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반미 이념 하나로 버텼던 마두로, 왜 자멸했나

2026-03-06 13:00:02 게재

2004년 중반부터 2008년 초까지 베네수엘라 대사를 역임한 필자에게 올해 벽두에 전해진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체포 소식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재임 시절 여러 차례 만났던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국정을 책임졌던 지도자가 국제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할 경우 자신의 파멸은 물론 국가의 운명까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 위기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은 아니다. 미국은 2000년대 들어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반미 사회주의 노선을 강화하자 베네수엘라를 반미진영의 핵심 국가로 지목했다. 마두로 집권기에는 선거부정과 인권탄압 문제가 불거지며 정치·경제적 압박이 본격화했다.

야권이 장악한 국회의 의장 과이도와 행정부 수반 마두로는 권력 정당성을 두고 정면충돌했다. 2019년 1월 과이도가 자신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언하자 미국은 이를 공식 인정하고 마두로정권을 겨냥해 국영석유회사(PDVSA) 등에 대한 강력한 경제·금융 제재를 단행했다. 베네수엘라 경제의 숨통을 조인 것이다.

트럼프2기 행정부는 마두로정권을 불법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최대 압박’ 정책을 통해 정권 붕괴를 유도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국가안보전략(NSS)은 베네수엘라를 민주주의 파괴 정권이자 러시아·이란·중국과 연계된 반미 거점, 마약·불법 금융·난민 문제의 중심지로 규정하며 ‘서반구 전략 위협국’으로 묘사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마두로의 형사 책임을 암시하는 경고성 발언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두로는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정권 결속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군부의 충성서약을 강화하고 반정부인사를 대거 체포하는 등 내부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반미선전에 집중했다.

중국도 러시아도 결국 마두로 버렸다

결국 미국은 올해 초 특수부대를 투입해 마약 테러 혐의로 기소된 마두로 대통령을 전격 생포했다. 물론 체포 과정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란과 미국의 일방적 행동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같은 결말에는 마두로의 외교적 선택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미국의 압박을 완화할 협상통로를 넓히기보다는 대결구도를 고착시키는 길을 택했다.

마두로 정권은 대미외교를 사실상 단절했다. 국내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이념적 대립을 외교의 중심에 두었고 그 결과 경제와 민생은 큰 타격을 입었다. 제재가 강화되면서 국제 금융 조달은 막혔고 석유 생산 감소와 수입 차질이 겹치며 생활필수품 부족이 심화됐다. 초인플레이션과 생필품 부족은 일상이 되었고 수백만명이 국외로 떠나는 난민사태로 이어졌다. 반미 강경 발언은 내부 결속에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제재완화나 출구 협상의 공간을 스스로 닫았다.

마두로는 중국·러시아·이란과의 관계를 통해 미국의 압박을 상쇄하려 했지만 이들 국가와의 협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중국은 경제적 실익을 우선시했고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지자 투자와 금융지원을 축소했다. 러시아 역시 지정학적 이해에 따른 제한적 지원에 머물렀을 뿐 베네수엘라 경제를 근본적으로 회복시킬 수준의 지원은 하지 못했다. ‘편향외교’와 ‘이념외교’에 집중하고 힘의 균형이라는 국제정치의 기본원칙을 간과한 결과였다.

외교는 위기를 관리하는 안전판이다. 갈등을 증폭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충격을 완화하고 협상의 공간을 확보하는 장치다. 이념을 앞세워 외교를 국내 정치의 연장선으로 활용할 경우 단기적 결속은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 국익은 훼손된다.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였던 마두로의 강경노선이 결국 자신의 체포로 이어졌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이념이 외교를 삼킬 때, 국가가 무너져

이 사건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국 외교의 기본축은 한미동맹을 토대로 하되, 주변국과의 협력 관계도 현실적으로 관리하는 데 있다. 경제·안보 환경이 복잡해질수록 외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생존의 핵심 수단이 된다. 특정 진영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나 감정적 대립은 선택지를 줄이고 위기대응 능력을 약화시킨다.

베네수엘라 사례는 먼 나라의 비극이 아니다.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외교의 균형감각을 잃을 때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를 보여주는 경고다.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지키는 길은 이념적 구호가 아니라, 냉철한 현실 인식과 유연한 외교전략 위에 있다.

신숭철 한·중남미협회 명예회장 전 베네수엘라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