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수찬 칼럼

다보스에서 태동된 중견국가 공동전선

2026-01-27 13:00:02 게재

지난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는 두 사람의 연설이 대조되었다. 그중 한 사람,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의 연설은 가장 주목을 받았지만 사람들에게 익숙한 스타일과 내용이어서 별다른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그는 세계를 상대하는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계산적인 정치꾼으로서 국내의 당파적 지지자들을 향해 연설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연설은 주로 자화자찬 사실왜곡, 그리고 생각이 다른 상대방들에 대한 거친 비난으로 채워졌다. 예상했던 대로 덴마크 영토인 그린란드를 미국에 넘기라는 요구도 반복됐다.

그가 말한 내용 중 그래도 타당성과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 한가지는 유럽 나라들이 국방비를 더 부담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이미 유럽 나라들이 받아들여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안이다. 트럼프의 압력도 작용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유럽에서 국방분야 투자의 필요성이 커진 것도 큰 요인이다.

또 한 사람,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연설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초강대국의 힘에 기반한 이익추구 행태 때문에 규범에 기반한 세계질서가 ‘파열’된 현실을 직설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캐나다를 포함한 중견국가들이 공동전선을 구축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가자고 호소했다.

“테이블에 앉지 않으면 메뉴에 오른다”고 하며 그동안 미국에 휘둘린 중견국가들의 결속을 촉구했다. 카니 총리의 연설이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가치나 감성에 호소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용적인 대안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중견국가 결속 촉구'가 일으킨 반향

필자가 경제학자로서 논문을 많이 쓴 분야는 다자협상이론이다. 게임이론의 틀에서 다자협상을 분석하는데는 협력적 모델을 쓰기도 하고 비협력적 모델을 쓰기도 한다.

모델 분석에 의하면 협상력의 근원은 협상의 결렬에서 오는 위험부담을 감내할 수 있는 역량이다. 중견국가들이 초강대국을 상대로 결속하면 협상력이 강화된다.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초강대국이 치를 대가가 개별국가와의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크기 때문에 초강대국이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는 사업가이고 마크 카니는 경제학자다. 트럼프와 카니가 마주 앉아 일대일로 협상을 한다면 당연히 트럼프가 이길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 카니는 힘센 개별 플레이어가 이길 수 없는 시장의 법칙을 이해한다.

다보스에서 트럼프는 카니에게 완패했다. 연설에서만 패배한 게 아니라 다보스에서 진행된 국제적 그린란드 게임에서 패배했다. 다보스를 떠나기 전 트럼프는 미국이 그린란드를 획득하기 위해 무력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에서 물러섰고, 미국의 그린란드 병합에 반대하는 국가들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던 방침도 철회했다. 유럽의 중견국가들이 결속해 미국에 강력하게 반격했기 때문이다. 더 나가면 미국의 국익이 크게 손상될 상황이었다.

사업가 트럼프는 이런 상황전개를 예측하지 못했다. 경제학이나 게임이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가 아니고 국가간 합종연횡에 대한 역사공부가 짧았던 것 같다. 다보스에 있던 트럼프 참모들을 포함한 미국측 인사들은 모두 침묵으로 패배를 인정했다.

그린란드 이슈는 트럼프 대통령의 패착이다. 국내 지지층을 겨냥해 불필요한 이슈를 제기했는데 얻은 것이 없을 뿐 더러 미국의 국제적 위상에 큰 손상을 입히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내 지지층에서도 트럼프의 판단력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혹자는 ‘트럼프는 항상 겁먹고 도망간다(TACO)’는 말처럼 또 한번 트럼프가 특유의 유연성을 발휘한 것이라고 웃어 넘길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 일은 심각하다.

카니 총리의 말처럼 국제관계에서 하나의 질서가 파열됐다. 이번에 형성된 유럽 중견국가들의 연합은 일시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임기가 3년 남은 트럼프 대통령의 탈규범적 행태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나라들이 이제 새로운 질서 구축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질서형성에 대한 한국의 대응은

캐나다는 영연방 왕국이지만 유럽국가가 아닌 북미국가다. 당연히 카니가 얘기한 중견국가들의 공동전선은 유럽국가들만을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도 대상이 된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동맹국이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캐나다도 프랑스도 영국도 모두 동맹국가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처럼 모두 관세문제로 미국에 한차례 당했다.

새로운 질서형성에 대한 한국의 대응은 무엇인가. 한국의 현재 국제관계 라인업은 경험이 픙부한 외교관료들이 주축이다. 연속적 상황에 대한 대응하는 데는 문제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카니의 표현을 빌면 ‘이행(transition)이 아니라 파열(rupture)’이라고 운위되는 불연속적 상황이다. 역사를 깊이 이해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전략가들이 미래를 그리고 있어야 한다.

카이스트 교수 경제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