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6
2026
생물의 진화과정은 저마다 다채롭고 복합적이다. 척추동물만 해도 그렇다. 척추동물은 몸통을 따라 단단한 등뼈인 척추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뇌를 포함한 복잡한 신경계를 지니고 있다. 이는 척추동물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이 척추가 없던 조상 동물과 어떤 점이 달라지면서 차이가 생겨난 것인지, 어느 시점에 등장한 것인지, 수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많은 정보가 밝혀졌지만 여전히 모르는 정보도 너무나 많다. 시간을 돌려 수억년 전 척추동물이 처음 탄생한 시점의 생물을 구할 수만 있다면야 그 진화 과정을 일일이 들여다보는 게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연구자들은 지금 살아있는 생물을 서로 비교해 수억년 전 사건을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다. 척추동물 및 척추동물과 가장 가까운 무척추동물을 연구하는 것이 최선인 셈이다. 창고기는 이러한 척추동물 진화 과정을 밝히는 데 있어 가장 널리 활용되는 핵심생물 중 하나다. 창고기는 마치 창날처럼 양끝이
06.09
냉장고 골든존을 차지하는 1리터 종이팩은 집안의 영양을 수호하는 자리다.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 단지를 모시듯 우유가 없는 냉장고는 곧 부정을 탈 것 같았다. “우유가 떨어졌으니 사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터줏가리에 정화수를 올리던 간절함과 다르지 않았다. 믿음이 흔들릴라치면, 병원 식판 위의 앙증맞은 종이팩이 그 의심을 조용히 눌렀다. 온몸이 성한 데 없는 환자에게도 빠지지 않는 것이 우유였다. 의심은 믿음이 부족한 탓이었다. 키가 크고 뼈가 단단해지기를 바라는 소망 앞에서, 학교 급식 식판 위의 우유는 늘 정답처럼 자리했다. 배가 더부룩해도 설사를 하더라도 마셔야 했다. 이 견고한 관성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우유 한 팩 안에는 식품가공 기술의 핵심공정들이 압축되어 있다. 집유된 생유는 공장에 도착하자마자 ‘표준화’를 거친다. 젖소의 상태나 계절, 사료에 따라 원유의 지방과 단백질 함량이 매번 달라지기 때문에 최종 제품의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과정이
06.02
태양계 하면 우린 태양과 여덟개의 행성, 그리고 행성의 지위에서 쫓겨난 명왕성을 떠올리곤 한다. 조금 더 생각하면 화성과 목성 사이에서 확인된 100만개가 넘는 소행성과 해왕성 너머 카이퍼벨트나 태양계를 감싸는 오르트구름으로 시야가 확장된다. 이들 중 해왕성 바깥 천체(Trans-Neptunian Objects, TNOs)로 불리는 먼 거리의 천체들은 태양계 형성 초기의 물질 정보를 그대로 포함하는 태양계의 화석으로 간주되어 왔다. TNO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명왕성도 있지만 이와 크기가 비슷한 에리스를 비롯해 여러 왜소행성들도 포함된다. 최근 일본의 천문학계가 발표한 한 연구는 얼어붙은 세상으로 여겨진 TNO에 존재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약 500km의 지름에 명왕성과 비슷한 궤도를 도는 2002XV₉₃이란 소천체에 대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 정도의 천체는 중력이 작아 대기를 안정적으로 붙들기 힘들다. 그래서 그간 명왕성을 제외한 TNO들에선
05.26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 서리 맞은 단풍이 이월의 꽃보다 더 붉다는 뜻이다. 본격적인 여름도 오지 않았는데 생뚱맞게 늦가을을 소환하는 까닭은 적단풍이 초여름의 푸르름 속에서 단연 붉게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월화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홍매화를 꼽았지만 필자는 동백을 떠올렸다. 꽃은 붉은 것이 드물지 않지만 가을이 아니라면 붉은 잎은 드물다. 한데 몰 밀어 적단풍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들 잎의 색은 무척 다양하다. 붉고 푸른 잎이 한 가지에 두 갈래로 갈라지는가 하면, 붉은 색조가 있더라도 푸른빛이 농담을 달리하는 잎 등 천차만별이다. 게다가 햇빛 내리비치는 수관의 가지 끝에선 붉은 잎이 선명한 자태를 뽐낸다. 잎의 색은 주로 세가지 화합물이 결정한다. 광합성 공장인 엽록소는 푸른색이고 광합성 보조색소이자 가을 은행잎에 듬뿍 든 카로티노이드는 노란색이다. 붉은색은 안토시아닌에서 비롯된다. 주로 이 세가지 화학물질의 비율에 따라 나뭇잎이 다양한 색깔을 띠게 되
05.19
얼마 전 우리나라 최고 IT 기업을 방문했다. ‘로봇 친화형’ 건축물로 인증받은 이곳에서, 우리 일행이 만난 로봇은 건물 내 카페에서 일하고 있었다. 혼자 직원 출입 검색대를 통과하고 엘리베이터도 타는 게 신통했다. 이들이 최적의 경로로 이동하게끔 천장 곳곳에 QR코드가 달렸다. 인간에게 커피와 행복을 배달하다가 힘이 딸린 로봇은 스스로 충전 스테이션으로 돌아온다. 우리 일행도 회의실에 앉아 커피를 가져올 로봇을 기대했지만 마침 모두 충전 중이었다. 쉬는 로봇 대신 인간들이 가져와 마실 수밖에. ‘인간 친화형’ 인증이 있다면 여긴 그것마저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보안 게이트 대신 바깥세상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탁 트인 1층 공간, 시민들에게 공개된 인스타그래머블한 도서관, 기념일을 잊고 빈손으로 퇴근해 버리고도 남을 개발자 직원들의 가정 내 평화를 위한 듯한 꽃집 ‘플랜트(Plant)’, 병원 검진 결과를 함께 해석하고 ‘그래서 무엇’을 하면 건강하게 살 것인지 상담해 준다
05.12
요즘 뉴스를 보면서 새삼 실감하는 것이 있다. 제조를 놓지 않은 나라의 힘이다. 반도체 공장 하나가 외교의 무게를 바꾸고, 조선소의 생산 능력이 협상 테이블의 자리를 결정한다. 자동차와 화학도 다르지 않다. 설계도는 있어도 만들지 못하는 나라와, 설계부터 생산까지 스스로 해내는 나라 사이의 간극은 단순한 기술격차가 아니다. 그것은 위기 속에서의 회복력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대체되지 않는 자리다. 과학기술과 제조가 함께 움직이는 나라, 그런 나라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 힘이 처음부터 당연한 것이었을까. 돌아보면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제조강국 위상은 누군가 먼저 봤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직 시장이 열리지도 않은 때에, 아직 성공을 확신할 수도 없는 때에, 먼저 뛰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소를 짓겠다고 나섰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다. 배를 만들어 본 적도 없는 나라가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겠다는 것이 무모하게 보였을 것이다. 반도체를 하겠다고 했을 때
04.28
이란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걸프 지역의 원유를 수입하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나라의 에너지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태양광을 비롯한 신재생 에너지에 많은 투자를 한 국가는 상대적으로 덜 영향을 받고 있다. 신재생 에너지원 중에서 태양전지는 태양빛의 에너지를 직접 전기에너지로 변환하는 기술이다. 효율이 25% 정도로 화력발전에 비해서는 낮지만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청정에너지 기술이다. 최초의 태양전지는 1888년 러시아 과학자 스톨레토프(A. Stoletov)가 처음 보고했다. 반도체를 이용한 현대적 태양전지는 1946년 미국 벨 연구소의 러셀 올(Russel Ohl)이 발견하고 특허를 출원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벨 연구소는 1954년에 실용적으로 사용 가능한 실리콘 태양전지를 최초로 제작했는데 효율이 6% 정도였다. 이 실리콘 태양전지는 1958년 미국의 뱅가드(Vanguard) 인공위성에 탑재되어 우주에서 사용된다. 이때의 가격은 와트당 290달러
04.21
위 그림은 남극 상공의 오존 농도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1987년 몬트리올 의정서를 통해 과학적 경고가 오존 파괴 물질 사용의 단계적 퇴출이라는 국제적 행동으로 이어진 보기 드문 사례를 만들었다. 또한 오존층 파괴의 실존적 위험을 대중에게 알려 인류 공동체 의식을 발현시키고, 오존층의 점진적 회복이라는 국제사회 합의를 이끌어낸 상징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2024년 탄소중립기본법 일부 조항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우리 사회는 개정을 둘러싼 논의를 이어왔고 최근 정부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면서 제도의 구체적 설계가 중요해지고 있다. 하지만 기후위기에도 불구하고 관련된 논점의 사회적 합의는 여전히 쉽지 않다. 이는 단순히 과학 부정론 때문은 아니다. 탄소중립은 사회 전체의 전환을 요구해 다양한 이해당사자의 상충하는 이해를 조정해야하는 고난도 과제다. 더구나 감축의 총량적 효율만이 아니라 비용 부담의 분배 윤리까지 함께 다루어야 한다. 환경정책의 성공모델인 몬트리올 의정서에서
04.14
보건복지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질병관리청 4개 정부 부처가 공동으로 추진중인 국가통합바이오 빅데이터 구축사업은 한국인의 건강정보와 유전체를 비롯한 대규모 데이터를 구축하기 위한 인프라 사업이다. DNA와 같은 단순하지만 다양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 생체 분자부터, 실제 환자의 건강과 질환상태를 포함한 복잡하고 해석이 어려운 정보까지 한번에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렇게 쌓인 대규모 데이터는 인공지능(AI)을 통해 학습될 수 있다. 이러한 AI바이오를 고도화함으로써 질환이 생기고 건강상태가 바뀌는 원인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생체분자를 조절해 더 오래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여전히 다양한 문제가 산재해 있어 이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 인체에서 유래한 데이터를 수집한다는 측면에서 본 사업은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만, 그로 인한 제한조건도 까다롭다는 문제도 지니고 있다. 요컨대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방
04.07
설탕은 포도당과 과당이 물 분자 하나를 내보내며 결합한 이당류다. 그전까지 설탕은 귀족의 빛나는 사치품이었다. 요리사는 당도를 혀로 가늠했고, 상인은 원산지와 정제 정도에 따라 제각각인 품질을 눈으로 쳤다. 사탕수수즙에서 불순물을 걷어내고 수분을 날리면 고순도의 하얀 결정이 남는다. 맛이 표준화되고 계량이 쉬워지고 용해도가 일정해졌다. 하얀 결정은 단지 단맛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물질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근대 식품산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그 문을 누군가는 처음으로 열어야 했다. 그 문을 연 사람이 노버트 릴뢰(Norbert Rillieux)다. 1806년 뉴올리언스에서 백인 농장주 아버지와 흑인 노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자유 유색인이라는 어중간한 신분이었다. 파리로 유학을 떠나 돌아온 그가 개발한 다중 효용 증발기는 증발기 여러 대를 연결해 한 단계에서 나온 열기가 다음 단계를 달구게 했다. 에너지 효율이 극대화되자 석탄 소비량은 획기적으
03.31
춘천에 사는 필자는 주말에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곤 한다. 실개천과 같은 자연도 좋지만 낯선 골목길을 걷는 것도 즐긴다. 거닐다 보면 원룸건물들 위로 솟아오른 태양전지판을 종종 마주친다. 태양전지를 지지하는 철 구조물도 휑한 느낌이지만 그 위의 검푸른 태양전지판의 칙칙한 모습은 정다운 골목길 속 이방인과 같다. 이를 보며 가끔 태양전지를 건물을 멋지게 장식하는 건축재로 만들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빛을 흡수해 전기를 만드는 실리콘(Si) 태양전지가 암청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빛의 반사를 방지하는 막이 올라간 실리콘 태양전지는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을 대부분 흡수하고 약간의 푸른색만 반사하기 때문이다. 암청색 태양전지판이 건물의 외관을 온통 둘러싼 모습을 상상하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대신 다양한 색상을 띠는 태양전지판을 개발해 건축외장재로 쓰면 어떨까? 표면이 색을 보이려면 입사하는 태양빛을 모두 흡수하지 않고 일부를 반사해야 한다. 가령 가시
03.24
영화 ‘변산’에는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다”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카메라가 잡은 앵글이나 줄거리를 쫓다 보면 ‘과연 그러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머니의 고향이고 지금도 그곳에 외가를 둔 필자는 그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파도가 긴 시간을 들여 층층이 깎아 만든 채석강 해안절벽을 보고 휘둥그레진 눈이 내변산의 웅숭깊은 숲과 계곡에서 한 번 더 놀라는 곳이 변산이다. 가난할지는 모르겠으나 노을 말고도 보여줄 것은 이곳에도 부지기수로 많다. 느른한 여름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솔가리를 흔들어 피리소리를 내는 원두막에 서서 서해를 바라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문풍지를 때리는 눈바람에 들창문을 열고 이른 새벽을 맞은 적이 있는가? 이는 어린 필자가 변산 외가에 머무는 동안 겪은 일이다. 변산은 산과 바다가 너나들이로 접한 곳이다. 어디를 가도 바다가 보이고 산이 둘러섰다. 그 덕분에 한반도의 서쪽 무릎께 자리한 이곳은 온난다습한
03.17
인간이 지식을 습득하고 확장하는 정교한 메커니즘은 의외로 아이들의 놀이에서 발견된다. 털실 한줄을 가져와 양 끝을 묶고 팽팽하게 당겨보자. 양손에 실을 한번씩 더 감아 고리를 만든다. 가운뎃손가락을 반대편 실을 차례로 떠내면 ‘출렁다리’ 모양이 만들어진다. 실뜨기(string figures) 놀이의 시작이다. 이 놀이는 실 한줄로 여러가지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 묘미다. 그런데 출렁다리 다음에 또 다른 모양을 만들기가 무척 어렵다. 이 실뜨기 놀이의 전략은 맞은편에 친구를 불러 앉히는 것이다. “자, 받아봐!” 손을 내밀면 친구가 실의 어느 지점을 낚아채느냐에 따라 사다리가 되고 다이아몬드가 된다. 실은 내 손을 떠나 친구의 손으로 옮겨가며 쉴 새 없이 변모한다. 이 역동적인 주고받기 놀이로 과학기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함께 생각하기(thinking-with)’를 설명한다. 지식은 개인의 머릿속에 고립되지 않으면서 서로 주고받으며 엮이고 비틀어지며 비로소 진화한다. 이 과정
03.10
늦은 밤 연구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컴퓨터 화면에는 복잡한 계산 결과가 떠 있고 학생들은 그 앞에 앉아 식어버린 커피를 옆에 둔 채 코드를 다시 돌려본다. 문제 하나를 붙잡고 몇 주, 때로는 몇 달을 보내는 일도 드물지 않다. 과학과 공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이런 밤은 일상의 한 장면이다. 필자 역시 비슷한 밤들을 보냈다. 과학과 공학은 그렇게 사람의 시간을 먹으며 성장하는 분야다.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은 때로는 반복적인 계산과 실험의 형태로, 때로는 오랜 고민과 실패의 형태로 쌓여 간다. 이처럼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분야였기 때문에 과학과 공학은 오랫동안 ‘그냥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이기도 했다. 보수가 얼마나 되는지,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보다 그 분야 자체가 좋아서 그 길을 선택한 사람들 말이다. 과학이 좋고 공학이 좋아서, 혹은 새로운 기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03.03
새해 들어 반도체로 온나라가 들썩거리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가격이 폭등하면서 메모리 기업들의 이익이 상상을 초월할 것이란 전망에 주가가 끝없이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이 예상치 못한 놀라운 성능을 나타내면서 글로벌 AI 기술 주도권 경쟁이 치열한데 학습과 추론용 데이터센터 수요의 폭발적 증가로 야기된 메모리 반도체의 공급 부족이 그 원인이다. 국내외 첨단 메모리업체가 각광받는 이유는 엔비디아 같은 회사가 생산하는 GPU 연산코어와 메모리 사이의 데이터 이동속도를 높인 고대역폭메모리(HBM)의 독점 공급과 수요 폭발 때문이다. 일반적인 D램 메모리보다 데이터를 보내는 전선 수를 대폭 늘려 통신속도를 높인 것이 HBM이다. 물론 HBM을 구성하는 D램 메모리 소자의 속도도 빨라졌는데 컴퓨터의 심장박동과도 같은 클럭 주파수가 올라가는 등의 개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선 수를 늘리는 것도 무한히 계속할 수 없고 클럭 주파수도 계속 올릴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는 반
02.24
‘모든 학문 분야는 소중하다.’ 오늘 글은 이 당연한 문장으로 시작하려 한다. 다양성은 생물학적 생태계뿐만 아니라 대학 기업, 그리고 사회 전반의 회복탄력성을 지탱하는 핵심동력이다. 모든 연구자가 자신의 분야에 투자가 필요하다고 외치는 절박함에는 저마다의 타당한 논리가 있다. 클라크 커(Clark Kerr)가 그의 저서 ‘대학의 쓰임새’에서 역설했듯 현대의 연구는 대규모 자본 투입을 전제로 하며 미국식 연구 중심 대학이나 유럽의 거대 연구소들이 그 모델을 선도해왔다. 하지만 자본의 총량이 곧 혁신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규모의 경제라는 신화에 균열을 낸 사례들은 이미 도처에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도의 화성 탐사선 ‘망갈리안(Mangalyaan)’이다. 2014년 인도는 미국 NASA 예산의 1/9 수준인 단돈 1000억원으로 화성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 반도체 설계의 강자 ARM역시 좋은 예다. 인텔이라는 거인이 제조 시설(Fab)에 수십조 원을 쏟아부으며
02.10
제4차 국가생명연구자원 관리·활용 기본계획이 공개됐다. AI바이오를 위한 핵심 인프라로서 생명연구자원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다양한 국내 연구진이 생산하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 대상 연구 데이터를 한 데 모아 정리하고, 이를 손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인공지능 기반 분석 플랫폼을 구축하는 셈이다. 이를 통해, 소규모 데이터에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대규모 데이터에서는 확인할 수 있는 생명이라는 복잡한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더 넓어질 것이다. 예컨대 사람의 데이터로부터 질환의 원인과 대책을 쉽게 도출하고, 동식물의 데이터로부터 신약 후보 물질을 더 쉽게 발굴하는 것을 가능케 할 기반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바이오스테이션(K-BDS)은 이러한 데이터 등록과 분석 플랫폼 구축을 위한 핵심 인프라다. 이는 미국, 유럽, 중국, 일본 등에서 운영 중인 바이오 데이터센터에 준하는 수준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현재에도 국내에서 대규모 데이터를 고속으로 등록할
02.03
지난 1월 7일, 미국 보건복지부와 농무부는 새로운 ‘식생활지침(DGA, Dietary guidelines for Americans) 2025–2030’을 발표했다.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Robert F. Kennedy Jr.) 보건복지부 장관과 브룩 롤린스(Brooke L. Rollins) 농무부 장관이 공개한 식이 지침 슬로건은 단순했다. “Eat Real Food, 진짜 음식을 먹어라.” 정부는 거꾸로 된 새로운 식품 피라미드를 내놓았다. 위쪽에는 고기와 유제품, 지방이 자리 잡았고, 곡류는 아래로 내려갔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이는 기존 ‘곡류 기저’ 피라미드와 상징적으로 결별하는 선언이었다. 새 지침의 핵심은 단백질 우선이다. 성인 하루 단백질 섭취량을 체중 1kg당 0.8g에서 1.2~1.6g으로 대폭 상향했다. 매 끼니마다 고품질 단백질을 먹으라고 권한다. 흥미로운 건 김치가 이 지침에 명시됐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서를 자세히 읽으면 고개가 갸웃
01.27
‘인공조명으로 밝아진 야간은 생태계의 탄소저장 능력을 줄인다!’ 최근 영국의 한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의 핵심 결과다. 연구팀이 유럽과 북미의 도시 외곽 지역에 대한 위성 데이터와 지상 데이터를 종합해 분석한 결과 빛 공해가 생태계 호흡을 강화해 이산화탄소 방출량을 늘린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간 빛 공해가 개별 생물종의 군집변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다수 있었지만 이처럼 탄소순환에 미치는 영향을 체계적으로 조사한 결과는 처음이다. 빛 공해란 ‘야간에 광자의 체적 농도가 자연상태에서 예상되는 값보다 증가한 상태’를 말한다. 현재 전세계 인구의 약 80%가 빛 공해에 노출되어 있고, 유럽과 미국에서 이 비율은 99%를 넘는다. 200여편의 문헌을 메타 분석한 한 연구에 의하면 지구 표면의 거의 절반 정도가 밤에 인공 빛의 영향권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도시의 건물 조명, 경관/광고 조명, 가로등이 빛 공해의 원인이라 간주되지만 이 연구에 의하면 야간 인공광의 절반 이상
01.20
해마다 겨울이면 우리 집 부엌에는 짙은 갈색 실뭉치 모양의 말린 고사리가 있었다. 외할머니가 손톱으로 일일이 끊어서 말린, 전라도 부안의 외가에서 건네 온 물건이었다. 한식날 성묘 가는 길목에서 금관악기 모양으로 구부러진 고사리 어린잎을 보면 필자도 외할머니가 그러셨듯 엄지와 검지 손톱으로 고사리순을 따곤 했다. 고사리는 양치(羊齒)식물이다. 이름의 유래인 양의 이빨을 본 적은 없으나 톱니 모양의 푸른 고사리 잎과 늦가을 마른 잎 뒤에 쭉 늘어선 고사리 포자의 섬뜩한 정렬을 뚜렷이 기억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자는 양치류를 동물의 양서류와 등치시킴으로써 물을 헤엄쳐 가야 하는 개구리와 고사리 정자의 성생활을 떠올린다. 개구리나 고사리는 물을 멀리 떠나서는 사는 일이 괴롭다. 양치류는 그늘지고 습한 곳을 골라 자신의 성세를 누리지만 인간은 그들의 조상이 한때 물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자주 잊곤 한다. 15억년 전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어떤 조류가 파도를 타고 떠돌던 남세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