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장 리포트

심리적 저지선 무너진 4달러 유가

2026-04-07 13:00:01 게재

중동전쟁의 여파로 일반 무연 휘발유 전미 평균가격이 2022년 이후 처음으로 갤런당 4달러 선을 돌파했다. 전쟁 시작 전 평균 가격이 2.98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기록적인 상승세다.

에너지 분석가들은 4달러라는 가격표가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결정적 심리적 저지선 역할을 해왔다고 분석한다. 유가가 이 수준에 도달하면 소비자의 행동양식이 변하기 시작한다며, 불필요한 운행을 줄이고 연비 효율이 높은 차량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는 현상을 지적했다.

30조달러 규모의 거대 경제체제인 미국이 쉽게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거대 경제 체제 역시 고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상황이 불안정해지는 임계점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물류의 핵심인 디젤 가격이 급등하면서 실물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에너지 거물들의 경고

하지만 갤런당 4달러라는 고유가는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지난 3월 말 세계 에너지 시장을 움직이는 주요 석유 및 가스 기업의 CEO들이 에너지 컨퍼런스에 모여 중동전쟁이 에너지 공급망과 세계 경제에 미칠 장기적 파급효과에 대해 매우 냉정한 경고를 보냈다.

텍사스 휴스턴에 모인 경영진들은 현재의 전쟁 상황을 진단하며 시장이 향후 닥칠 석유 및 가스 공급망 혼란의 규모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아시아와 유럽이 심각한 연료 부족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분쟁이 종료되더라도 각국이 고갈된 비축유를 다시 채우는 과정에서 유가는 한동안 고공행진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코노코필립스의 라이언 랜스 CEO는 “하루 800만~1000만 배럴에 달하는 원유와 전 세계 액화천연가스 시장의 약 20%가 사라진다면 그 파장은 가늠하기조차 힘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샌키 리서치의 폴 샌키는 “1990년 국제에너지기구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이래 1973년 이후 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처음 본다”며 특히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는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강조했다.

셰브론의 마이크 워스 CEO는 실제 석유 공급 상황이 선물시장의 지표보다 훨씬 더 타이트하다고 경고했다. 그는 현재 시장이 정확한 데이터보다는 정보 부재에 따른 막연한 인식에 휘둘리며 불안정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워스 CEO는 특히 호르무즈 해협 폐쇄라는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위기신호가 이미 전 세계 에너지 시스템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며, 이러한 위험 요소들이 현재의 석유 선물 가격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우려스럽다고 강조했다.

쿠웨이트 석유공사의 알사바 CEO는 “해협 폐쇄 여파로 걸프지역 산유국들이 유정 가동을 중단해야 했기 때문에 생산 설비를 완전히 정상화하는 데만 최소 3~4개월이 소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쟁 발발 후 한달 간은 이미 운송 중이던 물량과 각국의 전략 비축유 방출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국제에너지기구의 파티흐 비롤 사무총장은 “보수적으로 예측하더라도 오는 4월의 원유 손실 규모는 3월의 두 배에 달할 것”이라며 에너지 대란의 본격적인 시작을 예고했다.

최대 산유국 미국의 역설

트럼프 대통령은 대국민연설을 통해 중동전쟁에 대해 “가장 고통스러운 고비는 넘겼다”며 낙관론을 펼쳤다. 최근의 가파른 휘발유 가격 상승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며, 전략적 요충지인 호르무즈 해협이 재개방되면 유가는 다시 “빠른 속도로 하향 안정화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시장 곳곳에서는 이번 분쟁이 초래할 경제적 파장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만약 경제적 타격이 장기화될 경우 트럼프는 전쟁이 남긴 치명적인 정치적 과오에서 자유롭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호르무즈를 통해 석유와 가스를 거의 수입하지 않지만, 전세계 에너지 시장의 상호 연결성 때문에 해협 제한은 전세계적으로 경제적 충격을 초래한다. 이에 전문가들은 유가가 2008년 7월 금융위기 당시 기록했던 배럴당 150달러 선을 넘어설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이 세계 최대 산유국이자 주요 수출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유가는 여전히 글로벌 시장의 수요와 공급 원리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구조적인 한계가 자리 잡고 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원유는 대부분 품질이 높은 스위트 오일인 반면 정작 미국의 주요 정유 시설들은 수입산 중질유나 산성 원유를 처리하는 데 최적화되어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자국산 원유를 수출하면서도 정유에 필요한 특정 종류의 원유를 매일 수백만 배럴씩 수입해야 하며, 이렇게 생산된 연료가 미국 내 주유소로 공급되는 구조를 띠고 있다.

최근 며칠간 백악관은 가파르게 치솟는 유가를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수년간 이어온 러시아와 이란산 석유 수출 제재를 일부 완화하고, 석유 운송 방식을 제한하던 해사법까지 완화하는 등 파격적인 정책들을 내놓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조치들이 이미 갤런당 4달러 선에 도달한 주유소 가격을 실질적으로 낮추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회의적인 시각을 보낸다.

공화당의 정치적 딜레마

중간선거가 7개월 앞으로 다가오며 선거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민주당과 공화당은 하나의 핵심의제에 뜻을 같이하고 있다. 바로 주거비 보육비 식료품비 의료비 공과금, 그리고 유가에 이르기까지 ‘고물가 부담’ 문제를 어느 당이 더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민생선거’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공격 결정은 정국을 더욱 복잡한 미궁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미 이번 전쟁이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 기반을 흔들고 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특히 지난 2024년 대선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무소속, 라티노, 그리고 노동자 유권자들 사이에서 이탈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마가(MAGA )운동을 추종하는 핵심 지지층은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으나, 민주당원과 무소속 유권자 대다수는 이란 내 미군의 군사행동에 대해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심지어 우파 진영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일부 영향력 있는 MAGA 논객들과 정치인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독단적인 결정이 중도파 지지자들을 소외시키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다가오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에 재앙적인 패배를 안겨줄 것이라는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결국 현재의 유가 위기는 단순한 수치상의 상승을 넘어 미국의 경제적 구조와 정치적 리더십을 동시에 시험대 위에 올려놓았다. 백악관은 공급 확대와 제재 완화라는 카드를 꺼내 들며 민심 달래기에 나섰지만 시장 전문가들과 글로벌 에너지 리더들은 여전히 진짜 위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경고한다. 특히 물류와 식량안보, 첨단 산업 전반에 걸쳐 나타나기 시작한 병목현상은 개별 국가의 정책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다가오는 중간선거는 이러한 경제적 고통에 대한 유권자들의 냉엄한 심판대가 될 전망이다. 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할 명분마저 희미해진 지금, 정부의 호언장담대로 이번 위기가 단기적인 진통에 그칠지, 아니면 트럼프행정부의 정치적 유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재앙적 패배의 서막이 될지는 향후 몇달간의 에너지 수급 향방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갤런당 4달러라는 숫자가 단순한 유가를 넘어 미국 사회의 인내심과 경제적 회복탄력성을 측정하는 가장 위험한 척도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서민원

CA 변호사·회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