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형 랩’ 고객 피해…NH투자 첫 배상책임 인정

2026-06-30 13:00:02 게재

금감원 분조위 ‘선관주의·충실의무 위반’ 조정결정

고객별 손해액 60~70% 배상, 민사책임 기준 제시

증권사가 ‘채권형 랩’ 상품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일부 고객의 이익을 위해 다른 고객에게 손실을 입힌 행위 등에 대해 금융당국이 처음으로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채권형 랩은 증권사가 고객과 1대1 투자일임계약을 맺고 고객의 자금을 채권과 기업어음(CP) 등에 운용하는 맞춤형 자산관리 상품이다. 다수의 자금을 함께 운용하는 펀드와 달리 고객별 투자 목적과 운용 기간에 맞춰 개별적으로 운용된다.

금융감독원은 29일 금융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를 열고 채권형 랩 상품을 운용한 NH투자증권에 대해 고객 자산을 시장금리보다 높은 가격에 CP와 채권을 매입하고 만기 미스매칭 전략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리스크 관리를 소홀히 한 책임을 인정해 손해액의 60~70%를 배상하도록 결정했다. 투자일임업자의 선관주의·충실의무 위반을 인정한 분조위 첫 결정이다.

이번 분쟁은 2022년 레고랜드 사태 이후 금리 급등으로 채권 가격이 급락하면서 불거졌다. 채권형 랩에 가입한 고객들은 만기 환매가 지연되거나 원금 손실을 입었고, 일부는 증권사가 다른 고객의 목표수익률을 맞추기 위해 시장가격보다 비싸게 채권과 CP를 매입하는 등 부적절한 운용을 했다고 주장하며 민원을 제기했다.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은 2023년 3월 800억원을 투자한 뒤 만기에 환매를 받지 못했고 결국 원금보다 4억6000만원 적은 795억4000만원을 돌려받았다. 산은인프라자산운용도 같은 해 150억원을 투자했다가 약 4억5000만원의 평가손실이 발생한 사실을 통보받은 뒤 운용 중단을 요구했고, 이후 만기가 지난 뒤에도 즉시 상환을 받지 못했다.

분조위는 NH투자증권이 고객 자산을 운용하면서 시장금리보다 높은 가격으로 채권과 CP를 매입한 것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선관주의)를 위반한 행위라고 판단했다. 또 만기가 임박한 랩 상품에 잔존만기가 10개월인 채권과 CP를 편입하는 등 만기 미스매칭 운용으로 리스크 관리를 소홀히 한 점도 충실의무 위반에 해당한다고 봤다. 이와함께 증권사의 상당수 고가매수 거래의 동기가 다른 고객의 목표수익률을 맞추기 위한 소위 ‘제3자 이익도모’ 성격이었다는 금감원 검사 결과도 책임 판단의 근거로 제시했다.

이에 따라 분조위는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에 손해액의 70%(12억6000만원), 산은인프라자산운용에는 60%(3억9000만원)를 각각 배상하도록 결정했다. 손해액은 목표수익률 미달액과 지연손해금을 기준으로 산정했으며, 이는 앞서 법원이 인정한 손해액 산정 방식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배상비율은 채권·CP 거래의 의도와 거래 빈도, 투자일임 지시 이행 여부, 투자 경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차등 적용했다.

앞서 금융당국은 지난해 2월 채권형 랩·신탁의 불건전 운용과 관련해 9개 증권사에 기관경고·기관주의와 함께 총 289억70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금감원은 이번 결정이 행정제재에 이어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 기준을 제시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증권사의 적정 가격 산정 등 건전한 채권 운용 관행을 정착시키고, 분쟁조정을 활성화해 소비자 권익 보호를 강화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이경기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