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사법부는 중대재해 예방의 훼방꾼인가
오늘, 4월 28일은 국제노동기구(ILO) 등이 지정한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한국은 그동안 노동계에서 추모행사를 해오던 것에서 벗어나 2024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개정해 이날을 법정기념일인 ‘산업재해근로자의 날’로 지정했다. 정부는 이날을 포함한 1주간을 추모기간으로 정했다.
지난 22일 저녁에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 기념음악회-기억을 넘어 희망으로: 우리가 부르는 안전한 내일, 고 박송희·고 안영재를 기억하며’가 열렸다. 박승희는 2018년 김천문화예술회관에서 발생한 추락사고로 희생된 조연출가였고 안영재는 2023년 세종문화회관 공연 전 연습 중 추락사고 이후 긴 투병 끝에 지난해 세상을 떠난 젊은 성악가다.
공교롭게도 공연 직전인 이날 낮 수원고법 형사1부(재판장 신현일)는 지난 2020년 4월 29일 38명의 노동자가 숨진 이천 물류창고 화재참사 이후 지금까지 가장 많은 23명의 희생자를 낸 경기도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와 관련해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박순관 대표에게 1심의 징역 15년과 비교해 무려 11년을 감형한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유족들은 오열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다시 입길에 올랐다. 김앤장의 ‘불패신화’도 다시금 많은 이들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김앤장은 그동안 맡았던 중처법 위반 사건과 관련해 다수의 노동청 내사 종결, 검찰 불기소 처분을 얻어냈다. SPC 허영인 회장과 관련한 불기소와 무혐의가 대표적이다. 또 기소된 건과 관련해서도 ‘중처법 위반 1호’ 삼표그룹 정도원 회장 1심 무죄,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거제사업장 사망 사고 1심 무죄 등을 꼽을 수 있다.
아리셀 공장 화재 책임자에 면죄부를 주다니
예술가들도 나서 중대재해 예방을 위해 애쓰고 있으나 일부 판사들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런 흐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아리셀 참사의 내막을 제대로 톺아보면 이런 판결은 정말 어처구니없다.
판결 내용과 양형 선고 이유를 살펴보니 2심 재판부가 1심 재판부와는 달리 온갖 법 기술과 견강부회 논리로 최고 경영자를 봐주기 위해 작정하고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사법부 안에서도 징역 15년과 4년으로 각각 판이하게 판결한 만큼 하루빨리 대법원이 이를 정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언론사들은 앞다퉈 사설, 논평 등을 통해 이번 판결이 중처법을 무력화한 것이라며 대법원에서 바로잡을 것을 촉구했다. 노동계와 정치권, 그리고 법조계에서도 거세게 비판한다. 민주노총은 “중처법을 무력화하는 사법부의 폭거”라고 목소리를 냈다. 민주당은 “‘돈으로 형량을 산다’라는 잘못된 신호를 (우리 사회에) 준 판결”이라고 지적한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노동자들의 집단 죽음 앞에서도 똬리를 틀고 있다.
민변은 “‘민사 손해배상은 피해자가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인데도 합의를 이유로 대폭 감형했다. 1심 재판부가 ‘평소에는 안전을 도외시하며 비용을 아끼다가 사고가 발생하면 막대한 금전력을 동원해 합의하고 감형받는 세태’를 지적했음에도, 항소심 재판부는 이를 애써 무시했다”라고 비판했다.
아리셀참사대책위원회는 “2심 재판부의 판결은 결국 ‘중처법을 (심각하게) 위반해도 중형을 받지 않을 수 있다’라는 선언이자, ‘중처법은 무력한 법’이라는 선언이다. 아리셀 2심 재판부는 우리 사회에 법과 원칙·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는 사법부의 존재가치마저도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인간 존엄을 부정하고 사회의 정의를 파탄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대재해처벌법 무력화에 대한 우려 커져
사법부에 대한 사회적 불신은 내란 관련 재판에서도 일부 판사들의 초범 경감 등 억지 논리로 인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 중처법과 관련한 이번 판결이 불에 기름을 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법부는 성찰해야 한다.
모든 판사는 이번 아리셀 2심 재판을 계기로 해 제대로 된 판례 하나가 수십, 수백 명의 노동자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예술인도 산재 예방의 목소리를 내는데 판사가 양심이 있다면 주저할 명분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사법부가 중대재해 예방의 훼방꾼이라는 말을 듣는 게 부끄럽지도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