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5년 뒤 뭘 먹고살지 생각해봤나

2026-06-23 13:00:03 게재

1983년 2월 8일, 삼성의 ‘반도체사업 진출’ 선언은 비장했다. ‘우리는 왜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선언문 제목부터 그랬다. “오늘을 기해 VLSI(초고밀도집적회로) 사업에 투자하기로 한다”는 선언은 그러나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됐다. 미국 인텔은 삼성을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웃었고, 일본 미쓰비시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국내 여론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반도체사업은 실패할 게 뻔하고, 그래서 삼성에 위기가 오면 취약한 국내 경제 전반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우려가 정부와 정치권, 경제계에 퍼졌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 가전제품용 고밀도집적회로(LSI)를 겨우 만들던 회사가 VLSI에 도전한 것은, 자전거 회사가 곧장 자동차 생산에 나서겠다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삼성의 반도체사업은 첫걸음부터 철벽에 부딪쳤다. 라디오용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 기술도 없던 터라 해외 기술 도입이 불가피했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개인적 친분이 두터웠던 일본 기업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도시바 히타치 NEC 등은 당시 세계 반도체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는데 모조리 퇴짜를 놨다.

국제사회 조롱과 굴욕속에 키운 반도체

천신만고 끝에 ‘B급’ 반도체회사였던 샤프로부터 회신을 얻어냈다. 산업연수생을 받아주겠다고 했지만 조건이 어이없었다. D램 생산라인 현장근로자들의 ‘시다바리(조수)’로 일을 거들 직원이라면 받아줄 수 있다고 했다.

이병철 회장은 그런데도 일류 공과대학을 졸업한 젊은 엘리트들을 선발해 파견했다. 이들이 샤프 생산라인의 ‘시다바리’로 보낸 나날은 수모와 굴욕의 연속이었다. 매일 새벽 출근해 공장 바닥과 생산기계를 깨끗이 청소하고, 작업시간이 시작되면 직원들이 시키는 조수 역할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며, 어떤 질문도 해서는 안된다는 ‘수칙’을 받아들여야 했다.

일본 생산직원들은 고졸 기능공들이었다. 그들의 작업을 삼성의 엘리트들은 어깨너머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공정처리 과정을 틈틈이 메모지에 적다가 들켜 ‘스파이질을 한다’며 곤욕을 치른 날이 부지기수였다. 이들은 매일 밤늦게 퇴근해 어렵게 메모한 내용을 서로 맞춰가며 어렴풋이나마 ‘D램 제조기술 노트’를 작성했다. 힘겹게 연수를 끝낸 사원들에게 삼성 본사는 “귀국 행 비행기를 절대로 함께 타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만에 하나 항공사고가 날 경우에 대비해서였다. 삼성전자를 ‘글로벌 시가총액 10대 기업’으로 끌어올린 반도체사업은 이렇게 처절하고 치열한 사투와 함께 시작됐다.

시계바늘을 되돌려서 1982년 2월로 돌아가 보자. 이병철 회장은 오늘의 ‘반도체 초대박’을 예견하고 있었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한가지 짐작은 가능하다. “현재에 안주해서는 미래가 없다. 필사적으로 새 사업을 발굴하고 도전하고 성공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를 결단하게 했을 것이다.

그의 뒤를 이은 이건희 회장도 재임시절 “현재보다 미래를 내다보고 기업을 경영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 생각을 하면 밤잠을 설치기 일쑤”라는 토로도 많이 했다. “5년, 10년 뒤에 무엇으로 먹고살지 생각해 봤나”는 말은 그가 주재한 사장단 회의와 임원회의의 단골 멘트였다. 그룹 신입사원을 대규모로 채용했던 직후에는 “이 젊은 친구들이 20년, 30년 뒤에도 제대로 봉급을 받을 수 있을까, 삼성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밤새 식은땀을 흘렸다. 베개 밑 호청이 땀으로 펑 젖었다”는 말도 했다.

요즘 우리나라가 반도체 발(發) 대호황을 누리면서 ‘분배’ 논란에 휩싸여 있다. ‘나눠먹자’는 열풍이 반도체를 넘어 자동차 조선 정보기술(IT) 등 전 산업으로 확산하고 있다. 노동계 대표조직인 민주노총은 다음달 15일 총파업을 예고하며 ‘분배투쟁’을 더욱 불붙이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한술 더 떠서 ‘국민 배당’까지 띄우고 있다. ‘지금 당장’이 아닌 ‘5년, 10년 뒤’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미래 투자 통해 반도체 다음을 찾아야

분명한 것은 메모리반도체 호황이 언제까지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중국 기업들이 무섭게 성장하면서 추격 속도를 높이고 있다. 미국 테크기업들은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확대로 메모리 공급 부족이 심각해지자 중국산 D램과 낸드플래시에 눈을 돌리고 있다. 삼성 등 한국 기업이 과거 일본을 밀어냈던 것 이상의 기세로 중국 기업들의 진군은 이미 시작됐다.

이런 상황에서 ‘반도체 이후’를 채워줄 새 산업은 보이지 않는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반도체 자동차 선박 통신기기 등 10대 수출품목이 20년째 거의 똑같은 순위를 지키고 있다. 삼성 현대자동차 LG SK 등 10대 기업 순위도 바뀐 게 거의 없다. 젊은 테크기업들이 혁신을 무기로 순식간에 시장 판도를 뒤집어버리기 일쑤인 미국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경제사회연구원 이사 전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