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비운 자리, 한국이 채운다…‘나토 3.0’ 시대 열려
유럽 안보 재편 수혜자 될까 … K9·천무·천궁 앞세운 K방산 급부상
18일 벨기에 브뤼셀. 피트 헤그세스 미국 전쟁부(국방)장관이 나토 동맹국 대표들 앞에서 “위기 시 항공모함, 보급함, 공중급유기, 전투기 수십 대를 더 이상 유럽에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유럽 주둔 미군에 대한 6개월 리뷰를 발표했다. 나토 유럽 최고사령관인 그린케비치 대장은 “미국이 다중 동시 분쟁에 대비해 유럽과의 불건전한 상호의존을 단계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나토 3.0’의 공식 선언으로 해석했다.
같은 시각 7000㎞ 떨어진 경남 창원에서는 또 다른 변화가 감지됐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K9 자주포 생산라인은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된 포신과 궤도는 이미 폴란드와 노르웨이 핀란드 에스토니아 루마니아 등 유럽 각국으로 향하고 있다. 브뤼셀의 결정이 창원의 생산 속도를 더욱 끌어올리는 모양새다.
미국의 전략 변화는 세가지 공백을 만들고 있다.
첫번째는 즉각적 전력 공백이다. 그동안 유럽 국가들이 의존해 온 미국의 전략자산 공급이 줄어들 가능성이 커졌다. 전투기와 정찰자산, 해군 전력, 공중급유 체계 등은 단기간에 대체하기 어렵다.
두번째는 군수 능력의 공백이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주요국들은 장거리 타격 미사일과 방공체계, 포병 전력 부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더구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각국의 무기 재고도 크게 감소했다.
세 번째는 구조적 공백이다. 유럽연합(EU)은 8000억유로 규모의 재무장 계획인 ‘리암 유럽’(ReArm Europe)을 추진하고 있지만 생산능력이 문제다. 자금은 확보했지만 단기간에 대량 공급할 생산기반이 부족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K방산의 경쟁력이 부각된다. 한국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대량생산 체계를 유지해왔다. 평시에도 생산라인을 가동해 온 덕분에 유럽 국가들이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빠른 공급 능력’을 갖추게 됐다.
대표 사례는 폴란드다. 2022년 폴란드는 K2 전차와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를 대규모로 도입했다. 서방 방산업체들이 통상 3~5년의 납기를 제시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수개월 내 초기 물량 공급을 약속했다.
속도가 승부를 갈랐다. K9 자주포는 현재 폴란드와 핀란드 노르웨이 에스토니아 루마니아 등 유럽 주요 국가에 수출됐거나 계약이 체결됐다. K239 천무 다연장로켓도 미국산 하이마스(HIMARS)와 경쟁하며 유럽 시장에서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방공 분야에서는 천궁-II의 경쟁력이 주목받고 있다. 중동 시장에서 대형 수출 계약을 잇달아 성사시키면서 유럽 시장 진출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방위사업청에 따르면 2025년 한국 방산 수출액은 약 154억달러를 기록해 역대 두 번째 규모를 달성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현대로템, LIG넥스원,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방산 주요 기업들의 수주잔고는 100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된다. 나토 3.0은 한국의 외교·안보 지형도 바꾸고 있다.
한국은 단순한 무기 수출국을 넘어 동맹국들의 안보 역량을 보완하는 전략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최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캐나다 정상회담에서 “방산 강국인 한국이 캐나다의 안보 역량 강화에 적극 기여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현재 한화오션 등 한국원팀은 최대 60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캐나다 차세대 잠수함 사업을 놓고 독일 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TKMS)과 경쟁하고 있다.
물론 기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첫번째 도전 과제는 생산능력이다. 빠른 납기는 K-방산의 최대 강점이지만 동시에 취약점이 될 수 있다. 추가 수주가 급증할 경우 인도 일정 지연이라는 역설적 상황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자국산 우선주의다. 유럽은 한국산 무기를 도입하면서도 장기적으로는 자국 방산 생태계를 키우려 하고 있다. 폴란드를 비롯한 주요 국가들은 현지 생산과 기술 이전 요구를 강화하고 있다.
마지막은 기술 자립이다. KF-21 보라매는 한국 방산의 상징이지만 엔진과 일부 핵심 무장체계는 여전히 미국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독자 플랫폼을 수출하려 해도 미국의 수출 승인과 기술 통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구조다. 전문가들은 K방산이 이제 ‘철강 판매자’에서 ‘안보 파트너’로 전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단순히 무기를 공급하는 단계를 넘어 현지 생산과 공동개발, 정비·수리·운영(MRO), 부품 공급망 구축, 교육훈련 체계까지 아우르는 종합 안보 협력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나토 3.0은 분명 한국에 호재다. 유럽의 안보 공백과 맞물리며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공백을 메우는 것과 파트너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유럽의 안보 질서가 재편되는 지금, K방산 역시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세계 4대 방산 강국’이라는 구호를 넘어 지속 가능한 전략 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시험대에 올랐다. 나토 3.0 시대을 맞아 가장 많은 무기를 파는 나라가 아니라 가장 오래 신뢰받는 안보 파트너로 변신이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