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의 새 지평, 인도라는 안전망
위험 분산하고 미래규칙 함께 만들어 갈 파트너 … 연속성 유지하며 성과 축적할 전환점
지난 4월 19일 이재명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서 8년 만에 다시 인도를 국빈방문했다. 취임 후 1년도 되지 않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그것도 세계가 안전장치 없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출렁이는 지금 왜 하필 인도였을까.
국제질서가 제대로 작동하던 시대에는 규범과 제도가 위기의 속도를 늦추는 완충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규범은 흔들리고, 공급망은 갈라지며, 해상 교통로는 불안정해졌다. 충격은 더 빠르게 번지고 위험은 더 멀리 퍼진다. 이런 시대에 불안정한 질서 자체를 함께 견뎌낼 파트너를 찾는 것은 중대한 과제다. 인도는 그 드문 나라 중 하나다.
흔들리는 세계와 인도라는 안전망
인도는 거대한 내수시장, 젊은 인구구조, 디지털 역량과 과학 기술력, 제조업 육성 의지, 에너지 전환, 우주와 해양 전략까지, 한 나라 안에 미래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갖춘 나라다. 세계 각국의 자본과 기업이 인도를 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 1월에는 유럽연합이 ‘모든 거래의 어머니(mother of all deals)’라 불릴 만큼 큰 무역협상을 성사시켰고, 영국과 일본, UAE도 앞다투어 인도와의 협력 폭과 속도를 높이고 있다. 인도는 이미 세계의 자본 기술 규범 항로가 교차하는 접점이 되었다.
인도의 또 다른 강점은 외교적 포용성과 일관성이다. 인도는 미국과 협력관계를 확대하면서도 전략적 자율성의 공간을 놓치지 않는다. 중국을 견제하지만 브릭스의 중심축으로서 반서구 일변도로 흐르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다. 글로벌사우스로서 그동안 소외된 나머지 국가들의 목소리를 내는데 앞장서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정권이 바뀌어도 외교의 큰 방향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점은 지금 같은 시대에 보기 드문 자산이다.
글로벌 시스템 취약한 고리 함께 보완
한국에게는 이런 인도가 필요하다. 한국 외교는 오랫동안 4강 관계의 긴장과 균형 속에서 움직여왔다. 그러나 공급망 재편과 지정학적 경쟁, 에너지 불안과 해양 리스크가 한꺼번에 커지는 시대에는 그 틀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은 안정적인 시장을 넘어, 함께 위험을 분산하고 미래의 규칙을 만들어 갈 파트너가 필요하다.
인도는 바로 그 접점에 위치한다. 글로벌사우스와 이어지는 외교 공간, 인도양으로 열리는 해양전략, 제조업과 디지털 전환이 만나는 산업 지형을 품고 있는 나라가 인도이기 때문이다.
이번 국빈방문의 첫번째 의미는 한-인도 협력을 글로벌 시스템의 취약한 고리를 함께 보완하는 방향으로까지 발전시켰다는 데 있다. 공동 전략비전과 세 개의 부속문서는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에너지 자원 안보 공동성명은 나프타와 LNG를 포함한 핵심 원자재의 안정적 수급, 에너지 가치사슬 전반의 연계, 청정에너지 협력의 필요성을 함께 다뤘다. 조선·해운·해사물류 협력 프레임워크는 인도의 조선 클러스터와 선박 발주 수요, 항만 개발 구상을 한국의 설계·생산공학·기자재·운영·유지보수 경험과 연결했다. 지속가능성 공동성명은 기후와 청정에너지, 저탄소 기술 협력을 하나의 축으로 묶어냈다.
중요한 것은 이 사안들을 따로따로 보지 않는 시각이다. 바다와 에너지, 물류와 공급망을 경제안보의 지형에서 통합적으로 다루고, 그 위에서 양국이 함께 회복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안전망을 두텁게 하려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인도양과 말라카, 중동을 잇는 해상교통로의 안정은 한국 기업의 원가와 한국 소비자의 물가, 한국 산업의 생존 조건과 직결된 문제다. 인도 역시 에너지 수입과 해상 교통로의 안정, 핵심 원자재와 산업 공급망의 회복력이 국가 발전의 필수 조건이다. 이번 방문은 바로 이 공통의 취약성을 공통의 협력 의제로 끌어올린 것이다.
한국이 인도 주도의 인도태평양 해양구상(Indo-Pacific Oceans Initiative)과 국제태양광동맹(International Solar Alliance)에 참여하기로 한 점도 주목할 만 하다. 이는 인도가 주도하는 인도태평양과 글로벌사우스형 공공재 구상에 한국의 동참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한국 외교가 인도를 지역질서와 다자협력의 설계자로 인정하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양국이 서로에게 안전망이 되어줄 뿐 아니라, 함께 지역의 안전망을 만드는 데에도 힘을 보태기 시작한 셈이다.
“칩에서 선박까지” 인도가 거는 기대
두번째 의미는 양국 협력이 거래적인 협력을 넘어 미래 성장의 공동 설계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이번 공동 전략 비전에는 산업협력위원회, 경제안보대화,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 개선, 디지털 브릿지(Digital Bridge), 방산혁신플랫폼 KIND-X, 우주협력 등이 함께 담겼다.
이들 플랫폼에서 다루는 조선 반도체 이차전지 핵심광물 희토류 그린수소 원전프로젝트 해외자원개발, 그리고 인공지능(AI)과 데이터 거버넌스 등은 모두 다음 시대의 경제질서를 좌우할 분야들이다.
산업협력위원회는 양국 산업 담당 부처가 전략산업을 지속적으로 조율할 통로가 되고, 경제안보대화는 공급망 회복력, 시장 다변화, 첨단기술 협력을 다루는 제도적 장치가 된다. CEPA 개선 협상은 인도에는 무역불균형과 비관세장벽, 서비스 진출 문제를 조정하는 과정이고, 한국에는 인도 시장 접근성과 투자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바뀐 산업·공급망 환경에 맞게 양국 경제관계의 틀을 다시 짜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모디 총리가 한-인도 협력을 “칩에서 선박까지, 인재에서 기술까지, 환경에서 에너지까지(from chips to ships, from talent to technology, and from environment to energy)”라고 표현한 것은 이 흐름을 정확히 짚은 말이다.
특히 인도가 수많은 파트너들 속에서도 한국에 특별한 기대를 거는데는 이유가 있다. 제조와 상용화, 조선과 철강,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이차전지와 방산에서 축적한 한국의 경험 때문이다.
인도는 시장과 인재, 디지털 생태계와 전략공간을 제공한다. 두 나라가 결합할 때 협력은 수출이나 공장 이전을 넘어 미래 산업의 공동 설계가 된다.
실행구조 가속화 할 조건 마련
이번 방문의 또 다른 의미는 실행 구조의 보강이다. 한-인도 관계는 오랫동안 잠재력에 비해 성과가 더뎠다. 중요하다는 말은 많이 했지만, 현장에서는 규제와 정보 부족, 금융제약, 후속 조치의 공백이 반복되었다. 이번 방문의 또 다른 의미는 바로 이 간극을 줄일 실행 구조를 보강했다는 데 있다. 중소기업 협력, 금융당국 간 협력, 지급결제 시스템 연계, 연례 철강대화, 조선 인력훈련, 문화·창조산업 협력, 장학과 한국어 교육 확대는 모두 그 저변을 두텁게 하는 장치들이다.
한국이 인도와의 협력을 신남방정책의 연장선 위에서 자연스럽게 이어가되, 굳이 새로운 이름을 덧입히지 않은 점도 의미가 있다. 인도도 한국과의 협력을 ‘룩이스트(Look East)'에서 '액트이스트(Act East)'로 이어져 온 동방정책의 연장선 위에 두고 있다. 새로운 이름이나 구호보다는, 양국이 이미 정한 협력의제를 흔들림 없이 실천하는 성숙한 외교가 필요한 때다.
특히 대인도 외교는 단기 성과의 대상으로 다뤄서는 안된다. 인도에 장기투자를 한다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더딤과 낯섦, 때로는 불편함이 있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을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비크싯 바라트 2047(Viksit Bharat 2047)’, 곧 2047년 선진국 비전은 장기 국가전략이다. 한국은 그 여정에 함께할 수 있는 최적의 파트너 중 하나다. 결국 관건은 이번 방문에서 마련한 협력의 틀을 얼마나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실행해 가느냐에 있다.
합의한 의제를 꾸준히 이행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대인도 외교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눈에 보이는 성과를 하나씩 축적해 가는 일이다. 그 축적이 쌓일 때, 이번 인도 방문은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힌 전환점으로 남게 될 것이다.
세종연구소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