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영국 톺아보기
그린란드 사태로 시험대 오른 영·미간의 특별한 관계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군의 수에즈 운하 침공을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한다.” 1956년 10월 31일.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격앙된 얼굴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이틀 전 영국과 프랑스군의 수에즈 운하 무력 침공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나일강에 댐을 건설하면서 미영 등 서방의 지원을 받고자했으나 거부당하자 3달 전 운하를 국유화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운하 통행료를 독점하고 있어 국유화를 해 댐 건설비용을 충당하려 했다.
두 나라는 운하를 다시 통제하려 이스라엘과 공모했다. 이스라엘이 먼저 운하 인근을 침공, 이집트 군과 교전을 벌였고 영국과 프랑스가 양 측에 철군을 요구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철군을 거부당하자 개입 불가피를 내세우며 영·프군이 투입됐다. 미국은 영프에 즉각 휴전과 철군을 압박하며 2차대전 때 구매한 영국 국채를 대규모 매각하겠다고 위협했다. 경제위기에 몰린 영국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이 사건으로 영국은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외교정책의 최우선으로 두고 지난 70년 간 실행해왔다. 그런데 트럼프 집권 2기 이런 관계가 시험대에 올랐다. 영국은 유럽과 안보협력을, 중국과는 통상관계를 강화하며 어려움을 헤쳐 나간다.
그린란드 사태에 딜레마 빠진 노동당 정부
2차대전의 승전국으로 자부심이 강했던 영국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소가 주도하는 국제무대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활동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수에즈 운하 개입이 이런 자부심을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미국의 강력한 압박으로 운하에서 철군해 국제사회에서 망신을 당한 영국은 이 때부터 중요 외교정책을 사전에 조율하고 미국을 대외적으로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공개적인 미국 비판을 최대한 자제하고 양자 회담에서 실익을 극대화하는 게 지금까지 영국의 대미 외교 방식이다.
영국은 이처럼 미국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 1962년 핵추진 전력잠수함의 발사체 기술을 미국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미국이 지금까지 핵발사체 기술을 제공해준 나라는 영국이 유일하다. 하지만 특별한 관계도 시기에 따라 부침이 있었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마가렛 대처 총리는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로 호흡이 척척 잘 맞았다. 그런데도 레이건 행정부는 1983년 10월 영연방 국가인 카리브해의 그레나다를 침공해 공산정권을 전복시켰다.
대처는 가장 긴밀한 맹방이 영국의 주권을 침해했다고 봤고 영연방국가의 수반인 자신에게 일언반구의 사전 통지도 없었다며 크게 실망했다. 사후 전화 통화에서 대처는 ‘친구의 귓등을 후려 갈겼다’고 말할 정도로 관계가 냉량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 조차 트럼프 집권 2기의 특별한 관계가 처한 상황과 비교할 수가 없다.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성과 약탈적 정책이 이 관계를 시험대에 올렸다.
미 대통령은 지난달 9일 그린란드를 소유하겠다는 입장을 재천명하며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덴마크는 나토 회원국이고 그린란드는 덴마크 영토이다. 나토를 이끌고 있는 미국이 회원국 영토를 강제라도 합병하겠다고 나선 것. 독일과 프랑스, 핀란드, 영국, 노르웨이 등 8개 나라가 이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러자 트럼프는 곧바로 8개 국에 25% 관세 부과를 위협했다. 비록 지난달 말 다보스 포럼에서 트럼프가 무력 사용을 배제했지만 그린란드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수에즈 위기 후 최악의 특별한 관계”
지난달 내내 영국의 ‘데일리 메일’과 ‘데일리 텔리그래프’와 같은 보수지는 1956년 수에즈 위기 이후로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가 최악이라며 집권 노동당 비판에 열을 올렸다. 노동당은 인정했지만 정부 잘못 때문이 아님을 강조했다. 집권당은 트럼프 취임 후 특별한 관계에 중점을 둬 거둔 성과를 제시했다.
2024년 7월 4일 하원 의석의 2/3에 육박하는 의석 차이로 14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한 노동당은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 트럼프와 접촉했다. 그 해 9월 중순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 때 미국을 방문한 키어 스타머 총리 일행은 트럼프 및 그의 측근들과 만났다. 특히 당시 외무장관이던 데이비드 라미도 동행했다. 그는 야당 의원 시절에 트럼프를 인종주의자라고 비판했는데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사과했다. 스타머 총리는 트럼프 당선 시 정부 차원에서 긴밀한 협력을 약속했다.
트럼프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표해서 영국의 국익을 극대화하려했다. 트럼프는 지난해 9월 중순 2박 3일의 일정으로 영국을 국빈 방문했다. 2019년 6월 집권 1기 때에 이어 두 번째 국빈 방문이다. 1990년대 민주당의 빌 클린턴도 재선했지만 1번만 국빈 방문을 했을 정도로 국빈 방문 2회는 극이 이례적이다.
영국인들의 15-18%만이 트럼프를 지지한다. 특히 노동당 의원이나 당원들이 미 대통령을 몹시 싫어하지만 지도부는 국가를 위해서 그의 정책을 드러내놓고 비판하지 않았다. 이런 관계 관리 덕에 영국은 트럼프가 부과한 관세를 10%로 내려 EU의 15%보다 더 나은 협상을 타결했다.
그런데 지난달 초 트럼프가 마두로를 강제 납치해 미국으로 데려왔을 때 영국 여론은 들끓었다.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기 때문에 총리에게 강력한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스타머는 “국제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짤막한 성명서 발표에 그쳤다.
하지만 그린란드를 침략해서라도 소유하겠다는 트럼프의 압박은 도를 넘었다. 지난달 21일 총리는 하원에서 “자신의 강제 합병 요구를 지지하지 않는 유럽의 8개 국가에 25% 관세 부과 위협은 아주 잘못된 결정이다”라며 “관세라는 압박 수단을 사용해 나토 회원국들을 강요하는 것은 집단방어를 훼손한다. 영국은 무역전쟁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EU와 안보협력, 중국과 통상관계 강화
트럼프 집권 2기는 영국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 딜레마를 안겨준다. 스스로 구축한 자유무역질서를 훼손하고 동맹국에 제공했던 안보도 가격을 다시 매겨 이전보다 최소 3-4배 더 많은 보장비 지불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강압적인 정책 앞에서 각 국은 경제를 지속적으로 성장시키고 첨단기술을 개발해 스스로의 역량을 강화하고(자강), 동맹관계도 유지하면서 정책 선호도가 비슷한 국가나 지역블록과 연대를 강화하는 생존책을 강구중이다. 영국도 특별한 관계를 최대한 유지하려 하면서 이런 정책을 시행중이다.
미국이 주도중인 우크라이나 휴전 협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영국과 독일, 프랑스는 전후 우크라이나 안전보장 논의를 이끌어왔다. 세 나라의 안보 보좌관들이 긴밀하게 협력해 유럽의 입장을 조율하고 전후 휴전을 감시할 재보장군(안전보장군)의 구성과 운영방식 등도 논의해왔다.
오는 6월 23일은 영국 유권자들이 국민투표에서 EU탈퇴(브렉시트)를 결정한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그런데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안전보장자 역할을 하던 미국이 역할을 차차 줄이면서 EU 회원국 간의 안보협력이 더 강화되고 있다. 프랑스와 함께 핵무기를 보유한 영국은 여기에 적극 참여해 핵무기의 유럽안보 강화 기여책도 논의하는 등 브렉시트 후 소원해졌던 관계도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또 하나는 중국과의 경제협력 강화다. 스타머 총리는 지난달 29일부터 3일간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이 순방에는 HSBC와 롤스로이스 등 영국의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 50여 명이 동행했다. 8년 만에 영국 총리가 중국을 방문했다. 거대한 중국시장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지속되는 관세 압박에 대응해 시장 다변화와 함께 기존 중국 시장도 확대 진출을 모색중이다. 영국은 어려움 속에서도 자강과 동맹, 연대를 세 가지 축으로 국익 유지와 확대에 집중한다.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