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칼럼

‘AI의 저주’가 우리 곁에 서성대는 건 아닐까

2026-06-29 13:00:07 게재

일본계 반도체 장비회사에 다니는 30대 초반의 청년 C씨는 얼마 전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삼성전자 노조의 파업과 임금협상 결과가 보도되면서 그의 성취감은 단숨에 무너졌다. 성과급과 위로금을 합한 삼성전자 직원의 최고 연봉이 4억~5억원 선에 달한다는 소식은 청년에게 ‘내가 흘린 땀방울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실존적 혼란을 안겼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그는 대기업 임원 출신의 멘토를 찾았다. ​하소연을 들은 멘토는 “수평적으로 타인과 비교하며 불행을 자초하지 말고, 수직적으로 자신의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면서 성취감을 얻으라”고 조언했고 겨우 위안을 얻은 청년은 일터로 돌아갔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모든 청년에게 이처럼 맞춤형 조언을 해줄 멘토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급여격차가 부른 나비효과는 이미 단순한 위화감을 넘어 위험한 사회적·경제적 단층선을 만들고 있다. 삼성전자 평택·화성캠퍼스와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를 잇는 경기 남부 ‘반도체 벨트’의 부동산 시장에서는 역대급 성과급에 사내 주택자금 대출 유동성이 결합하면서 최대 36조원 규모의 부동산 대기 자금이 형성되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거대한 자산 격차는 열심히 살아온 타 업종 직장인과 중소기업 재직자들을 한순간에 낙오자로 만드는 ‘벼락거지 심리’를 확산시키며 근로 의욕을 마비시키고 있다.

반도체 호황이 초래한 양극화의 역설

​이 기묘하고 비정상적인 파장의 밑바닥에는 인류가 맞이한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점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반도체 슈퍼사이클 대호황은 과거의 주기적 경기 호황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공지능(AI) 혁명이 촉발한 문명적 현상이다. 초거대 AI를 구동하기 위한 메모리 반도체의 수요 폭발과 가격급등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천문학적인 초과 이윤을 안겨준 게 본질이다.

​문제는 이 화려한 반도체 불빛 뒤편에서 섬뜩한 고용한파와 실업의 저주가 동시에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생성형 AI의 확산으로 기업들이 신입 채용을 극도로 축소하고 ‘AI 숙련 경력직’ 중심으로 고용구조를 재편하면서 청년층이 선호하는 정보통신(IT)과 전문직 상용 일자리는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기술의 진보가 소수 대기업 노동자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보상을, 대다수 청년 구직자에게는 진입 장벽과 소외를 동시에 안기는 고용 양극화가 시작된 것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은 정부와 정치권의 과욕과 착시증세다. 이재명 대통령은 반도체 초과세수를 빚 갚는 데 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며 미래 R&D 투자에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 청와대 정책실장은 올해 양대 반도체사 영업이익이 500조원을 돌파하고 추가 법인세수만 무려 110조원 이상에 달할 것이라는 놀라운 전망치를 내놓았다.

당국은 이 막대한 돈을 청년 프로그램과 현금성 복지 재원으로 쓰겠다고 했다. 이처럼 거대한 유동성이 재정확대를 통해 시장에 풀리면 인플레이션을 자극해 물가폭등을 유발하고, 정권의 방만한 예산집행과 재정낭비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

​예상치 못한 국부가 유입되었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국가 운명은 극명하게 갈렸다.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을 복지와 현금 분배로 탕진하다 파멸한 베네수엘라의 ‘자원의 저주’는 대표적인 대재앙이다. 거대 가스전 발견에 취해 복지재정을 늘리다 전통 제조업 경쟁력을 잃고 장기 경제침체를 겪은 네덜란드, 북해유전 호황을 미래자산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감세와 소비재원으로 즉시 소모한 영국 역시 실패작들이다.

반면 노르웨이는 석유로 번 돈을 정권이 임의로 쓰지 못하도록 전액 국부펀드에 적립해 해외자산에만 투자함으로써 제조업을 보호하고 세계 최고의 보루를 구축했다. 미국 알래스카주 또한 석유 수입의 일정 비율을 영구기금에 강제 저축하도록 제도화해 정치권의 포퓰리즘 전용을 차단했다.

​AI 반도체 착시가 대한민국을 망가뜨리지 말라는 법이 없다. 만약 지금의 AI 특수가 수년 뒤 신기루처럼 꺼져버린다면 비대해진 소비패턴과 임금체계, 무너진 가치관은 국가 경제의 다른 부문을 황폐화하는 ‘네덜란드병(Dutch Disease)’의 저주로 돌아올 것이다.

초과세수 ‘국가 미래 국부펀드’로 남기자

​AI 혁명과 이에 따른 ‘노동의 재정의’라는 문명사의 변곡점이 던진 진짜 숙제는 눈앞에 떨어진 일시적인 초과이윤을 누가 많이 가질 것인가를 두고 다투는 미시적 쟁투가 아니다. 단기 정권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초과세수를 별도의 독립된 ‘국가 미래 국부펀드’로 별도로 적립하는 진화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 펀드를 통해 미래 원천 기술에 장기 우회 투자하고 기계가 인간을 빠르게 대체해 나가는 시대에 낙오될 국민의 일자리와 공동체의 생존을 보장하는 영구적인 안전망으로 삼아야 한다. 화려한 불꽃놀이 뒤에 찾아올 어둠에 대비하는 제도적 절제만이 오늘의 특수를 내일의 재앙이 아닌 축복으로 바꿀 수 있다.

언론인

전 한국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