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병기 공정위원장, 마닐라서 ‘재벌 개혁·플랫폼 규제’ 승부수

2026-05-07 13:00:06 게재

제25차 ICN 연차총회서 한국 경쟁정책 전략 주제발표

“대기업 내부거래 GDP 31% … 경제력 집중 완화 필수”

과징금 상한 20%로 파격 상향 … 플랫폼법 입법 지원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전 세계 경쟁당국 수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재벌 중심의 지배구조 개선과 플랫폼 시장의 독과점 해소를 향한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7일 공정위에 따르면 주 위원장(사진)은 전날 필리핀 마닐라 메리어트 호텔에서 개최된 ‘제25차 국제경쟁네트워크(ICN) 연차총회’ 전체회의 발표자로 나섰다. 그는 ‘경쟁당국 효과성: 전략적 기획과 우선순위 설정’을 주제로 한국 경쟁당국이 마주한 과제와 미래 전략을 상세히 공개했다.

◆“재벌중심 경제구조, 혁신 장애물” = 주 위원장은 한국 경제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가로막는 최대 장애물로 ‘대기업 집단의 경제력 집중’을 꼽았다. 주 위원장은 현재 글로벌 경쟁환경에 대해 “전 세계 각 국은 재생에너지 중심의 탈탄소 에너지 전환과 AI 디지털기술 혁신이 가속화되는 새로운 기술 환경을 맞이하고 있다”며 “독과점과 경제력 집중이 강화되고 부의 편중도 심화되고 있으며 경제적 강자와 약자의 협상력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경쟁당국은 적어도 지난 30년 동안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부적절한 관행을 감시하며 이에 대한 제재를 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며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한국 경제의 모습은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어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며 발언의 수위를 높였다. 발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자산총액 5조원 이상 대기업집단(공시집단)의 매출액은 최근 5년 평균 국내총생산(GDP) 대비 약 79%에 달한다. 특히 이들 집단 내 내부거래 규모는 GDP 대비 약 31%에 이르는 실정이다.

주 위원장은 “이러한 경제력 집중은 시장의 역동성을 약화하고 중소기업의 성장 기회를 차단하는 독과점화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와 부당한 경영권 승계는 기업 가치와 글로벌 경쟁력을 훼손하는 걸림돌”이라고 비판했다.

◆플랫폼 규제 ‘입법지원’ 공식화 =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에 따른 플랫폼 기업들의 횡포에 대해서도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주 위원장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플랫폼 관련 법안들의 입법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공언했다. 주요 대책으로는 플랫폼 입점 소상공인을 보호하기 위한 ‘정산대금 지급 기한 준수’와 ‘대금 예치 제도’ 등이 언급됐다. 특히 플랫폼이 단순 중개를 넘어 실질적인 판매자 역할을 할 경우, 소비자 피해에 대해 플랫폼도 공동 책임을 지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온라인 눈속임 상술인 ‘다크패턴’에 대한 처벌 수위도 대폭 높아진다. 주 위원장은 “기존의 소액 과태료 방식에서 벗어나 피해 규모에 상응하는 강력한 경제적 제재를 부과해 기만행위를 근본적으로 뿌리 뽑겠다”고 강조했다.

공정위는 법 위반 행위에 대한 경제적 응징 수위를 해외 선진국 수준으로 대폭 끌어올릴 계획이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과징금 부과율 상한의 조정이다. 시장지배력 남용 행위에 대한 과징금을 현행 관련 매출액의 최대 6%에서 20%로 파격 상향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담합 행위에 대해서도 중대성에 따라 하한선을 최대 18%까지 높여 법 위반 억제력을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조사권도 한층 강화된다. 기업이 공정위의 조사에 불응할 경우 전체 매출액에 상응하는 이행강제금 성격의 과징금을 도입해 집행의 실효성을 높이기로 했다. 이렇게 거둬들인 과징금은 ‘불공정거래 피해 구제 기금’의 재원으로 활용해 경제적 약자를 돕는 데 사용된다.

◆사건처리 ‘15개월 → 8개월’로 단축 = 조직의 체질 개선도 병행한다. 공정위는 올해 상임위원 1명을 포함해 총 167명의 인력을 증원해 현원을 813명까지 확충했다. 이를 통해 조사와 경제 분석, 심판 관리 역량을 전방위적으로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그는 “인력 확충을 통해 현재 평균 15개월이 소요되는 사건 처리 기간을 8개월 수준으로 약 40% 단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신속한 사건 처리를 통해 시장의 불확실성을 빠르게 해소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정부의 직접 규제뿐만 아니라 시장의 자정 기능을 높이기 위한 ‘사적 집행’ 수단도 강화된다.

우선 기술 탈취와 같은 악의적 행위에 대응하기 위해 피해자의 입증 부담을 줄여주는 ‘한국형 증거개시제도(K-Discovery)’를 도입한다. 또 소비자들이 집단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피해가 구체화하기 전이라도 위법 행위를 중단시킬 수 있는 ‘예방적 금지청구제’ 도입도 검토한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등 경제적 약자가 단체를 구성해 대기업과 협상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뒷받침도 추진된다. 주 위원장은 “단체협상 행위에 대해 담합 규정 적용을 배제하는 방안을 마련해 협상력 불균형을 해소하겠다”고 밝혔다.

마무리 발언에서 주 위원장은 “에너지와 디지털 대전환이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효과적인 법 집행을 위한 전략적 설계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며 “한국의 경험과 전략이 세계 경쟁당국에 유용한 참고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번 ICN 연차총회는 필리핀 경쟁위원회(PCC) 주최로 전 세계 148개국 경쟁당국 관계자들이 참석해 오는 8일까지 진행된다. 공정위는 이번 행사를 계기로 호주, 이탈리아, 유럽연합(EU) 등과 고위급 양자 협의를 갖고 글로벌 공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할 예정이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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