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황혼의 팍스 아메리카나, 한국 생존의 골든타임
요즘 국제 정치의 화두는 단연코 ‘팍스 아메리카나의 불확실한 미래’에 모아지고 있다. 작년의 세계적인 관세전쟁에 이어 새해 들어 서반구와 중동에서 연이어 공격적인 군사작전을 펴고 있는 트럼피즘이 역설적으로 미국 힘의 한계도 고스란히 노정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이란의 끈질긴 저항 앞에서 고전하면서 일방주의의 반작용으로 동맹의 결속력까지 흔들리는 현실이 워싱턴에 더욱 쓰라리게 다가오고 있다.
지난 세기, 특히 2차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팍스 아메리카나는 이대로 저무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아직 진행형이다. 중요한 지표에서 미국의 힘이 정체 또는 하락 추세에 있어 완만하지만 장기적 하강추세가 대세가 되고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루에 비유하면 현재 오후 늦은 시간에 서 있고 황혼을 향해 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태양이 언제 떨어질지는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그 답은 미국 스스로 하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운명은 외부 요인보다는 미국 내부의 요인에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커지고 있는 미국 내부의 분열과 갈등요인을 미국 국내 정치가 얼마나 조절해 나갈 수 있을지, 아니면 조절에 실패해 증폭시킬 것인지에 팍스 아메리카나의 미래가 달려 있다. 내부 갈등의 증폭과 정치 분열이 최대 변수인 것이다.
미국 우선주의, 미 국력 하락 촉진제 될 것
그러나 ‘미국 우선주의’는 미 국력의 하강 추세를 반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촉진하는 잘못된 처방이 될 것이다. 250여 년 전 미국 건국 이후 비약적 발전을 견인해온 대내적인 다양성과 대외적인 자유민주 연대의 두 기둥을 스스로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팍스 아메리카나가 얼마나 지속될지, 그 이후의 대체질서는 어떤 모습일지 예측하기는 아직 어렵다. 대체 질서의 모습은 불확실하지만 전반적으로 양극과 다극 질서가 혼재된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세계적 차원에서 미국과 중국이 경쟁하고 지역적 차원에서 역내 주요국간 경쟁 또는 세력균형이 병존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어떤 전문가는 이런 양상을 양-다극 체제(bi-multipolarity)로 부르기도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팍스 아메리카나에 비해 불안정성과 불가측성이 커지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힘은 하강국면에서 국력의 객관적 지표인 경제 국방 금융 기술 등 주요 분야에서 추격자인 중국과의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력을 제외한 국방 금융 첨단기술 분야에서 아직은 현격한 우위를 지키고 있다.
특히 미국은 국방비 지출에서 2위부터 5위까지 지출 국가의 합보다 앞선다. 또한 세계적인 투사 능력과 대규모 해외 주둔군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와 첨단 기술력을 활용해서 패권 도전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역량도 상당 부분 유효하다.
안보에서 미국에, 경제에서 대외무역에 이중으로 의존해 번영을 이루어 온 우리는 팍스 아메리카나에 기반한 자유 국제질서의 퇴조에 가장 취약한 나라이다.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지속 기간이 우리에게는 취약점을 시급히 보완해야 하는 골든타임이다. 우리에게는 골든타임을 허비할 여유가 없다.
무엇보다 우리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퇴조에 동조해서 동반 하락하지 않도록 슬기로운 탈동조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기적 취약성을 줄이고 중장기적 회복 탄력성을 키우는 두 궤도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안보 정치 경제 기술의 전 분야에서 최악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상정해서 실익을 중심에 놓고 면밀한 대비책을 촘촘히 설계해야 한다. 안보는 동맹, 정치는 민주연대, 경제와 기술은 자강을 우선순위에 놓고 위험 분산과 플랜 B까지 상정한 정책 수단의 다양한 조합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선택된 수단의 조합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그래야 정부의 교체와 관계없이 긴 안목으로 추진해 나가고 이에 기초해서 단단한 산·관·학 협력 체계도 구축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선택된 수단을 가치에 기반한 대의로 포장해서 대외적 공신력을 확보해야 한다.
동반하락 않도록 탈동조화 역량 키워야
남아 있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골든타임은 우리에게 위기이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거에도 위기 앞에서 굴하지 않고 견뎌내고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반전시켜 온 역전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골든타임의 활용에 성공한다면 팍스 아메리카나의 황혼기에 올 위험을 줄이면서 그 이후 새로운 질서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경희대 미래문명원장
전 유엔 사무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