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국 의료의 뿌리, 일차의료 흔들리고 있다
대한민국 의료의 가장 큰 강점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접근성이다. 국민 누구나 집 가까운 곳에서 필요할 때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비교적 짧은 대기시간 안에 의사를 만난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의료 접근성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바로 일차의료다. 동네 의원을 중심으로 한 일차의료는 의료체계의 가장 낮은 단계가 아니라 가장 넓고 중요한 기반이다. 감기나 몸살 같은 질환의 치료는 물론, 만성질환 관리, 예방접종, 질병의 조기 발견과 상급병원으로의 적절한 연계까지 담당하는 국가 의료체계의 토대인 셈이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대한민국에서 일차의료의 중요성은 더욱 절대적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지난해 고령인구 비중 20%를 넘어서며 본격적인 초고령사회에 들어섰다. 고령화가 가속화될수록 의료의 중심은 단순한 질병 치료에서 만성질환 관리와 건강 유지로 이동한다.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등은 수술이나 첨단 장비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동네에서 환자를 20년, 30년 장기간 지켜보며 삶을 이해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일차의료가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초고령사회, 일차의료는 국가 생존 전략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일차의료의 뛰어난 비용 효율성이다. 보건복지부 국민보건계정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료비 가운데 의원급 지역사회 기반 통원보건의료제공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30.3%에 불과하다. 국민의료비의 1/3 수준 비용으로 국민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필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며 의료체계 전체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러한 일차의료의 가치를 증명한 대표적 사례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전국의 동네 의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신속항원검사와 재택치료 관리를 전담하며 의료체계 붕괴를 막아냈다. 일차의료가 최일선에서 감염병의 방파제 역할을 해준 덕분에 대형 병원들은 중증 환자 치료에 집중할 수 있었다. 위기 상황에서 일차의료는 국가 의료 안보를 지탱하는 핵심 인프라임이 확인된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 의료정책은 일차의료를 강화하기보다 단기적인 비용 통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특히 최근 단행된 검체검사 수가 인하를 비롯한 일방적인 규제 정책은 지역 의료기관의 생존을 정조준하고 있다. 필수적 기본 검사를 수행할수록 적자가 누적되는 기형적인 구조 속에서 당장 내과, 산부인과, 비뇨의학과 등 필수 진료과 의원들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의료는 오늘의 비용 절감이 내일의 사회적 비용 폭발로 되돌아오는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일차의료가 약화되면 동네 의원에서 해결할 수 있었던 환자들이 대형병원으로 몰리게 되고, 상급종합병원의 과밀화는 더욱 심화된다. 경증 환자가 응급실과 외래를 채우게 되면 정작 초를 다투는 중증·응급 환자가 적시에 치료받기 어려워진다.
결국 국민의 불편은 커지고, 훨씬 비용이 높은 병원급으로 의료비 부담이 이전되면서 국가 전체의 의료비가 폭발하는 부메랑이 될 뿐이다. 일차의료가 흔들리는 의료체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일차의료를 통제와 삭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근시안적 시각에서 벗어나 국가의 핵심 인프라로 인정하는 정책적 전환이다.
국민 건강권 지키는 가장 확실한 투자
동네 의원이 살아야 지역 의료가 살고, 대한민국 의료가 지속될 수 있다. 일차의료를 지키는 것은 특정 직역이 아닌 국민의 건강권과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