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워시, ‘100년 권력 Fed’ 손보나
기존 운영방식에 비판적 … 더 적게 말하고, 더 적게 개입하고, 더 작은 대차대조표 선호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세계 금융 대통령’으로 통한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이 ‘세계 경제의 혈액’이라고 할 수 있는 달러를 조절하는 권한을 지녔기 때문이다. 연준 의장이 기침을 하면 세계경제가 감기에 걸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연준 의장들, ‘경제대통령’ 권한 휘둘러
월가에는 역대 연준 의장의 힘을 보여주는 전설들이 여럿 전해 내려온다. 최장수 연준 의장인 윌리엄 마틴(1951년 4월~ 1970년 1월 재임)은 “파티가 무르익을 때 펀치볼(술 단지)을 치우는 것이 연준의 일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연준이 경기과열 조짐에 브레이크를 거는 악역을 떠맡아야 한다는 말이었지만 그만큼 막강한 권한을 지녔음을 시사하는 말이기도 했다.
중동 오일쇼크 와중에 연준 의장 자리에 오른 폴 볼커(1979년 8월~1987년 8월)는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무려 20%까지 끌어올렸다. 1981년 6월의 기준금리 20%는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금리로 기록돼 있다. 볼커의 초강경 긴축으로1982년 말 미국의 실업률은 대공황 이후 최고치인 10.8%까지 치솟고 수많은 기업이 도산했다. 그러나 볼커는 긴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월가에서는 이를 오일쇼크보다 더 무서운 ‘볼커 쇼크’라고 불렀다.
지난 22일 100세의 일기로 타계한 앨런 그린스펀 연준 의장(1987년 8월~ 2006년 1월)은 1996년 12월 한 연설에서 “비이성적 과열”이라는 한마디로 세계 주식시장을 흔들었다. 다음 날 도쿄와 홍콩, 유럽 등 세계 증시에서 수천억 달러가 증발했다. 그 때 “그린스펀이 기침하면 세계가 감기에 걸린다”는 말이 나왔다. 그린스펀의 후임인 벤 버냉키 연준 의장(2006년 2월~ 2014년 1월)은 디플레이션에 맞서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냉키는 “헬리콥터로 돈을 뿌려서라도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이론을 좋아했다. 버냉키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세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1조달러를 밑돌던 연준의 자산 규모는 4조달러를 훌쩍 넘는 수준으로 불어났다.
최초의 여성 연준 의장이었던 재닛 옐런(2014년 2월~ 2018년 2월)은 긴축이라는 칼을 뽑아 들었다. 전임 의장인 버냉키가 뿌린 천문학적인 유동성을 회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준의 자산 축소 과정은 마치 페인트가 마르는 것을 지켜보는 것처럼 지루한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옐런은 점진적인 금리 인상과 자산축소 정책을 이어갔다.
지난달 퇴임한 제롬 파월 의장(2018년 2월~ 2026년 5월)은 코로나19라는 세계적 재난 앞에 ‘무제한 구원투수’를 자처했다. 파월은 기준금리를 제로금리(0~0.25%)로 낮췄다. 또한 국채와 지방채, 회사채, 주택저당증권(MBS) 등을 무제한에 가깝게 매입하는 초강력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연준의 자산은 불과 몇 달 만에 4조 달러에서 7조 달러로 불어났다. 연준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대차대조표를 가진 ‘비만한 중앙은행’으로 변모했다.
역대 연준 의장들은 이처럼 ‘경제 대통령’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펀치볼을 치워 파티를 멈추게 하거나, 헬리콥터로 돈을 마구 뿌리거나, 금리를 20%에서 제로까지 들었다 놨다 하거나, 말 한마디로 증시를 얼어붙게 하는 등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온 것이다.
힘이 클수록 질문도 무거워진다. 시장이 연준을 움직이는가, 아니면 연준이 시장을 움직이는가? 연준의 권한은 어디까지 허용돼야 하는가? 연준의 시장개입은 불가피한 선택인가, 아니면 시장을 왜곡하는 과도한 권력행사인가? 흥미롭게도 이는 지난달 22일 취임한 케빈 워시 신임 연준 의장이 던지는 질문들이다. 워시는 연준의 막강한 권한을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행사하려 할까.
WSJ, “워시, 연준을 어떻게 바꾸려는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21일(현지시간) ‘케빈 워시는 연준을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 그가 맞닥뜨린 장애물은 무엇인가’라는 긴 제목의 분석기사를 실었다. WSJ는 “케빈 워시는 지난 20년 동안 공적인 무대에 서 왔다”면서 “그동안 그는 연준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잘못된 길로 들어섰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아 수많은 연설과 팟캐스트 기고문 인터뷰를 내놓았다”면서 앞으로 워시가 이끌게 될 연준 개혁의 방향을 분석했다.
연준은 1913년 설립 이후 한 세기 동안 무소불위의 힘을 키워왔다. 워시 의장은 ‘100년 동안의 권력’ 연준에 어떤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을까?
첫째, 연준이 너무 말을 많이 하는 것 아닌가? 버냉키 전 의장은 "통화정책은 98%가 소통이고, 2%가 행동"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워시는 버냉키의 연준 운영방식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워시 의장은 그동안 연준 위원들이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연준은 점도표(dot plot)를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열고, 수시로 시장에 여러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워시는 이렇게 묻는다. "연준은 정확히 예측하지도 못하면서 왜 시장에 끊임없이 미래를 말하려 하는가?"
둘째, 연준이 너무 뚱뚱해 지는 것 아닌가? 현재 연준이 보유한 자산 규모는 6조 7000억달러에 달한다. 지난 2006년 워시가 연준 이사로 합류했을 당시와 비교하면, 연준의 자산은 약 4배 수준으로 커졌다. 2008년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 등 비상 상황에서 대규모 양적완화 정책을 펴면서 자산을 급격히 늘렸다. 워시는 비대해진 연준을 일관되게 비판해 왔다.
WSJ는 “워시는 연준이 원래 있어야 할 영역을 벗어나 금융시장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라면서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연준은 결과적으로 미 연방정부의 재정 적자를 보다 쉽게 늘리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셋째, 연준의 인플레이션 잣대는 제대로 된 것인가? 워시는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경제성장이 가파를수록 인플레이션이 높아진다고 가정하는 경제모형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 중앙은행들이 금융정책의 토대로 삼고 있는 필립스 곡선 패러다임의 한계를 지적한다. 필립스 곡선이란 고용이 늘어나면 임금상승 압력이 커지고 결국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WSJ는 “워시는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소득증가나 고용확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과도한 재정 지출에 있다고 주장한다”고 전했다. 워시는 필립스 곡선에 대한 대안으로 ‘실시간 인플레이션 지표(real-time inflation measure)’를 제안한다. 경제 전반에서 움직이는 수백만 개의 가격 정보를 실시간으로 추적해 인플레이션을 측정하고 예측하자는 것이다.
중앙은행, 시장 뒤로 물러나 있어야
연준에 대한 워시의 문제의식은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 좀더 시장에 맡기자는 것이다. 설혹 시장의 실패가 벌어지더라도 지나치게 개입하면 더 큰 왜곡이 발생한다는 것이 워시의 지론이다. 그렇다면 워시가 그리는 연준은 어떤 모습일까? 더 적게 말하고, 더 적게 개입하고, 더 작은 대차대조표를 가진 중앙은행이다. 중앙은행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시장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워시의 철학은 취임 후 첫 행보에서 이미 드러났다. 그는 지난 17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향후 금리 전망을 나타내는 점도표에 점을 찍지 않았다. 섣부른 예단으로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신호를 보내기보다 시장의 흐름을 지켜봐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워시는 FOMC 회의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금융시장이 새로운 경제 데이터에 반응할 때 가장 잘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금융시장이 ‘새로운 정보에 대해 연준은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질문에 집착하게 되면, 시장은 훨씬 덜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과연 워시는 연준을 바꿀 수 있을까? 지난 100여년 동안 연준이 누려온 ‘펀치볼’이나 ‘헬리콥터’ 권력을 스스로 내놓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연준이사회의 동료들이 워시의 뜻에 따라줄까? 워시는 시장 뒤편으로 물러서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럴수록 시장은 워시를 주목하고 있다. 워시는 여전히 ‘세계 금융 대통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