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한-필리핀 새 지평, K-이니셔티브로 동남아를 잡아라
지난해 10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장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필리핀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마주 앉았다. 두 정상은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고 국방·경제·디지털협력을 한단계 끌어올리기로 했다. 원전 재개 타당성 조사, 방산 수출, 핵심 광물 공급망 구축 등을 통해 실질적 경제협력을 도모했다. 이번 이 대통령의 필리핀 방문은 1949년 수교 이후 축적해 온 신뢰를 제도적 틀로 한 단계 끌어올려 양국 관계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
양국 간에는 안보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협력관계를 더욱 발전시킬 여지가 많다. 특히 역내 안보환경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해양 안보 역량 강화와 군 현대화 협력은 양국 모두에게 전략적 가치가 크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아시아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전투병력을 파병한 필리핀은 FA-50 경공격기 12대, 호위함 2척, 초계함 2척, 원해경비함 6척을 잇달아 구매하는 등 지난 10년간 약 30억달러 상당의 K-방산 제품을 도입해 동남아시아 최대 협력국이 되었다. 지난해에는 약 1조원 규모의 FA-50 12대와 약 8500억원 규모의 해군 호위함 2척을 추가 도입하기로 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올 2월 필리핀 국방부와 2028년까지 약 1014억원 규모의 FA-50 성과기반 군수지원 계약을 체결했다. 양국은 기존 방산협력을 토대로 기술 이전·정비(MRO)·교육 훈련 분야까지 협력 범위를 넓히고 있다.
K-방산 10년, 동남아 최대 협력국 우뚝
양국 간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경제협력의 외연도 넓어졌다. 한국 기업의 도로·철도·항만 등 인프라 사업 참여가 확대돼 필리핀의 성장 잠재력 제고와 한국 기업의 신흥시장 진출이라는 ‘상호이익’ 효과가 이루어지고 있다.
삼성전기는 급증하는 인공지능(AI)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약 1조4000억원 규모의 대규모 증설투자를 통해 필리핀 라구나주 칼람바에 있는 제3공장 건설을 추진 중이다. 이 공장이 완성되면 약 3000명을 추가 고용할 예정이다. 앞으로 전기차 배터리 스마트시티 전자정부 등 한국이 강점을 지닌 분야는 필리핀의 산업 고도화와 맞물려 시너지를 낼 가능성이 크다.
에너지와 기후대응에서도 협력의 문이 열렸다. 필리핀의 전력 수요 증가와 에너지 안보 과제를 고려할 때 재생에너지·액화천연가스(LNG)·원전 분야 협력은 중장기적으로 중요한 축이 될 수 있다. 특히 바탄 원자력발전소의 활용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양국이 에너지 전환의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필리핀 내 한류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지난 2월 중순 아테네오 데 마닐라대학에서 한류와 K-이니셔티브에 대해 특강을 했는데 100여명의 학생이 참석할 정도로 한류에 관한 관심이 뜨거웠다. 앞으로 필리핀 내 한류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K-팝 드라마 등 한류 콘텐츠를 넘어 전통문화 문학 웹툰 등으로 교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또한 한국 콘텐츠(K-콘텐츠) 호감도가 높은 필리핀 시장의 특성을 활용하되 ‘K-웨이브(한국-필리핀 청년 문화외교)’와 같은 쌍방향 소통 채널을 통해 상호문화를 이해하는 교류가 증진되도록 지원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인적교류와 사람 중심의 협력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내 필리핀 근로자와 다문화가정, 그리고 필리핀 이주역사 100년을 맞은 필리핀 내 한국 교민사회는 이미 양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왔다. 교육·보건·직업훈련 등 개발 협력을 확대하고 인적교류를 촉진하는 것은 관계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토대다.
문화에서 사람으로, 생활밀착형 협력이 관건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정부 간 합의에 머무르지 않고 시민의 삶 속에서 체감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생활 밀착형 협력’이 병행돼야 한다. 청년·스타트업·디지털 분야 교류를 제도화할 때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실질적 성과로 이어질 것이다.
이를 위해 필리핀 관광객에 대한 비자를 한시적이라도 면제하고 우수한 필리핀 노동인력 유입을 확대하며 장기적인 친한 인사 확보를 위해 대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수여도 늘려야 한다.
이재명정부의 K-이니셔티브는 한국의 발전 경험과 기술력을 필리핀의 국가 발전 목표에 결합하는 포괄적 국가 전략으로 작용할 것이다. 올해 아세안(ASEAN) 의장국이며 동남아시아의 관문인 필리핀과의 협력과 연대는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축이 될 수 있다.
수교 77년, 한국과 필리핀은 이제 ‘우방’을 넘어 실질적 파트너로 진화하고 있다. 정상회담의 온기가 외교문서에만 머물지 않고 두 나라 시민의 일상에까지 스며들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