴 진화라는 기나긴 시간 속에서 최적화된 유전자, 이를 죄다 꺼내 우리 삶에 더 가깝게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합성생물학 연구는 유전자와 생화학 반응을 최적화하면서 유용한 생체분자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홉 없이도 맥주에 홉 향을 추가해주는 효모 개발이나 꽃 없이도 꽃가루의 양분을 대신 생산해
10.21
도톰한 쇠고기 안심이 달구어진 프라이팬 위에 놓인다.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육즙과 기름이 각각 다른 목청을 낸다. 수분은 작은 알갱이가 되어 튀어오른다. 향신료와 소스, 버터를 넣자 TV 화면은 스테이크의 향미로 가득 찬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들뜬 진행자는 과장스럽게 손을 펼쳐 흔들며 냄새를 맡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스테이크를 뒤집더니 갈색으로 익은 표면을 가리키며 “봐요 봐요! 이 마이야르 반응으로 먹음직스러운 색으로 변했어요!”하고 손뼉을 친다. 순간 필자의 TV 화면 안에는 물음표로 가득 차 버린다. 마이야르는 사람 이름이다. 루이 카미유 마이야르(Louis-Camille Maillard)라는 프랑스 화학자로 1912년에 아미노산과 환원당이 반응해 갈색물질을 형성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식품의 가열, 조리 또는 저장 중 일어나는 갈변현상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는 아미노 카보닐 반응이라고도 하며 아미노기와 카보닐기가 합쳐져 특유의 색과 향을 생성하는 반응이다. 당시 마
10.14
오래전 가족과 강원도의 한 산골에 갔을 때였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산책 중 우연히 반딧불이 무리와 마주쳤다. 따뜻한 황록색으로 물든 빛의 반점들이 허공을 떠도는 모습은 난생처음 본 은하수처럼 경이롭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이런 은은한 빛을 내 옆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동아시아의 민간 설화에 종종 반딧불이를 모아 등불처럼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 같다. 반딧불이의 희미한 빛은 루시페린이라는 유기화합물에서 비롯된다. 루시페린은 루시페라제 효소의 도움으로 산화하며 빛을 낸다. 분자의 빛 방출이 대개 그렇듯이 산화된 루시페린의 여기 상태에 놓인 전자가 안정한 바닥 상태로 돌아오며 두 상태의 에너지 차이가 빛으로 방출된다. 반딧불이 외에도 야광버섯을 포함해 빛을 내는 생물은 많지만(특히 심해 생물 중 빛을 내는 종류가 많다) 발광원리는 비슷하다. 생물발광의 효율, 즉 생체가 소비하는 화학 에너지를 빛으로 바꾸는 비율은 매우 높아서 많은 과학자들의
09.30
큰아버지는 멀쩡한 두 아들을 놔두고 나이어린 조카에게 팽이를 만들어주어 구설에 올랐었다. 나무 귀한 평야지대에서 한쪽 다듬잇방망이를 절반 좀 안되게 잘라 깎아 팽이를 만들어놓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풀 쑤어 먹인 옷가지를 두드려 펼 때마다 큰어머니는 “시상에나, 갸가 을매나 이뻤으면” 하고 넋두리처럼 말을 내놓았다. 기억에 의지해서지만 그 팽이의 주인공인 내 깜냥에도 할 말이 없지는 않다. 타작을 끝낸 건넌방에서 새끼 꼬는 어른들 쌈지담배는 내가 일일이 침 발라 가며 다 말았다. 그것도 담배 연기 맡아가며. 그뿐이랴. 막걸리 심부름도 했고 큰아버지 아버지 무릎을 번갈아 오가며 북도 쳤고 갖은 재롱을 다 피워댔던 것이다.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도구도 마땅치 않았던 시절 단단한 다듬잇방망이를 자르고 손질하는 게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톱질은 물론이고 못 박기도 쉽지 않은 다듬잇방망이는 흔히 물푸레나무로 만들었다. 단단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무였다는 뜻이다.
09.23
우리 인간은 영웅이 필요하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을 영웅화하고, 신화나 영화 속 영웅으로 대리만족을 하기도 한다. 슈퍼맨 원더우먼과 마블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우리의 이런 마음을 대변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영웅은 있지만 위기를 사전에 막는 영웅은 찾기 힘들다. 재난과 시련은 늘 일어나는 막을 수 없는 상수이기 때문일까? 기후위기를 다룬 영화에서도 기후재난을 막지 못한 상황에서 시작한다. 흔히 난세에 영웅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위기를 사전에 감지하고 경고하는 사람을 우리는 ‘예언자’라고 한다. 위기해결사인 영웅과 달리 우리는 예언자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예언자는 흔히 허풍쟁이거나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트로이의 공주였던 카산드라는 누구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못하도록 저주를 받았다. 카산드라의 예언을 믿지 않은 트로이는 멸망했고, 카산드라 역시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지금 우리는 데이터 기반으로 과학적 추론에 근거한 예측능
09.16
“우린 휴대폰 속에 사는 일상 로봇. 집으로 가는 길엔 돌기둥처럼 혼자서 우뚝 서 있지.” 데이먼 알반(Damon Albarn)의 노래 ‘에브리데이 로봇(Everyday Robots)’은 기술에 의존한 인간의 소외를 노래한다. 카페에 마주 앉은 연인도, 쉬는 시간의 아이들도, 붐비는 지하철의 사람들도 저마다 손 안의 화면에 갇혀 수천년 전부터 그 자리에 멈춰 선 스톤헨지처럼 고립되어 있다. 노래 속에 반복되는 autonomous(1. 자율적인 2. 인간의 제어없이 스스로 작동하는)라는 단어는 우리가 자유롭게 사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음을 조용히 읖조린다. “이 사람들 저 사람들,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머무는 이곳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라는 가사 또한, 끝없이 스크롤을 내리면서도 방향을 잃은 우리의 모습을 비춘다. 그런데 이 소외는 사회적 문제에 그치지 않고, 집중력의 붕괴와도 맞닿아 있다. 오늘 우리가 도둑맞은 집중력은 사실 2인칭을 잃은 결과다. 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