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김성진 전력거래소 이사장
“산업이 전력을 찾아가도록 시장 신호 만들겠다”
전기요금·계통접속·직접PPA·RE100 등 실질적 혜택 줘야
AI 반도체 시대 맞아 지역별 가격제·실시간시장 확대 필요
"과거에는 전기가 산업을 따라갔습니다. 앞으로는 산업이 전력을 찾아가도록 시장의 신호를 만들겠습니다."
15일 나주혁신도시에서 만난 김성진 전력거래소 이사장은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우리나라 전력시장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예고했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등 대규모 전력소비 산업이 급속히 확대되는 상황에서 기존의 전국 단일가격과 발전설비 중심 계획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지역별 가격제와 실시간시장, 유연성 자원 보상체계를 갖춘 새로운 전력시장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안정적인 전력공급이 국가경쟁력 좌우” = 김 이사장은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산업 확대를 우리 전력시장이 가장 시급하게 대응해야 할 과제로 꼽았다.
그는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는 단순히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산업이 아니라 24시간 단 한순간의 정전도 허용되지 않는 고품질 전력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이어 "데이터센터 가동 패턴과 전기차 충전 수요 등으로 전력수요 자체도 과거처럼 일정하지 않아 기존 하루 전 계획과 전국 단일가격 체계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앞으로의 전력시장은 전기를 얼마나 생산했는가보다 언제, 어디서,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 이사장은 "실시간시장은 급변하는 전력수급을 짧은 주기로 반영하고, 지역별 가격은 전력망 병목현상과 입지 신호를 시장에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용량시장 역시 단순히 설비를 보유했다는 이유가 아니라 필요한 순간 실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상하는 방향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발전량 중심의 시장을 안정성·유연성·속도를 중시하는 시장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발전소보다 송전망이 더 중요한 시대 = 최근 동해안과 호남지역에서 반복되는 발전제약 문제와 관련해서는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등 미래 국가 경쟁력의 핵심 산업을 안정적인 전력 공급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동해안과 호남의 발전제약은 단순한 설비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비용"이라며 "전력거래소는 지역별 병목현상과 출력제어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필요한 송전망 보강 시점과 규모를 제시하겠다"고 덧붙였다.
단기적으로는 재급전과 ESS, 수요자원, 계통안정화 설비 등을 적극 활용해 송전제약을 최소화하고, 중장기적으로는 발전계획과 송전망 계획을 별도로 추진하는 현재 방식도 개선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송전망 건설 지연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주민수용성 문제와 관련해서는 "정보를 조기에 공개하고 보상과 지역 편익을 실질화해 전력망을 적기에 건설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만드는 데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기업은 수익이 되면 온다" = 김 이사장은 지역별 차등요금제와 분산형 전력시스템 도입 필요성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지산지소의 핵심은 전기를 멀리 보내는 비용을 줄이고 생산한 지역에서 산업과 일자리다"고 말했다. 전력거래소는 제도 설계와 모의운영을 고도화해 단계적으로 도입할 계획이다. 특히 산업 입지와 전력시장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이사장은 "기업은 돈을 벌 수 있는 조건이 있으면 오지 말라고 해도 온다"고 말했다. 이어 "발전이 풍부하고 전력망 부담이 적은 지역에는 전기요금과 계통접속, 직접 전력구매계약(PPA), RE100(재생에너지 100%) 전력, 마이크로그리드, 가상발전소(VPP) 등에서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에는 전기가 산업을 따라갔다면 앞으로는 산업이 전력을 찾아가도록 시장의 신호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유연성 자원이 제대로 보상받는 시장 만들 것” =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계통 안정성 확보 방안도 제시했다.
김 이사장은 "태양광은 구름이나 일몰에 따라 짧은 시간 안에 출력이 크게 변하기 때문에 기존 발전기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렵다"며 "ESS와 양수발전, 수요반응(DR), 전기차 등 유연성 자원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제주에서 시범 운영 중인 제도를 육지로 확대하고, AI 기반 구름 추적과 초단기 발전량 예측, 실시간시장, 예비력 및 보조서비스 시장을 활용해 필요한 자원을 신속히 투입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또 "예비력과 보조서비스가 전력망 안정성에 기여하는 가치만큼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가격 메커니즘도 유연하게 개선하겠다"고 말했다.
◆12차 전기본, 전력망·ESS까지 함께 설계해야 = 중장기 전원믹스와 관련해서는 “특정 전원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안정성과 경제성, 탄소중립, 에너지안보를 모두 만족시키는 최적의 조합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김 이사장은 “원전은 안정적인 무탄소 전원으로, 재생에너지는 에너지전환의 중심으로 활용하고, LNG와 양수발전, ESS는 재생에너지 변동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력거래소는 특정 전원을 선택하는 기관이 아니라 수요 전망과 계통제약, 예비력, 탄소 영향 등을 객관적인 데이터로 분석해 정부가 실행 가능한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역할”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도 발전설비만 나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전력망과 저장장치까지 하나의 시스템으로 함께 설계되도록 돕겠다”고 밝혔다.
◆전력감독원 취지 공감하지만 성패여건은 별개 = 김 이사장은 “올 여름 폭염이 장기화될 경우 역대 최대 전력수요까지 염두에 두고 공급능력과 예비자원을 충분히 확보하는 등 비상대응체계를 가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발전기 불시고장과 태양광 출력 급감 등 복합 상황까지 매일 점검하며, 예비력과 수요자원을 단계적으로 투입하는 대응체계를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나주와 오송 관제센터의 이중 체계를 기반으로 365일 24시간 안정적인 전력공급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전했다.
전력감독원 신설 분위기와 관련해서는 "취지는 공감하지만 제도의 성패는 조직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규칙 제정과 시장감시, 실시간 시장·계통 운영 기능을 명확히 구분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법안 논의 단계부터 업무와 인력, 데이터 흐름을 점검하고 단일 보고체계와 정보공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또 “어떤 제도개편이 이뤄지더라도 전력거래소의 365일 24시간 전력망 운영과 전력시장 관리 역량은 흔들림 없이 유지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