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1500원대 환율 고착화가 의미하는 것
원달러환율이 6월 들어 평균 1520원을 넘어서며 IMF 외환위기 이후 28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과거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때 일시적으로 솟구치던 환율이 이제는 일상적인 풍경으로 자리잡는 모양새다. 시장 안팎에서는 1500원대 환율의 새로운 기준, 이른바 뉴노멀(New Normal)의 고착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일각에서는 여전히 미 연준의 금리인상 조짐이나 중동전쟁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의 거시적 요인에서 원인을 찾지만 지금의 고환율은 한국 경제의 기저에 자리한 ‘구조적 균열’, 즉 자본 유출 가속화를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는 새로운 시각이 대두되고 있다.
고환율 일상화, 구조적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신호
과거 환율급등이 국가부도 위험이나 급격한 외화자금 유출에 기인했다면 지금의 원화약세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으로 움직인다. 최근 환율상승 요인의 상당 부분은 국민연금과 개인 투자자(서학개미)의 자발적인 해외 투자 확대와 맞물려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해외투자와 투자소득이 환율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해외투자가 평균 수준보다 약 3% 증가할 때 원달러환율은 0.7%p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국내자본의 해외 증권투자는 2024년 670억달러에서 지난해 1403억달러로 두배 이상 폭증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해외 증권투자 비율 역시 3.6%에서 7.5%로 크게 높아졌다. 벌어들인 달러가 국내에 유입되기도 전에 더 높은 수익률을 찾아 해외로 빠져나가는 구조적 달러수요가 가중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해외에서 발생한 배당과 이자수익이 국내로 유입되면 외환시장 달러 공급을 늘리는 효과가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투자소득이 평균 대비 약 8% 증가하면 원달러환율은 약 0.4%p 하락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하지만 최근 양상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직접투자 수익이 국내로 송금되지 않고 현지에 재투자되거나 유보되는 비중이 늘면서, 서류상 투자소득 흑자와 실제 외환시장의 달러 유입액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보고서에서도 재투자 비중이 1%p 높아질 경우 원달러환율이 약 0.4%p 상승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이러한 고환율의 뉴노멀은 실물경제와 서민가계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고환율이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살려 경제를 견인한다는 공식이 있었다. 그러나 원자재와 중간재의 대외의존도가 극도로 높아진 지금은 환율상승이 곧바로 생산원가 급등으로 이어진다.
더욱 뼈아픈 것은 민생 경제의 어려움이다. 원화의 실질구매력을 나타내는 실질실효환율 지수가 금융위기 이후 최저치(84.75)로 떨어지면서 필수수입품 가격이 폭등하고 에너지 비용은 꺾이지 않고 있다. 이는 가계의 실질구매력을 떨어뜨리고 소상공인들을 고사위기로 내몬다.
외환당국이 외환건전성부담금 면제 조치를 연장하거나 시장 미세조정(Smoothing Operation)을 펼치는 것은 단기처방일 뿐이다. 당국의 진단대로 향후 반도체 산업을 중심으로 투자소득 흑자가 확대되더라도 국내 생산성 둔화와 고령화가 지속된다면 기업들의 해외투자 선호와 현지 유보 경향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는 대외지급능력이 국내 성장과 환율안정으로 자동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막연한 공포심보다 경제체질 개선하는 계기로
국내 자본의 선순환 고리가 끊어진 만큼 이제는 중장기적인 환율안정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첫째, 해외 자본의 국내 환류를 촉진해야 한다. 해외 자회사 배당금의 국내 송금을 촉진할 수 있는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기관투자자들이 안정적으로 자금을 운용할 수 있도록 환헤지 환경을 정비해야 한다.
둘째, 국내 자본시장의 매력도와 투자수익률을 근본적으로 높여야 한다. 국내로 유입된 자금이 다시 해외로 유출되지 않도록 혁신적인 주주환원 제고와 규제혁신을 추진하고 국내 생산성을 높여 자발적인 해외투자 유인을 완화해야 한다.
셋째,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와 취약계층 선별 보호가 병행돼야 한다. 환율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완충지대를 구축하고 수입물가 상승의 직격탄을 맞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 대한 핀셋 지원이 지속돼야 한다.
환율 1500원 시대는 한국 경제가 자본유출 구조와 내수 취약성이라는 이중의 숙제와 마주했다는 경고등이다. 그렇다고 막연한 공포심에 사로잡히기보다 이를 투자소득의 국내 환류 확대와 성장잠재력 제고를 동시에 이뤄내는 경제체질 개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형재 재정금융팀장