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의 동남아산책
‘호전과 폭력’ ‘저항과 평화’ 두 얼굴의 미얀마 역사
필자가 미얀마(버마)를 처음 방문한 것은 1997년 1월로 이미 30년이 지났지만 그때 받았던 강렬한 인상과 충격은 아직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정전이 되어 촛불을 켜 놓고 출입국 관리를 하던 공항을 나서자마자 맞닥뜨린 수도 양곤의 풍경은 사진 속에서 보았던 식민지 시대 랑군의 모습과 흡사했다. 영국 식민지풍의 건물이 늘어선 거리를 론지라고 불리는 치마를 입은 남녀들이 평화롭게 걸어 다니는 모습은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즈음 미얀마 대사관에 근무했던 한 외교관은 '시간이 멈춘 땅 미얀마'라는 책을 썼는데 그 제목처럼 시간이 멈춰 서 있는 듯했다.
그런데 정작 그 거리의 첫인상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그리고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남아 최고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버간 만달레이 인레 호수의 그 기막힌 풍광들보다도 더 큰 감동을 준 것은 바로 미얀마 사람들이었다. 물론 우리가 흔히 심성 인성 국민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객관화와 일반화가 어렵다. 개념적 오류의 위험성을 감수한다면 미얀마인들만큼 맑고 선한 심성과 남에게 베풀고 배려하기를 좋아하는 인성을 가진 국민은 없을 것이라고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
온화한 국민과 폭력국가라는 역설
미얀마의 사람 자연 문화유산을 수식하는 ‘온화한’ ‘손때 묻지 않은’ ‘미소 짓는’ ‘평온한’ ‘독실한’ ‘환대하는’ ‘매혹적인’ ‘장엄한’ 등 수많은 단어들 속에 담겨 있는 가치는 순수 신앙심 자비 평화 파고다와 같은 다분히 불교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어떻게 군사 독재와 내전 같은 험하고 잔인한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미얀마가 주는 정반대의 이미지는 호전성과 폭력이다. 16~18세기 동남아 최대 군사 강국이었던 미얀마의 따웅우 왕조와 꼰바웅 왕조에 의해 침공과 정복을 당하기를 반복하다가 속국으로 전락한 뒤 1767년 급기야는 수도가 함락되어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되는 아유타야 왕국의 종말을 보면 미얀마인들에 대한 태국인들의 증오심과 적대감은 우리의 반일감정조차 비할 바가 아닐 듯하다.
미얀마의 호전적 이미지가 두 왕조의 막강한 군사력과 두 ‘정복왕’ 바인나웅(재위 1550~1581)과 알라웅파야(재위 1752~1760)의 화려한 전승기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동남아 역사학자들이 공히 인정하는 동남아가 가장 번성한 시기인 근세(초기 근대)에 군사력으로 다른 동남아 국가들을 압도하고 서구 식민주의 세력과 대적했으니 그런 명성을 얻을 만도 했다.
그러나 미얀마의 이미지가 역사적인 군사 강국에서 현대에 와서 군국주의 국가와 호전적인 국민으로 둔갑한 것은 독립 직후 10여 년을 제외하고 줄곧 미얀마의 현대 정치를 지배한 군부와 군사 정권의 의도적인 역사 재구성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미얀마 군사정권은 다수 종족 바마족이 다른 종족을 물리치거나 복속시킨 뒤 통일 국가를 세운 세 왕국의 시조들을 최고의 역사적 영웅으로 올려놓았다. 최초의 바마족 통일 국가 버간 왕국을 세운 아노라타 왕(재위 1044~1077)을 필두로 따웅우 왕조를 창건한 바인나웅 왕, 꼰바웅 왕조의 시조 알라웅파야 왕을 미얀마의 3대 군주로 치켜세웠다. 무엇보다도 이 세 왕의 군사적 치적만을 주로 부각시켜 ‘3대 정복왕’이라 부르고 전국 곳곳에 동상을 세웠다.
가장 큰 동상은 매년 3월 27일 최대 규모로 진행되는 정부 행사인 ‘국군의 날’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열병식장에 세워져 있는데 모두 칼을 차고 장갑을 낀 장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세 사람의 형상은 하나의 세트를 이루어 국방대학교 군사박물관 지역 군사령부 등 전국 곳곳에 동상 초상화 조각 등의 형태로 설치 또는 전시되어 있다.
이들 세 영웅을 표상하는 조형물 옆에는 현 군부 지도부 장군들의 형상도 함께 설치되어 있는 경우도 흔하다. 아웅산 장군도 독립 영웅, 건국 지도자 이미지보다 장군으로 비쳐지도록 군복을 입은 모습만 보여준다.
권위주의 집단 넘어 이질화 된 군부
이렇듯 역사를 조작하는 것 외에도 군부와 관련된 장소들을 건국 시조들과 연결시켜 성역화하고 군부를 신비화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 미얀마 군부는 ‘왕실의 성스러운 군대’라는 뜻을 가진 땃마도(Tatmadaw)라는 고유명사로 자기네 군대를 부르게 해 다른 나라의 군대와 달리 신성한 의무를 지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포장한다.
직업 군인과 군인 가족들은 민간인들과 분리된 지역에 거주하면서 자기들만의 생활을 영위하고, 자녀들은 군 전용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일반 국민들과 다른 특권계층을 넘어 세습적 신분 계급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과거 전통 왕국에서 왕을 호위하는 대가로 토지를 제공받고 세금을 면제받은 세습적 전사집단 아무단을 본뜬 것이다. 이제 미얀마 군부는 단순한 권위주의적 집권 세력의 수준을 넘어 이질적이고 특수한 사회 집단이 되고 말았다.
군부의 역사관 속에 우뚝 서 있는 영웅은 11세기 중엽 버간 왕국을 창건한 아노라타 왕이다. 물론 아노라타 왕은 미얀마 국민들도 인정하는 건국영웅이라는 역사적 평가에는 반론의 여지가 크지 않다. 미얀마 역사상 처음으로 이라와디강 유역의 여러 소수 민족 국가와 다양한 형태의 정치 체계를 바마족이 중심이 되는 하나의 국가로 군사적 통일을 이룬 것은 물론이고 버간 왕국을 문자, 국가 철학(왕권 개념), 종교체계, 교육 기관의 역할을 한 수천개의 사원을 갖춘 고도의 문명국가로 발돋움하게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치적을 아노라타 왕 개인의 공적으로 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시 써야 할 미얀마 문민 역사
미얀마는 전 역사를 통해 심지어 군부가 득세하고 만행을 부린 현대사 속에서도 민간인 출신 영웅들의 공헌과 활약이 빛났다. 아노라타 왕의 종교적 스승이자 정치적 고문 역할을 했던 승려 신 아라한(Shin Arahan)은 왕을 설득해 그 이전 주술적이고 타락했던 아리교를 금지하고 몬족 타톤 왕국으로부터 상좌부 불교를 도입해 국교로 삼았다.
신 아라한은 국왕에게 전륜성왕, 즉 반신왕의 개념을 부여해 불법을 수호하는 왕으로서 정통성과 책임감을 동시에 갖게 했다. 버간은 곧 ‘고전 국가’의 대표적인 모범이자 동남아 불교의 최고 중심지가 되었다. 버마어 문자 체계를 확립해 수준 높은 철학적 논쟁을 기록하고, 사찰의 교육기능을 이용해 백성들에게 문자를 가르쳤다. 버간 왕국의 문해율은 당시 세계 최고에 달했다고 한다.
신 아라한이 미얀마의 문민역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해 근현대까지 미쳤다. 불교가 중심이 된 교육·문화·정치운동은 미얀마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워 독립을 쟁취하고 군부독재에 끈질기게 맞서는 지식인들과 승려들의 인권투쟁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얀마인들의 정신 속에 뿌리내린 비폭력 저항과 평화주의는 비동맹운동을 창시하고 독자적 평화의 길을 외친 우 누 초대 총리, 쿠바 위기 시 핵전쟁 방지에 앞장선 우 탄트 제3대 유엔 사무총장,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아웅산 수치 여사와 같은 세계적 인물들을 낳았다.
신 아라한과 더불어 역사적 전성기인 14~18세기에 활약한 수많은 ‘현명한 재상들’, 16세기 버마어 문학을 통해 문화 공동체의 기틀을 마련한 여류 시인 야웨 신 탓, 농민 항쟁을 통해 민중 서사를 만든 사야 산, 식민 말기 민족주의 운동에 앞장섰던 불교청년회(YMBA), 군사독재 치하의 감옥에서도 진실을 기록했던 언론인 루두 우 흘라, 대학생들의 8888 민주화 항쟁과 2007년 승려들의 ‘사프란 혁명’, 그리고 2021년 쿠데타에 대항한 Z세대의 시민불복 운동(CDM)에 이르기까지 미얀마의 역사는 문민 중심으로 다시 쓰여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