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계’에 갇힌 미국, 흔들리는 세계

2026-04-22 00:00:00 게재

동맹조차 비용청구 대상으로 전락시켜…한국도 불안정한 패권체제 속 국익 지켜야

물리학의 삼체문제(Three-Body Problem)는 세 힘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 안정된 궤도에 오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류츠신의 소설 ‘삼체’나 동명의 영상 시리즈가 이 불안정성을 모티프로 삼았다. 재앙은 이미 요동치던 체제가 마침내 자기 파국의 얼굴을 드러낼 때 찾아온다. 지금의 국제질서가 딱 그렇다.

세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본질은 미국이 설계했으나 이제는 미국 자신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불안정한 체제 그 자체에 있다. 문제는 그 체제의 핵인 미국이 이제는 도리어 그 불안정을 앞장서서 증폭시키는 존재로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5년 8월 25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행정명령에 서명할 준비를 하고 있다.배석한 이는 JD 밴스 부통령(왼쪽)과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AP=연합뉴스

미국, 규칙 설계자에서 파괴자로

한때 미국은 세계 규칙의 설계자였다. 자유무역과 자본이동의 자유, 동맹과 다자주의, 그리고 달러를 축으로 한 국제통화질서가 미국의 ‘삼체’다. 미국은 만들었고 다른 나라들의 순응을 요구했다.

지금의 미국은 자기가 만든 규칙을 흔드는 파괴자가 됐다. ‘삼체’가 서로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관세를 무기로 휘두르고, 다자주의를 우회하며, 무역규범보다 국내 정치의 분노를 앞세운다. 동맹조차 가치공유의 파트너가 아닌 비용청구의 대상으로 다루는 실정이다.국제통화기금( IMF)은 미국의 정책 전환이 미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에 충격을 준다고 경고한다.

미국의 ‘삼체’가 서로 충돌하는 이유는 셋이 서로를 지탱하는 동시에 서로를 갉아먹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달러패권을 유지하려면 세계에 달러 유동성을 계속 공급해야 하고, 그러려면 적자와 시장개방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국내 정치는 제조업 보호와 관세, 공급망 재편을 요구한다. 여기에 동맹은 안보 분담과 중국 견제의 도구로 동원된다.

결국 자유무역은 안보와 충돌하고, 달러 체제는 보호주의와 상충되며, 동맹은 경제 효율을 낮춘다. 미국이 세 개를 모두 최대치로 끌어올리려 할수록 세 힘은 서로의 기반을 허무는 쪽으로 작동한다.

미국의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면 최근 난폭한 행보의 이유가 조금은 더 선명해진다. 2025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1조1200억달러에 달했고, 일반정부 부채는 GDP의 123.9%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 수치들은 단순한 회계통계가 아니다. 미국 경제가 내부적으로는 적자와 부채에 기대고, 대외적으로는 달러 패권과 금융시장을 통해 그 부담을 완충해온 구조적 모순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미국은 아주 오래전부터 체제 유지비용을 스스로 감당하지 않았다. 문제를 세계로 수출하고 비용을 전가하며 버텨온 셈이다. 그 버팀목의 실체는 역시 달러다. 2024년 전 세계 외환보유고의 58%가 달러다. 압도적인 지배력이다. 덕분에 미국은 막대한 무역 적자를 내고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해도 세계가 달러를 필요로 하는 한 즉각적인 파멸을 피할 수 있다. 다른 나라였다면 국가 위기로 번졌을 불균형이 미국에서만 폭발하지 않는 이유다.

달러체제가 벌어준 시간 동안 미국은 구조조정 대신 비용 전가를 선택해왔다. 미국 패권의 민낯이다. 미국은 결코 모범적인 규칙 준수자가 아니라 오직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규칙을 존중하는 ‘예외국가’였을 뿐이다.

달러·동맹·무역 3자 간의 구조적 충돌

이 대목에서 경제학의 트릴레마(trilemma), 즉 ‘불가능한 삼위일체’를 떠올려야 한다. 자본이동의 자유, 환율의 안정, 독립적인 통화정책은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원칙이다. 셋 중 둘을 얻으려면 반드시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미국 질서는 지난 수십년 동안 이 셋을 모두 누리는 체제처럼 작동해 왔다. 세계에는 자본 자유화를 강요하고, 달러를 중심으로 국제 금융의 안정을 유지하려 하면서, 정작 자신은 통화정책의 자율성을 당연한 권리로 행사한다. 이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 기적이 아니라 그 모순의 대가를 타국에 떠넘겨온 결과다.

그래서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신흥국은 자본유출과 통화가치 급락을 감당해야 하고, 미국이 달러를 무기화하면 다른 나라들은 금융안정과 외교안보 사이에서 강요된 선택을 해야 한다. 미국이 관세를 높이면 공급망 전체가 흔들린다. 미국은 스스로의 내부 모순을 외부로 방출하며 생존한다. 이것이 패권의 핵심이다.

패권은 질서를 만드는 힘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자기모순의 대가를 남에게 지불하게 만드는 힘이다. 미국의 오늘을 냉정하게 봐야 하는 이유다. 지금의 미국은 자기 위기의 비용을 세계에 전가하며 연명하는 패권국이다.

세계로 전가시키는 패권의 비용

이란전쟁은 그들의 모순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미국은 중동 개입을 줄이고 중국 억제와 국내 재건에 집중하겠다고 말해왔지만 정작 분명치도 않은 이유로 전쟁을 감행했다. 전쟁 전 배럴당 70달러대였던 브렌트유는 한때 118달러까지 뛰었다.

4월 11일 미국과 이란은 종전협상에 마주 앉았지만 하루 만에 결렬되고 말았다. 호르무즈 해협은 아직도 봉쇄되어 있다. 금명간 재협상이 난망시되고 있으며 재개되더라도 타결 전망은 미지수다. 중동에서 손을 빼겠다는 미국은 오히려 에너지 동맹 군사개입의 사슬에 더 깊이 묶여버리고 말았다.

미국은 자신이 만든 삼체계 속에서 점점 괴물 같은 행위자로 변모하고 있다. ‘삼체’에서 문명이 우주의 불안정성에 오래 노출될수록 점점 냉혹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듯, 오늘의 미국도 내부의 부채구조와 패권 유지 압박, 정치적 양극화와 산업 쇠퇴의 불만 속에서 점점 공격적이고 조급해지고 있다.

규칙을 지킬 여유가 바닥날수록 미국은 규칙을 깨는 쪽으로 움직인다. 설득보다 압박, 합의보다 관세, 제도보다 예외주의가 앞서는 이유다. 괴물은 하늘에서 침입하는 것이 아니다. 흔들리는 체제의 중심부에서 자라나고 있다.

미국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일은 핵심이 아니다. 요는 지금의 미국 중심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며, 그 비용이 누구에게 전가되고 있는지 예리하게 파악하는 데 있다. 미국은 여전히 질서의 중심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질서를 가장 거칠게 뒤흔드는 행위자가 되었다는 모순이 오늘의 세계를 너무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가 당장 미국을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은 예전처럼 질서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능력도 의지도 약해졌지만, 그 자리를 대신할 통화 안보 시장질서 역시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 세계 각국은 미국의 횡포를 비판하면서도 달러를 쥐고, 미국의 보호주의에 반발하면서도 미국 시장을 포기하지 못한다. 불만은 커지는데 이탈은 어렵고 대안은 필요하지만 전환비용은 너무 크다. 그래서 지금의 세계는 미국의 약화가 곧바로 새로운 질서의 등장을 뜻하지 않는 불안정한 과도기 위에 서 있다.

미국 중심 삼체계 균열 읽고 대책 마련을

한국과 한미동맹에 대한 함의도 분명하다. 미국은 동맹을 안보공동체라기보다 비용과 역할을 더 많이 떠넘기는 장치로 보고 있다. 실제로 2026년 미국 국방전략(NDS)은 동맹의 부담분담 확대를 핵심 노선으로 내걸고, 한반도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동맹국이 자국 방어의 1차 책임을 더 크게 지도록 압박하는 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결국 한국은 ‘미국이 지켜준다’는 추상적 신뢰만으로 버틸 수 없다. 에너지 안보, 방위비, 공급망, 중국 관계를 따로 다룰 수 없는 하나의 연쇄문제로 보고 동맹의 비용을 줄이는 전략을 서둘러 세워야 한다.

미국에 매달려 안보를 사고, 달러질서에 편입되어 금융안정을 얻으면서, 동시에 대중국 의존을 줄여 산업을 지키겠다는 식의 계산은 더 이상 저절로 작동하지 않는다. 한국의 트릴레마는 우리의 실존적 현실이다. 안보 통화 공급망 산업정책은 이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문제다. 오늘의 국제질서는 더 이상 미국이 질서를 보증한다는 믿음만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미국을 숭배하거나 악마화하는 태도가 아니라 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미국 중심 삼체계의 균열을 냉정하게 읽고, 그 틈바구니에서 자율성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지 치열하게 계산하는 일뿐이다. 우리로서는 그것이 우리의 국익을 지키는 일이고 진짜 대한민국의 길로 들어서는 첫걸음이다.

이경렬

전직 외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