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대한민국 제조업 아웃 포커싱(Out-Focusing) 하자
사진을 찍을 때 아웃포커싱(Out-Focusing)이라는 기법이 있다. 피사체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배경의 심도를 의도적으로 흐리는 기법이다. 지금 대한민국 제조업이 서 있는 자리도 이와 닮아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산업을 '현재의 업종'으로 정의해 왔다. 조선은 배를 만드는 산업이고, 자동차는 차를 만드는 산업이며, 디스플레이는 화면을 만드는 산업이었다. 산업의 경계는 명확했고 기업들은 그 안에서 더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경쟁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제 그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 중국은 압도적인 생산능력과 투자 규모를 앞세워 제조업 전반에서 한국을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과거처럼 기술 우위만으로 격차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다. 가격 경쟁력도, 생산량 경쟁도 쉽지 않다. 특히 디스플레이 산업은 이러한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 한때 TV와 스마트폰 시장을 주도했던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은 세계 최고의 OLED 기술력을 확보했지만 시장의 구조 자체가 변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대규모 투자로 LCD에 이어 OLED까지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기술 우위만으로 격차 유지 어려운 시대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 디스플레이 산업은 “디스플레이를 버리면서” 다시 디스플레이 산업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더 이상 네모난 화면을 고집하지 않는다. 사각의 프레임을 버리자 새로운 시장이 열린 것이다. 폴더블, 롤러블, 스트레처블 기술은 단순한 제품 형태의 변화가 아니다. 디스플레이의 정의 자체를 “보는 화면”에서 “공간과 사물을 지능화하는 표면”으로 확장시키는 혁명이다. 더 중요한 변화는 전혀 다른 산업에서 나타나고 있다. 최근 AI 산업의 폭발적 성장으로 GPU와 HBM을 연결하는 첨단 패키징 기술이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문제 해결에 디스플레이 산업에 축적된 기술들이 해결사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면적 유리기판 처리 기술, 초정밀 박막 형성 기술 등이 AI 반도체 패키징의 핵심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OLED를 만들기 위해 개발했던 기술이 뜻밖에도 AI 반도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기반 기술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대한민국 산업 전체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앞으로 살아남는 산업은 자신의 업종을 지키는 산업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기술의 본질을 재정의”하는 산업이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산업의 미래는 “무엇을 만드는가”보다 “어떤 기술과 역량을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자동차 회사는 더 이상 단순한 제조기업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와 모빌리티 플랫폼 기업으로 변하고 있고, 조선 산업은 친환경 에너지와 해양플랜트 산업으로 확장되고 있다. 배터리 산업 역시 저장장치를 넘어 에너지 인프라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과거 한국 산업은 하나의 제품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특정 제품이 아니라 기술과 산업의 경계를 넘나드는 확장성이 국가 경쟁력이 될 것이다. 산업 간 경계가 무너지는 시대에는 기존 업종의 정의에 스스로를 가두는 순간 오히려 성장의 기회를 잃게 된다.
‘산업의 상상력’ 다시 정의할 때
이제 대한민국 산업도 기존 산업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무엇을 만드는 산업인가”라는 질문보다 “우리는 어떤 기술을 가진 나라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산업의 경쟁력이 아니라 ‘산업의 상상력을 다시 정의하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