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정용헌 전 아주대 국제대학원 교수
“지금은 시작…더 큰 에너지 충격 온다”
실물 공급 부족이 가져올 '통제 불능’의 시대 … 미국 에너지패권 강화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 베네수엘라 정권교체 등 중동과 남미를 둘러싼 지정학적 격변이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정용헌 전 아주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23일 내일신문과 인터뷰에서 “현재 유가는 역사적으로 보면 아직 위기 국면이라고 보기 어렵다”면서도 “앞으로는 훨씬 큰 충격이 올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배경으로 △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장기간의 수송봉쇄에 따른 물류차질 △원상 복귀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에너지 인프라의 파괴를 꼽았다.
◆중질유와 LNG 확보 경쟁 치열해질 듯 = 정 전 교수는 먼저 현재 국제유가 수준에 대한 시장의 잘못된 인식을 경계했다. 명목가격 기준으로는 배럴당 100달러 수준(브렌트유)이 2008년 최고가에 근접해 보이지만 2000년 불변가격 기준으로 보면 상황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2008년 유가는 실질 기준 약 105달러 수준이었지만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현재는 약 53달러 수준”이라며 “지금의 유가는 역사적으로 보면 아직 감내 가능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가격이 오르는 것뿐 아니라 ‘실물 공급’ 자체가 부족해지거나 끊기는 상황에서 발생한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문제는 ‘현재’가 아니라 ‘앞으로’다. 정 교수는 에너지 시장이 구조적으로 더 큰 충격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특히 그는 에너지 시장을 위기로 몰아갈 수 있는 두 가지 핵심 위험 요인을 강조했다.
첫번째는 중질유 확보 경쟁이다. 미국은 셰일혁명으로 경질유 생산이 급증했지만 정유설비는 여전히 중질유 처리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때문에 베네수엘라와 같은 중질유 공급원 확보가 전략적 과제로 떠올랐다.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개입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축출되며 정권교체가 진행 중인 것은 이러한 현실과 무관치 않다.
향후 글로벌 시장에서 물류의 핵심 연료인 디젤과 항공유 및 석유화학의 주원료인 나프타 생산의 원료인 중질유를 둘러싼 경쟁이 급격히 심화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두번째는 천연가스, 특히 액화천연가스(LNG) 시장의 구조적 불안이다. 이란(세계 2위)과 베네수엘라(세계 7위)는 막대한 천연가스 매장량을 보유했만 제재와 인프라 부족으로 LNG 시장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그 공백을 빠르게 메우며 LNG 수출을 확대하고 있으며, 이는 글로벌 가스 패권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베네수엘라·이란 사태 본질은 미국의 ‘신에너지 독트린’ = 정 교수는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는 미국의 ‘신에너지 독트린’이 자리잡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 교수는 이를 ‘능동적 주권’(Active Sovereignty) 전략으로 규정하며, 기존 에너지 자립 개념을 넘어선 공세적 패권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에너지를 단순한 경제 자원이 아니라 국가안보 자산으로 규정하고, 해외 자원까지 직접 통제하려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있다. 실제로 에너지부(DOE)를 중심으로 한 전력사·정보기관 통합 작전 체계 구축, 해외 자원 확보를 위한 적극적 개입 등이 추진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베네수엘라와 이란은 단순한 산유국을 넘어 전략적 타깃으로 부상했다. 베네수엘라는 미국 정유산업에 필수적인 중질유 공급원이며, 이란은 세계 2위 수준의 가스 매장량을 보유한 잠재적 경쟁자다. 따라서 미래패권 위협을 사전 제거하려는 의도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정 교수는 “이란과 베네수엘라 사태는 단순 지역분쟁이 아니라 미국의 에너지 패권 강화와 직결된 문제”라며 “중국이 두 국가의 원유와 가스를 수입해온 구조 속에서 이는 곧 중국 견제를 위한 지정학적 포석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에너지 가격의 향후 흐름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그는 에너지 위기를 네 단계로 구분했다. 초기에는 금융시장 불안에 따른 가격 급등이 나타나고, 이후 물류 차질이 발생하며, 이어 실물 공급 부족 단계로 진입한다. 마지막 단계는 수요 파괴다. 이 중 “실물 부족 단계에 들어가면 가격은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상승한다”며 “이 시점이 진짜 위기”라고 강조했다.
과거 사례도 같은 패턴을 보였다. 2008년 금융위기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에도 초기 충격 이후 몇 달이 지나면서 오히려 가격이 더 급등했다. 러-우 전쟁 당시 침공 직후엔 심리적 불안으로 가격이 상승했으나 수일 만에 하락했고. 오히려 3~4개월 뒤 서방 제재와 러시아의 공급 감축이 이뤄지며 물리적 수급 불균형이 정점에 달했다. 여기에 유럽의 LNG 확보 경쟁과 팬데믹 이후 수요 회복이 맞물리며 가격이 급등한 후 고공행진을 지속했다.
정 교수는 “전쟁 초기에 가격이 뛰었다가 잠시 안정되는 것은 착시일 뿐이며, 실제 정점은 공급망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3~4개월 이후에 나타난다”고 우려했다.
◆‘깨끗한 에너지’ 만큼 중요한 건 ‘끊기지 않은 에너지’ = 이러한 구조를 고려할 때 향후 유가는 현재 수준을 훨씬 상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2008년과 동일한 수준의 충격이 온다면 유가가 200달러를 넘는 일은 시간문제”로 전망했다.
결국 이번 에너지 위기는 가격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패권 경쟁의 결과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미국은 LNG와 원유 수출을 기반으로 글로벌 공급 공백을 메우며 에너지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고, 이는 향후 국제 질서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정 교수는 한국에 대한 정책적 시사점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한국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만큼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며 “석탄 활용의 전략적 재검토, 에너지 절약 강화, 공급 다변화 등 현실적인 에너지 안보 전략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정학적 위기 상황에서 ‘깨끗한 에너지’만큼 중요한 것은 ‘끊기지 않은 에너지’라며 에너지 공급 시스템의 유연성을 강조했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