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폐기하고 신원전 도입하는 유럽

2026-05-06 13:00:02 게재

러시아 의존 벗어나 에너지 주권 찾기…‘핵융합’ ‘SMR’ 중심 신원전전략 추진

인공지능(AI)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전장이 이란이다. 전쟁에 AI 기술이 적극 활용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AI 패권을 둘러싼 에너지 전쟁도 본격화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와 컴퓨팅센터 운영에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다. 풍력·태양광과 달리 기후의 영향을 덜 받는 청정에너지인 원전에 대한 인식도 유럽연합(EU)에서 바뀌고 있다. 스위스 유력지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NZZ)과 미국 뉴욕타임스 등이 연일 이란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AI를 꼽는 이유다.

최근 독일 출신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탈원전이 전략적 실수였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지난달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에너지 정상회의 개막회의에서다. 그는 “1990년에는 유럽 전력의 1/3이 원전에서 나왔지만 지금은 약 15%에 불과하다”며 “믿을 수 있고 저렴한 저탄소 전원을 외면한 것은 실수였다”고 밝혔다. 원전을 폐쇄한 독일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의 정책을 겨냥한 발언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쇼B1, 쇼B2 원자력 발전소 출처 연합뉴스

유럽의 반성 “탈원전이 전략적 실수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이어 미국·이스라엘이 이란을 침공하면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독일을 포함한 EU 경제도 악몽 같은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NZZ는 “EU는 핵 발전을 위해 장기간 러시아에 의존할 것”이라며 “체코 핀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원전 역시 러시아식 가압수형 원자로(VVER, Water-Water Energetic Reactor)에 기대고 있다”고 밝혔다.

EU 에너지위원인 댄 요르겐센은 “우리가 러시아 전쟁금고를 채우는 데 기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러시아 석유는 드루시바 라인을 통해 유럽으로 흘러들어오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EU를 ‘이중적’이고 ‘위선적’이라고 공격하는 이유다.우크라이나전쟁 중에도 EU 국가들은 러시아 가스·석유뿐 아니라 러시아 우라늄에도 크게 의존하고 있다. EU 국가들이 필요로 하는 농축 우라늄의 25%가 러시아산이다. 유럽이 러시아 원전 의존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체코 등 일부 국가는 아직 러시아 원전회사 로사톰이 제공하는 연료봉에 의존하고 있다. 헝가리 팍스에는 로사톰이 새 원전을 건설하고 있다.

반면 스웨덴은 미국 웨스팅하우스와의 협업을 발표했다. 우크라이나는 2014년 러시아 로사톰 대신 웨스팅하우스와 계약했다. 러시아에 의존했던 우크라이나는 다른 EU 국가들에 비해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당시 러시아 외무부는 이 조치를 “위험한 실험”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침공해 합병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데에는 원전을 둘러싼 경제적 이유뿐 아니라 지정학적 이유도 작용했다. 로사톰은 단순한 상업 기업을 넘어 유럽 국가들을 묶어두는 전략적 수단이다. 11년 전 우크라이나가 웨스팅하우스와 계약하지 않았다면 전쟁 과정에서 심각한 에너지 문제에 직면했을 것이다. 아직도 EU의 많은 국가는 러시아 핵 경제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핵융합’ ‘SMR’ 프로젝트 가시권

유럽에서 에너지 주권을 높이기 위한 원전 전략은 크게 두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하나는 ‘인공태양’으로 불리는 핵융합 원전이고, 다른 하나는 소형모듈원전(SMR)이다. 먼저 신기술인 핵융합 원전 개발에는 독일 정부가 앞장서고 있다. 핵분열 원전 정책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시도다.

독일은 “핵융합에 25억유로, 약 4조3275억원을 투자해 세계 최초 핵융합 발전소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독일 핵융합 연구의 선두주자로는 그라이프스발트에 있는 연구용 원자로 ‘웬델슈타인 7-X’가 있다. 독일 기업 프로시마 퓨전과 가우스 퓨전도 핵융합 발전소 건설에 나섰다. 독일 연방정부 연구·기술·우주부(BMFTR)는 올해 초 “핵융합을 위한 세 개의 허브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프로시마 퓨전은 유럽을 대표하는 30개 이상 기업이 참여하는 원전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메르츠 독일 총리도 지난해 사민당과 체결한 연정협정문에 “세계 최초 핵융합 원자로는 독일에 건설한다”고 명시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핵융합 발전은 저렴하고 기후 친화적인 전기를 제공하고 에너지 주권을 강화한다”며 “방사성 폐기물을 생성하지 않아 핵에너지에 비판적인 집단도 수용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독일 연방주들도 핵융합 유치에 적극적이다. 대표적으로 헤센주와 바이에른주가 나서고 있다.

EU 집행위는 SMR 도입 촉진 전략도 내놓았다. 2030년대 초 유럽 내 SMR 가동이 목표다. EU는 탄소배출권거래제(ETS) 재원을 활용해 2억유로, 약 3413억원 규모의 민간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유럽이 차세대 원전의 글로벌 허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의 원전 대국 프랑스는 즉각 환영하고 나섰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원자력은 경쟁력·탈탄소·에너지주권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탈리아 조르자 멜로니 총리도 1987년 천명했던 탈원전을 철회하고 올 2월 원전 복원 법안을 결정했다.

벨기에와 리투아니아 등도 신규 원전 건설에 나서고 있다. 세계적으로 앞서가는 SMR 모델은 미국·일본기업이 합작한 GE-히타치의 BWRX-300이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달링턴 원자력발전소에는 향후 몇 년 안에 소형모듈원전 4기가 건설될 예정이다. 건축 허가도 이미 났다.

영국 롤스로이스도 북웨일스 와일파에서 세 개의 소형 원자로 건설을 시작했고, 영국정부는 26억 파운드, 약 5조2130억원 투자를 선언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설립한 테라파워도 상업용 소형 원자로 건설에 나섰다. 미국 원자력청은 테라파워에 와이오밍주 345메가와트 나트륨 냉각 원자로 건설을 허가했다.

세계적으로 많은 대기업이 전력망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SMR이 증가하는 에너지 수요에 대한 보편적인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같은 우리 대기업도 SMR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미국 중국 러시아에 이어 유럽도 원전 강국으로 가고 있다. 우주 빅뱅과 진화 역시 핵반응, 원자력과 관련이 있다. 원자력은 우주 탄생 초기와 별에서 일어나는 근원적 에너지를 현대 기술로 재현하거나 이용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흥미로운 대목은 영국 찰스 3세 국왕이 최근 미국 의회 연설에서 “번영을 위해 핵융합과 양자역학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점이다.

한국도 원자로 3종세트 적극 추진해야

한국은 원전 강국으로서 프랑스에서 미국·중국 등 7개국이 참여한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 ITER 프로젝트가 연기되면서 우리 분담금은 1조6000억원에서 2조9000억원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초고온·초고압 상태에서 가벼운 수소 원자핵들이 합쳐져 헬륨이 되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하는 핵융합 기술도 주목받고 있다. 한국형 초전도 핵융합 연구 장치인 KSTAR가 대표적이다.

이재명정부는 전남 나주에 1조2000억원 규모의 인공태양 연구시설 부지를 선정했다. ‘역차별’ 비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원전의 중심인 대구·경북(TK)에 독일처럼 수조원을 투자하는 ‘SMR 클러스터’를 건설할 적기다. 지난 2월 국회는 SMR 촉진 관련법을 통과시켰고, 과기정통부는 “2030년까지 1200억원을 기술 개발에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현 정부가 내건 균형발전과 SMR 상용화를 위해서는 TK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요구된다. 또 2025년 10월 30일 경주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개발을 승인했다. 이는 국제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인 결정으로 실무 차원에서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핵융합 원전, SMR, 핵잠수함으로 이어지는 원자로 3종 세트를 완성한다면 한국은 핵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부국강병을 위해서다. AI와 산업 경쟁력에는 에너지가 필수일 뿐 아니라, 양자역학 등 신기술·신과학에서도 원자력은 핵심이다.

김택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